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유회 (1)
은평구, 아리의 아파트 건물 앞.
“왜 나와 있어? 아이코, 내가 늦었구나.”
“아니에요. 쓰레기 버릴 것도 있고 해서 미리 나와 있었어요.”
야유회가 있는 토요일 아침.
미리 나와 있던 아리는 오빠를 봐주러 오는 이모님과 마주쳤다.
“그거 내가 하면 되는 건데, 회사 가는 사람이 아침부터 더럽게 그런 걸 왜 만져.”
“아니에요! 이모님 일도 아닌데요. 하지 마세요. 저번에 보니까 청소도 해놓으셨던데.”
“겸사겸사하는 거지 뭐. 할 게 없어.”
아리는 진심 고마웠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렇게 마음 편하게 회사에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보수도 후하게 주었지만, 생각이 날 때면 꼭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씩 챙겨드렸다.
그랬더니 이모님도 단순히 식물인간 오빠의 간병인이 아니라, 집까지 관리해주셨고, 때로는 반찬까지 해놓고 가실 정도로 친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야유회에요.”
“야유회도 일이지 뭐. 나도 소싯적에 회사 다녀봐서 알아. 노는 게 노는 게 아니지. 긴장의 연속이고. 특이나 신입 사원한테는.”
“죄송해요. 주말에 쉬시지도 못하게 자꾸 부탁드리게 되네요.”
“아유, 걱정하지 말아. 집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어. 나야 나와서 돈도 벌고 좋지 뭐. 조심히 다녀와. 부산으로 간다고?”
“네. 내일 3시쯤에는 올 거예요. 바쁘신 일 있으면 오전에 가셔도 돼요.”
“아우,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집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감사합니다. 아,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제가 사가지고 올게요.”
“필요한 게 어디 있어. 그냥 다녀와.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모르는 누가 멀리서 보면 아들 같기도 하다.
“근데 혹시 기저귀 사다 놨어?”
“아, 맞다!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알았어. 내가 좀 있다가 마트 가서 사 오면 돼. 알았어, 가.”
“진짜 죄송해요. 여분이 하나도 없나요? 제가 인터넷으로 시키며 오후에는 배송해줄 거예요.”
“아니야. 나도 갈 일이 있어. 내가 있다가 가서 사 올게.”
“무거워요. 제가 지금 바로 주문할게요.”
“아니야, 됐어. 내가 가서 주문해오면 돼.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 미안해. 나가는 사람 붙잡고 내가 괜히 정신없게 만들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는 제가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죄송해요, 이모님.”
“아니라도. 뭐 별일이라고. 어여 가. 늦겠다.”
이모님은 죄송스러워 발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아리의 등을 떠밀었고, 그런 그녀에게 진심 감사한 아리는 계속 돌아보며 인사를 한다.
멀리서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는지도 모른 채.
---*---
변호사 세 명과 직원 여섯 명, 총 아홉 명의 <해결> 식구들은 15인 승 밴에 올라타 부산으로 향하고 있다.
작은 인원에 운전을 담당하는 남성진 차장과 송무팀 최성태 부장을 제외하면 전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중반이라 시끌벅적 떠들며 갈 것 같았는데···.
조용하다 못해 삭막하다.
그래도 야유회인데 조금은 흥겹게 갈까 해서 아리가 최신 노래를 틀어보지만, 별반 차이 없다. 몇몇은 이미 각자 이어폰을 끼고 자기 기기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고, 노래 듣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잔다.
“노래 좋은데요.”
그나마 옆자리 유이헌 과장이 한마디 해준 게 다였다.
“근데 원래 야유회 갈 때 이런 분위기에요?”
“네. 남자들밖에 없다 보니까. 이동할 때, 다 자거나 그냥 조용히들 해요.”
“그렇구나.”
“조금 적막하죠?”
“네.”
“그래도 막상 도착해서 식당 같은 데 가면 분위기 괜찮아요.”
“술 먹을 때만 좋다는 말이죠?”
“그렇죠. 하하.”
그렇게 유이헌 과장과 속삭이듯 이야기를 하는 와중,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도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는 대화에 끼어든다.
“김 변.”
“네, 변호사님.”
“근데 어르신은 안 오신대?”
“이중기 작가님이요?”
“응.”
원래 <해결>의 야유회에는 이중기 작가도 종종 참여했었다.
그만큼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연락해왔다.
“네, 안 오신···아니 못 오신대요.”
“왜? 봄에는 몰라도 가을에는 원래 거의 참석하시는데. 술 마시는 거 엄청나게 좋아하셔서.”
“글이 잘 안 풀리시나 봐요.”
이중기 작가는 지금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대본을 수정 중이었다.
애초에 12부작이었던 것을 각 시즌 8부작으로 된 두 개의 시즌으로 나누다 보니 대본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미 촬영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라 아무리 이중기 작가라고 해도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였기에 여유가 더 없었다.
모든 걸 육필로 쓰는 작가.
“그래서 뒷이야기는 어떻게 된대?”
“모르겠어요.”
“김 변한테도 안 얘기해주셔?”
“그럼요. 원래 아무한테도 안 해주시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둘이 워낙 친해서 김 변한테는 해주시는 줄 알았지.”
“아뇨. 절대 안 해주세요. 그냥 ‘아이디어가 떠올랐어’만 말씀해주시고 그 이후로 계속 수정 중이세요. 저도 진짜 궁금해서 계속 물어봤는데, 시즌 2는 라스베가스에서 일이 있었던 후 몇 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만난 남녀의 이야기가 될 거라네요. 일종의 극중극 형태라고 하셨고.”
“그래?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저도요.”
둘이 대화가 끝날 무렵, 이번에는 뒷자리 창현과 충오가 대화에 참여했다.
“윤 변호사님.”
“왜?”
“조니워커 블루 가지고 오셨어요?”
“이 새끼가. 그래 가져왔다.”
“유후- 설욕전 하셔야지요.”
“해야지! 김 변 이번에는 오른팔이야.”
“이번에는 또 뭘 걸까요?”
그렇게 하나둘씩 아리가 시작한 대화에 참여했고, 그들도 모르게 삭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졌다.
“벌칙은 어때요?”
“벌칙? 벌칙 좋지. 무슨 벌칙.”
“좀 있다가 해변에 갈 거니까. 진 사람이 입수하기로 할까요?”
문제는 매번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된다는 것이다.
정작 아리는 가만히 있는데, 자꾸 일이 커진다.
---*---
은평구, 아리의 아파트 앞.
나중혁은 단지 안 마트에서 장을 봐서 올라가는 한 중년여성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전에 김아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바로 그 여성분이다.
오전 내내 김아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좀처럼 보이질 않자 나중혁은 대신 그녀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좀 도와드릴까요? 짐이 많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카트 끌어서 무겁지 않아요.”
“아, 네.”
인상이 좋아 보여서 말을 걸어본 건데, 경계심이 상당하다.
“누구세요?”
“네?”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아···. 저는···.”
“경찰! 그때 집에 온 경찰이죠?”
“네, 맞습니다. 수원중부경찰서 형사입니다.”
“무슨 일이죠?”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 혹시 김아리 씨 집을 봐주시는 분이신가요?”
“그걸 왜 물으세요?”
“김아리 씨한테 연락을 몇 번 드렸는데, 연락이 안 와서요.”
“자꾸 귀찮게 하니까 그런 거겠죠.”
“네? 아니요. 저희는 김아리 씨를 도와드리려고···.”
“싫다는데 자꾸 이러는 것도 민폐에요.”
“그게 아니라, 가해자를 잡으려면 김아리 씨의 도움이···.”
“그럼 가서 잡으세요. 자꾸 귀찮게 하지 마시고.”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혹시 지금 김아리 씨 집에 계신가요?”
“없어요.”
“그래요? 언제쯤 나가신 건가요?”
“아침에 나갔어요.”
“아침에 나갔다고요? 아···. 그럼 언제 돌아오시나요?”
“그게 왜 궁금해요?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무슨 범죄자 잡으려고 하는 거 같네.”
틀린 말은 아니다. 나중혁도 자기 왜 그러고 있는지 정확하게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뛰어난 수사 세포가 자꾸 신호를 보내기에 그저 그 신호를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런 뜻은 없습니다. 바쁘신 것 같아서 자꾸 경찰서로 오시게 하는 게 죄송스러워서 겸사겸사 찾아왔을 뿐입니다. 지금 집에 안 계시면 이따가 저녁때에는 들어오실까요?”
“몰라요.”
“모르신다고요?”
“몰라요. 오늘 들어올지, 내일 들어올지, 모른다고요.”
“아···어디 가셨는데···?”
“모른다니까요.”
목소리가 올라가자, 지나가던 경비가 다가온다.
“정 여사님, 무슨 일입니까? 누가 귀찮게라도 하는 겁니까?”
평소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할아버지이다.
“당신 누구십니까?? 여사님, 아시는 분이에요?”
나중혁은 그녀가 상황을 설명해주길 기대했지만, 그녀는 그저 그를 노려볼 뿐, 설명 따위 할 의도가 없어 보인다.
“경찰입니다.”
“경찰이 왜 대낮에 이렇게 훌륭하시고 기품 있으신 우리 정 여사님을 귀찮게 하는 건가? 우리 조카가 경찰인데? 어디 소속?”
자세히 설명하려던 나중혁은 그만두었다. 상황을 경비 아저씨에게 떠넘기고 조용히 자리를 피하려는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별일 아닙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냥 몇 개 여쭙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궁금하다는 게 뭐지? 배지 좀 보여줄 수 있어요?”
“네?”
“경찰이라면서. 배지 있을 거 아니에요. 요새는 하도 사칭하고 다니는 놈들이 많아서.”
“어르신, 요새는 배지가 없고, 그냥 공무원증···.”
더 성가시게 되기 전, 나중혁은 설명을 끊고 슬금슬금 이동하는 아주머니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여기요, 여사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그다음엔 귀찮게 안 하겠습니다. 혹시 그러면 김아리 씨가 다닌다는 헤어숍 연락처라도 알 수 없을까요?”
---*---
“아! 다 왔다.”
<해결>의 남자들은 태운 15인승 밴이 파라다이스 호텔 정문 앞에서 서자, 건장한 남자들이 내린다.
“변호사님, 호텔 근처에서 점심부터 하고 움직일까요? 아니면 그냥 바로 용궁사 쪽으로 가서 둘러보고 식사를 할까요?”
정도가 서지우에게 물었다.
“난 상관없는데.”
“아까 휴게실에서 뭐 먹은 것도 있고 하니까, 용궁사 먼저 보고 식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그럼 집만 풀고 십오 분 뒤에 로비에서 만나는 걸로 하겠습니다. 여기 키 있습니다.”
정도는 서지우에게 그가 묶을 키를 건넸다.
그만 독방이었고, 나머지는 한 방에 두 명씩 배정이 되었다.
“자, 자, 들었지? 일단 용궁사 먼저 보고 식사하는 걸로. 십오 분 뒤에 로비에서 보는 겁니다. 차장님 들으셨죠?”
“네, 들었습니다.”
“그럼 십오 분 뒤에 여기서 뵐게요. 자, 여기들 키 있습니다. 각 방 배정된 막내들 키 받아 가세요.”
완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헤어샵에서 일할 때, MT를 간 적이 있다.
그런 데 가면 큰 숙소에서 밤새 술을 먹고 빈방 아무 데나 가서 자면 되었는데, 여기는 달랐다.
호텔 방이 배정되었다.
“김, 김은 나랑 같은 방이야. 1314호실. 내가 키 가지고 있어.”
정도랑 같은 방을 쓰게 생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뭐야? 킹사이즈 침대 방이네.”
방에 침대가 하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