소설리스트

75화 (75/133)

그게 김아리인지, 김아인인지 모르겠지만

같이 점심을 한 정도, 창현, 그리고 아리는 일로 복귀하기 전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보낸다.

“아우- 추워. 1, 2월에는 얼마나 추워지려고 벌써 이렇게 춥냐.”

“그러게요. 커피 따뜻한 거로 드릴까요?”

“아니. 아아.”

“아- 역시 얼죽아.”

“이상하게 한식은 먹고 나면 아아가 당겨.”

“네, 알겠습니다. 김 변호사님은요?”

“저는 카푸치노요.”

“아, 그렇죠. 찬 바람이 불면 카푸치노죠.”

창현은 능숙한 솜씨로 주문받은 음료들을 만들어서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해결> 사람들이면 누구나 아이스아메리카노나 카푸치노쯤은 만들었지만, 창현이야말로 진정 바리스타였다.

“아, 역시 이창현이 만들어주는 커피는 뭐가 달라도 달라.”

“뭐가 다른 거죠? 같은 빈이고 같은 기계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비법이 있는 거야? 커피빈 양을 다르게 해야 한다거나, 압을 다르게 해야 한다거나.”

“있어요.”

“뭔데?”

“잇츠···매직.”

“에이-.”

“아! 그러고 보니까 변호사님 깁스한 거 푸르셨네요.”

“뭐야? 이제 본 거야?”

“네.”

“너 나한테 관심이 너무 없다.”

“사무실에서 발을 볼 일이 없으니까.”

“우리 방금 밖에 떡볶이 먹으러 갔다 왔거든.”

“아, 몰랐네요. 두 달 된 건가요?”

“응. 아우 그동안 어찌나 불편하던지···.”

“반깁스였잖아요?”

“반깁스도 불편해. 사실 마지막 2주는 별로 아프지도 않았는데, 의사가 계속하고 있으라고 해서 하고 있었어. 다친 데 계속 다친 거라서 조심하라고.”

“그렇잖아요. 지금 세 번째였잖아요.”

“응. 아, 근데 이번에 연차 내고 병원 다녀오는 김에 미뤄뒀던 종합검진을 했거든.”

“이제요? 저는 과장님이 빨리 내라고 해서 가을에 냈는데.”

“미루다 미루다 이제 했어. 아- 근데 확실히 삼십 대는 이십 대 때랑 다르데. 몇 년 전 만 해도 진짜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거든. 근데 역류성식도염 증상도 보이고 나더러 요산 수치가 높다고 하더라.”

“그거 술 많이 먹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이야.”

“아, 윤정도의 청춘도 이렇게 가는 건가?”

“청춘은 이미 간 거 아닌가요?”

“이 생퀴가···. 김 변? 갑자기 왜 그리 심각해? 배 아파?”

“아니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요.”

아리는 마시던 카푸치노도 테이블 위에 놔둔 채 자기 사무실로 뛰어갔다.

---*---

“응. 아, 근데 이번에 연 차 내고 병원 다녀오는 김에 미뤄뒀던 종합검진을 했거든.”

“이제요? 저는 과장님이 빨리 내라고 해서 가을에 냈는데.”

자기 방으로 돌아온 아리는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했다. 직장인 건강검진 관련해서 이것저것 검색하던 그녀는 사업주가 근로자의 건강검진 결과를 2년에 1회 이상 확인하도록 있는 관련 법을 찾았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제99조, 1항 「사업주는 상시 사용하는 근로자 중 사무직에 종사하는 근로자(공장 또는 공사현장과 같은 구역에 있지 아니한 사무실에서 서무·인사·경리·판매·설계 등의 사무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를 말하며, 판매업무 등에 직접 종사하는 근로자는 제외한다)에 대해서는 2년에 1회 이상, 그 밖의 근로자에 대해서는 1년에 1회 이상 일반건강진단을 실시하여야 한다. 다만, 사업주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건강진단을 실시한 경우에는 그 건강진단을 받은 근로자는 이 규칙에 따른 일반건강진단을 실시한 것으로 본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모니터가 반대로 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아리는 서둘러 검색창을 내렸다.

“변호사님.”

“네, 과장님.”

“다른 게 아니라요. 원래 산안법에는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 결과를 받게 되어 있거든요.”

“네에?! 딸꾹.”

유이헌 과장은 마치 아리가 무엇을 검색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깜짝 놀란 아리는 딸국질을 해버리고 만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딸꾹···아요.”

“물 좀 가져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딸꾹···요.”

유이헌은 아리의 딸꾹질이 진정되길 잠시 기다렸다 말을 이었다.

“원래는 그런데, 우리 법무법인은 1년 1번씩 받도록 대표변호사님이 정하셔서요.”

젠장···.

회사복지가 너무 좋아도 문제네.

“아···네.”

“변호사님은 3월에 입사하셔서 아직 1년은 안 되기는 했는데, 바쁘시지 않을 때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

“건강검진 결과는 저한테 주시면 돼요. 건강보험공단에서 하는 것도 괜찮고 아니면 사설 의료업체에서 받으신 걸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비용은 영수증 주시면 제가 처리해드리고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드리면 돼요?”

“딱히 데드라인은 없습니다. 그냥 내규가 연 1회라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알려주세요.”

“별말씀을요.”

유이헌이 건강검진 관련해야 내규를 안내하고 나가자, 아리는 참고 있던 한숨과 함께 걱정이 터져 나왔다.

“하- 어떡하지···.”

---*---

의정부, 설강중학교 근처.

“굉장히 밝고 똑똑한 아이였어요.”

최성태는 아리의 중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을 만나 뵐 수 있었다. 이제는 은퇴하고 동네에서 작은 화방을 운영하고 계신 분이었다.

“혹시 그러면 왜 고등학교를 중퇴했는지 아십니까?”

“그게 저도 나중에 졸업한 애들한테 들었는데, 고등학교 진학 후에 질이 안 좋은 애들이랑 어울렸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네요. 아리가 절대 그럴 애가 아니에요.”

“아리 씨가 고등학교는 서울로 갔죠?”

“네. 아리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아리하고 아인이는 어머니하고 지냈어요.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계시는 동네로 이사한다고 들었어요. 집안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두 분 사이가 좋아져서 가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최성태는 김아리를 잘 아는 사람처럼 선생님에게 접근했다.

개인정보 유출이라 다들 조심하는 세상인데, 운이 좋게도 만남을 거절하지 않는 선생님을 찾아냈고, 그녀를 통해서 기록에서 알 수 없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혹시 아리 씨 소식을 가장 최근까지 들었던 친구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불편하시면 제 연락처를 드려도 되고요.”

“정인이. 정인이가 제일 친했어요. 정인이 연락처가···. 그러니까 아리의 은인이 지금 아리를 찾고 싶어 한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아! 여기 있다. 도정인이라고 얘가 아리하고 제일 친했고, 고등학교 가서도 연락을 하고 지냈어요. 얘는 아직도 스승의 날이면 나한테 연락을 하는 아이예요. 얘도 아리만큼 아주 착한 애죠.”

“감사합니다.”

“꼭 찾았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찾으시면, 저한테 꼭 한번 연락 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보고 싶네요. 궁금하기도 하고. 집안 형편만 괜찮았으면, 의사가 되었든, 변호사가 되었든 했을 아이인데···.”

“그러겠습니다. 아,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아인 씨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아인이도 똑똑했죠. 근데 아리만큼은 아니었어요. 근데, 그 은인이라는 분이 아인이도 아시나요?”

“네, 아리 씨가 언급한 적이 있어서요.”

“아···. 아인이도 공부를 잘했어요, 아리만큼 활달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디서 듣기로는 로스쿨에 갔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대충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들은 최성태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커피숍을 나왔다.

“감사했습니다. 아리 씨를 찾으면 꼭 연락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참 묘한 사람이다. 사회성이 없으면서도 이런 조사를 할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상황에 맞는 연기를 잘한다.

가게를 나온 최성태는 곧바로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도정인 씨 되시나요?”

아리의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

늦은 시각,

<법무법인 해결>.

퇴근하려던 정도는 막내 파트너의 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는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아직도 일해?”

“아, 변호사님. 퇴근하시게요?”

“응.”

“저도 곧 하려고요.”

“뭘 보고 있었는데? 연말이라 한가하지 않아?”

한가했다.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가 보고 있었던 건 사건 파일이 아니라 야매로 건강검진을 받을만한 병원들이었다.

“저번에 주신 노트하고 지난 사건들 보고 있었어요.”

“오올- 역시···.”

“이러니 여자친구가 안 생기지. 점심때 내 말 못 들었어? 청춘 금방 간다니까, 일없으면 나가서 소개팅을 해, 헌팅을 하든. 내가 소개시켜 줘?”

“아니요. 괜찮습니다.”

“왜? 뭐야? 혹시 내가 저번에 그런 일을 당해서 여자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오케이, 그런 거 아니면 내가 잘 아는 동생 하나 소개시켜줄게. 진짜 괜찮은 애야.”

“진짜 괜찮은데···.”

“사양하지 말고 진짜 한 번만 만나봐. 내가 오늘 집에 가서 걔랑 얘기해보고, 관심 있다고 하면 내일 연락처 줄게.”

“제가 지금 연애 관심이 없어서···.”

“그럼 간다. 수고해.”

사람은 참 좋은데, 눈치가 없다.

아리는 지금 소개팅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아니어도 조속히 건강검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정인아, 나 아리.]

[잘 지내지?]

오후 내내 고민한 아리는 그래도 한때는 친했던 동창에게 문자를 보내본다.

---*---

송파, <정인피부과>.

작은 개인 병원 안으로 최성태가 들어오자, 안내 직원이 용건을 물었다.

“원장님을 찾아왔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전화로 연락드렸습니다. 최성태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잠시만요.”

안내 직원은 의사의 집무실을 노크하고 들어갔다가 나온 후, 최성태를 방금 들어갔던 방으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전화드린 최성태라고 합니다.”

“아예- 양윤주 선생님한테서 연락받았습니다. 아리를 찾고 계신다고요?”

“네.”

“아- 신기하다.”

<정인피부과> 원장 도정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뭐가 말씀이시죠?”

“아니요. 사실 중학교 졸업하고도 아리하고 연락하고 지냈어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문자는 주고받고 지냈는데, 몇 년 전부터 서로 일이 바빠서 연락이 뜸해졌어요. 그랬다가 한 1년 전쯤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제가 병원 개업하고 정신이 없을 때라 여유가 없어서 못 빌려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고는 연락이 끊겼어요. 몇 달 뒤에 여유가 좀 생겨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번호를 바꿨는지 없는 번호라고 뜨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했었는데···.”

아리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었다.

그것도 누군가가 아리를 찾겠다고 물어물어 자신에게 연락한 이 시점에서.

“아리 씨가 최근에 원장님께 연락을 했다고요?”

“네. 아리를 찾고 싶어하는 분이 계신다고요?”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

조용히 알아보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것 참 잘됐네요.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제가 연락해보겠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뭐죠?”

“아직 아리 씨에게 저희가 찾는다고 말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가 직접 연락을 드리고 싶어서요.”

최성태의 부탁에 여자 의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 든 선생님과는 달리, 도정인은 최성태의 의도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최성태는 생각했다. 어쩌면 조만간 김아리를 직접 대면해야 해야 할 수도 있겠다고.

그게 김아리인지, 김아인인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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