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유회 (2)
숙성한 횟감의 좋은 부위만 대여섯 점씩 썰어서 새하얀 무채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은 것도 맛이 좋지만,
펄떡펄떡 뛰는 활어 한 마리를 수조에서 꺼내자마자 그 자리에서 썰어 한 점 남김없이 수북하게 쌓아 나오는 것만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아주머니, 여기 생선들이 다 뭐예요?”
“오늘 좋은 거는 다 드렸어요. 돌돔, 이시가리, 삼치···.”
“이건 전어인가요?”
“돌돔하고 이시가리 나오는데 전어는 여어서 생선으로 치면 안 되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것이 한눈에 봐도 기름지다.
색이 붉은 살은 담백한 것이 더 맛있고, 이렇게 흰 살은 기름진 것이 맛이 좋다.
사실 용궁사를 둘러본 뒤 요트에 올라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를 보고 온 이유도 오로지 저녁에 회를 맛있게 먹기 위함이었다.
“자자, 술 드시는 분들은 술을 채우시고 사이다 드시는 분들은 사이다 채우세요. 제가 ‘해’하면, 여러분들이 ‘결’하는 겁니다.”
남자들끼리 가는 야유회를 부산까지 온다고 투덜대던 정도였지만, 막상 제일 신났다. 술 한잔 마시기도 전에 한 옥타브 올라가 있다.
“해!”
“결!”
빈속에 8도쯤 되는 차가운 소맥이 들어가자, 곧바로 신경계를 마비시킨다. 시작부터 알딸딸하니 맛있는 회가 더 맛있을 예정이다.
“잘 먹겠습니다.”
아리는 두툼한 회 두 점을 집어 아무것도 찍지 않은 채 입 안에 넣었다.
아! 달다.
---*---
두어 시간 뒤···.
“지리로 하시겠어요? 매운탕으로 하시겠어요?”
“아, 그럼요. 해야죠. 매운탕으로. 여기 라면 사리도 주세요.”
한국인에게는 국룰이다.
돌돔을 먹었든 이시가리를 먹었든, 하다못해 다금바리를 먹었다고 한들 라면을 먹지 않으면 허전하다.
“선배님, 여기 제 술 받으세요.”
“야, 김아인! 너 왜 자꾸 나를 술 먹이는 건데. 너 오늘 밤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 아니야?”
제법 취한 영도. 낮에 바닷바람도 쐬겠다, 음식 맛도 좋겠다. 평소보다 적게 먹었는데도 기분 탓인지 더 취하는 느낌이다.
“에이- 이거 선배님이 가지고 온 술이잖아요. 다 마셔야죠.”
“그렇지. 그거 내가 가지고 왔지.”
아리도 제법 취했지만 그렇다고 인사불성이 되려면 멀었다.
“야, 그거 2차 가서 먹어도 되잖아.”
“에이- 남자가 어떻게 1차에서 먹던 술을 2차까지 가지고 가요. 그 자리에서 끝내고 새판 시작해야지.”
“아- 또 얘가 나를 도발하네. 야, 너 내가 모를 줄 알고?”
“네?”
“너 좀 있다가 입수 안 하려고 나 일부러 먹이는 거지? 내가 다 알아, 인마.”
기어코 다시 팔씨름으로 붙었다.
피해 보려고 했지만 하도 집요하게 요청해서 요트 위에서 다시 팔씨름했고, 졌다.
사람들은 오른팔이라서 졌다고 생각했지만, 왼팔로 했어도 졌을 거다. 그날은 열의 한번 일어날 법한 승부였다. 운 좋게 오일남 선생님의 기습 전략이 통했던 거다.
하지만 아리가 영도에게 계속 술을 권하는 이유는 입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피하고 싶지만, 그녀의 계획은 같은 방을 쓰게 된 영도를 뻗게 하는 것이었다.
“아, 있다가 해변에 가서 입수할 거예요. 남아일언 중천금이죠.”
“오케이. 좋아. 그럼, 따라.”
때마침 주문한 매운탕이 상 위로 올라온다.
좋은 고춧가루를 썼는지, 매운탕 때깔이 기깔란다. 향긋한 쑥갓 향이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 마늘, 후추, 고춧가루 등 양념 냄새가 난다.
라면을 넣기가 아까울 정도지만, 안 넣을 수 없다.
더 맛있을 거니까.
“자, 적셔-”
“적셔-.”
그렇게 1차가 끝나고 사내들은 숙소 앞 바닷가로 자리를 옮겼다.
---*---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앞 해변.
자리가 끝나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정도와 직원들은 2차로 치킨집을 가기 전 소화를 시킬 목적(?)으로 모래사장을 강아지들처럼 뛰어다니고 있고.
나이가 좀 있으신 최성태 사무장과 남성진 차장님은 그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들고 계신다.
아리는 다른 한쪽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 있는 서지우에게 다가갔다.
“부장님하고 차장님은 술도 안 드시면서 끝까지 계시네요.”
“잘 안 드셔서. 일 년에 한 번 드실까···.”
평소보다 말투가 유하다. 그 역시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다.
“왜요?”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
“네? 아니, 저는 그냥.”
그렇다고 또 완전히 부들부들해진 건 아니다.
“왜 말 안 한 거야?”
대화를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서지우가 질문을 던졌다.
“예?”
“1년 전쯤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다며?”
‘헉! 어떻게 알고 계시지?’ 엄청난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사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술이 번쩍 깬다.
‘어디까지 아시는 거지? 혹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는 걸까?’ 아리는 콩닥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네.”
아리는 어떻게 아셨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걸 묻는 순간 ‘너 가짜지!’하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물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묻기 전에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최 부장님께서 어머니 계시는 요양병원에 다녀오셨어.”
‘최성태 부장님이?’ ‘왜?’ ‘대표님이 시켜서?’
“내가 지시했어. 김 변이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그랬구나. 그럼 혹시···?’
“김 변도 몇 개월 동안 의식을 잃었다면서?”
‘알고 계신다···.’
“예.”
“지금은 괜찮은 거야?”
“네,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리의 대답에 서지우는 곧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마치 대답에 담긴 진심을 가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침묵이다.
두꺼운 옷 아래로 뛰는 심장이 들킬까, 아리는 숨도 천천히 내뱉었다.
“아버지는? 이력서에 아버지에 관한 사항은 없던데.”
“아버지는···어머니랑 이혼하시고 다른 분이랑 재혼하셨어요.”
서지우는 다시 잠시간 침묵했다.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며?”
“네.”
“뭐해?”
“헤어샵에 다닙니다.”
“그래?”
“네.”
“전에 김 변도 헤어샵에서 아르바이트했던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잠깐.”
“둘 다 그쪽에 관심이 있나 보네.”
“···네.”
가족 사항에 관해 묻고 있었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회사 대표로서 직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눈치랄까.
사실 야유회나 MT의 목적이 바로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평소 서로에 대해 잘 몰랐던 점을 공유하면서 전우애를 다지는 것.
자신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고 또) 궁금해하는 대표에 살짝 감동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아리는 초긴장 상태였다.
“혹시 깨어난 후에 병원에서 검사받아봤어?”
“네?”
“몇 개월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일어났으면 전체적으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거야.”
“아···네.”
“바빠서 그런 거면, 휴가 쓰고 받고 와. 원래 김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였으니까. 그리고 건강검진 비용도 지원돼.”
‘이건 걱정인가? 아니면 힐난인가?’ 따뜻한 제안인 듯하면서도 또 아직 회사에 도움이 안 된다는 뜻처럼도 들린다.
아리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서지우는 막내 파트너가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짐작했다.
수개월 간 의식불명이었다가 이제 막 눈을 떴는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고, 쌍둥이 여동생 혼자 빚을 져가며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상황에서 병원비는커녕 최대한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을 거라고.
그래서 인터뷰 때도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한 거고, 그렇게 돈에 집착했던 것이라고.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졌을 거라 여겼다.
두둑한 사이닝보너스로 집안에 빚은 어느 정도 해결했을 거고, 입사 한지도 이제 6개월이 지나가고 있었기에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거라고.
그래서 검사를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치매 유전자가 있다는 정보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정보를 알고 있는 걸 설명하기도 어려웠지만, 원래부터 치매 유전자가 있었다면 피해보상 청구액이 줄어들 수도 있었기에.
굳이 나서서 정보를 줄 이유는 없었다.
다만, 서지우는 알려주고 싶었다. 모친이 그런 유전자가 있다면, 너한테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검사를 받고 지금부터라도 대비하라는 걸 에둘러 말하는 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올라가면 바로 받아.”
아리는 곤란했다. 그의 지시를 거절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빠는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이고, 그런 검사는 대신 받을 수가 없다.
건강검진과 공항 검색대와는 완전 다른 이야기였다.
“···네.”
다행히도 서지우와의 불편한 대화는 다음 사건 때문에 그쯤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김! 얼른 와! 입수해야지!”
“변호사님, 술 먹고 바다에 들어가는 거는 위험한데요.”
“뭐야! 이제 와서 도망치는 거야?”
“아마 법으로 금지되었을 거예요. 취중입수.”
“웃기고 있네.”
“안 오면, 우리가 간다!”
“아···. 변호사님! 그냥 이제 소화 다 시켰으면 치킨이나 먹으러 갈까요.”
“이거, 이거 안 되겠구먼. 창현아, 가서 김 변 잡아!”
그렇게 추격전이 시작되려는 순간,
“악!”
모래사장을 달려오던 정도의 발복 그만 삐끗하고 만다. 그때 그 발목이다. 춘천의 암자에서 내려오다 접질린 그 발목.
“괜찮으세요, 변호사님.”
“앰뷸란스! 앰뷸란스!”
---*---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과.
아리의 아파트에서 그녀의 집을 봐주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나고 온 나중혁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주머니가 끌고 있던 카트에서 이상한 것을 본 거 같다.
“그거 성인용 기저귀 같던데···. 설마 아주머니가 쓰시는 건 아닐 거고···. 아닌가? 아주머니 쓰시는 건가? 잘못 본 건가?”
혹시나 의문이 풀릴까, 혼잣말을 내뱉고 있는 사이, 팀장이 그의 뒤로 들어온다.
“너 요새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냐.”
“어, 팀장님. 토요일인데 왜 또 나오셨어요?”
“설거지하기 싫어서.”
“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남자들이 설거지 담당이야. 아무튼 TV가 문제야. 내 손에 물을 묻히느니 나는 차라리 밖에서 먹겠어.”
“사모님 피해서 나오신 거예요?”
“피하기는 무슨···. 그냥 사무실 나와서 내가 좋아하는 웹소설이나 읽으려고 나왔다. 중혁이, 너 웹소설 보냐?”
“웹소설이요? 아니요.”
“봐. 재미있어. 요새는 이혼 후 대박 나는 소재가 트렌드인데, 너무 재미있어. 한번 봐봐. 내가 제목 가르쳐줄까? 이혼 후···.”
“괜찮습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이 쉐키. 너도 결혼해봐라. 내 심정 이해하지. 아, 누가 그런 거 써주면 좋겠다. ‘이혼 후 경찰청장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팀장의 등장에 생각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중혁은 그대로 수사를 그만둘 생각은 아니다.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분명 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