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이의 진심 (3)
「6년 전, 라스베가스.
그녀는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의 약혼자에게 해명하려는 나를 말렸다.
“로건에게 왜 그렇게 말했어? 말 한마디면 오해를 풀 수도 있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알았다.
로건 폴슨은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태이의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한 그는 일부러 그녀를 나와 함께 보냈고, 몰래 뒤따라온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한 며칠 더 놀다 갈까?”
그녀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 같았고, <프리티 우먼>에 나오는 줄리아 로버트 같았으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 나오는 멕 라이언 같았다.
다만, 나는 그녀에게 그레고리 펙도, 리차드 기어도, 빌리 크리스털도 되어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라스베가스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파트너의 약혼녀를 빼앗은 놈이 되었고, 태이는 파트너를 이용해 출세해보려다가 바람피운 년이 되어 있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모르겠어. 한국으로 가야겠지.”
“왜?”
“어차피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한국의 여러 로펌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그녀는 LA에 있는 다른 로펌들에 지원했다.
그러다 나는 <김앤강>에 입사하게 되어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동안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그녀는 <데이비스 앤 마이어>에 조인하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
여혜린과 달리 그녀에는 편안하게 해주는 기운이 있었다. 같이 있기만 해도 활기차지고 그녀의 응원만으로 모든 게 잘 될 것 같은 느낌.
민태이는 그런 능력이 있는 여자였다.
아버지 일과 여혜린과의 이혼으로 인해 피폐했던 내 인생의 유일한 희망. 같이 일할 때는 마음이 편했고, 대화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그 질문을 했을 때 나는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이 진짜 사귀면 어떻게 될까?”
“그럴까?”
“어차피 아니라고 해도 다들 그렇게 믿잖아.”
“내 말이. 하하하. 이제 다음 주에 내가 한국으로 떠나면 잠잠하겠지.”
“······.”
분명 나와 그녀 사이에는 남녀관계에만 존재하는 그런 케미스트리가 있었다.
나도 알았고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편안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같은 생각일 거로 추측했다.
남녀 사이의 케미스트리만큼 우리 둘 사이에는 우정이라는 것도 분명 존재했기에.
-서지우, 나 이번 주말에 한국에 들어간다. 준비해 둬.
“갑자기? 뭘?”
-파티?
“여기는 LA가 아니야.”
-그래서 못 해주겠다는 거야?
“와. 뭘 하든 하자.”
-오케이. 나 너희 집에서 자도 되는 거지?
“그럼 호텔에서 자려고 했어?”
-아니.
“야, 근데 너 여기 오면 ‘오빠’라고 불러라. 두 살이나 어린 게, 어디서 ‘야,’ ‘야,’ 거려.”
-미쳤냐? 그럼 네가 먼저 선배님이라고 불러. 한국에서는 직장 먼저 들어온 사람들한테 그렇게 부른다며? ‘선배님.’
“야, 됐다, 됐어. 들어오기나 해. 공항에 마주 나가 있을 테니까.”
-네에- 오빠.
내가 그녀랑 처음 잠자리를 갖게 된 것은 그 후로 몇 개월 뒤였다.
당시 탤런트 에이전시에서 근무 중이었던 그녀는 갑자기 휴가를 내고 한국에 찾아왔고, 우리는 라스베가스에서도 넘지 않은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결혼식을 올리고도 그 멋진 호텔 방에서 하지 않은 거를 이런 구린 아파트에서 했네.”
“지금 내가 사는 곳이 구리다는 거야?”
“응.”
“맞아. 구려. 서울 집값이 LA보다 더한 거 같아.”
“······.”
“······.”
“왜 어색해?”
“아니.”
“······.”
“······.”
“우리가 만약 라스베가스에서 둘이 진짜 사랑에 빠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그 사람들이 손가락질했을 때 떳떳하지 못했겠지.”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그게 무슨 질문이야?”
“······.”
“······.”
“혼인무효(annulment) 신청한 거 결과 나왔어.”
“그래?”
“안 된대.”
“뭐? 그러면···.”
“대신 이혼(divorce)으로 신청하래.”
“안 돼.”
“뭐가?”
“그럼 이혼한 게 되잖아. 라스베가스에서 실수로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안 해줘.”
“그래서 안 해준대. 그걸 다 해주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고.”
“하룻밤 장난에 이혼 기록을 남긴다고? 말도 안 돼. 혹시 내가 없어서 그렇게 된 거야? 단독 신청이라서?”
“······.”
“내가 보내준 동의서 냈어?”
“냈어. 근데 기록이 그렇게 중요해?”
“내가 아니라 네 걱정이지. 난 상관없어. 어차피 앞으로 누구랑 결혼할 마음도 없고. 하룻밤 실수에 네 인생에 오점이 생기는 거잖아.”
“오점?”
“다시 해보자. 제대로 된 이혼변호사 쓰고.”
“실수?”
“아직 항소 기한 남은 거지?”
“······.”
“민태이?”
“나 갈래.”
“응?”
“······.”
“어딜?”
“집에.”
“응? 지금? 수요일 출국이라며?”
그녀는 갑작스레 떠났다.
그리고 삼일 뒤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메일을 보내왔다.
혼인무효 결정에 항소했다고.
마치 기한 내에 항소하기 위해서 그렇게 갑자기 떠났다는 것처럼.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물어서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우리 괜찮은 거지?”
-왜? 언제 안 괜찮은 적 있었어? 그렇다고 FWB를 기대하지는 마.
“야!”
-농담이야. 놀래긴.
그렇게 우린 친구로 남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내가 왜 갑자기 연락을 끊은 줄 알아? 이렇게 지내면 내가 육십 살이 되어도 네가 모를 것 같아서. 그러면, 그때 가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서.”
“······.”
“나 사실 혼인무효 신청한 적 없어. 그렇게라도 기록이 남아있으면 혹시라도 나중에 네 마음이 편해졌을 때, 나한테 돌아오지 않을까 했어. 근데 그날 깨달았어. 너는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민태이······.”
“근데 그거 알아? 난 널 친구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서지우는 ‘그게 너와 영원히 인생을 함께 할 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라고 답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상대의 입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가 떠나고 서지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라스베가스에서 보낸 날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 중의 하나였다.
가장 자유로웠었다.
성공을 좇아 가족을 등한시한 아버지. 남편 없이 사는 것이 너무 고되 어린 자식들을 보육원에 맡긴 어머니.
그런 과거를 안고 자신은 결코 그러한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그는 아버지의 등장과 여혜린과의 이혼 후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가 힘겹게 이뤄왔던 모든 걸 잃은 듯한 기분이었고,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던 길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캄캄해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설.
민태이는 서지우의 등불 같은 존재였다.
그녀로 인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그녀로 인해 사는 게 즐거워졌다.
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도 그녀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그녀와는 선을 지켰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교차선이 아니라, 평행선이 되고 싶었다.
그의 착각이었다.
사람의 인생은 직선이 아니다.
그가 옳다고 믿었던 방법이 오히려 그녀를 멀어지게 만든 것일지도.
서지우는 후회했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 만들어지게 내버려 둔 것을.
그리고 미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텔 방을 나간 민태이는 그녀의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다.
---*---
며칠 뒤.
<법무법인 해결>.
“가처분 신청 취하됐고. 오늘 오후에 랑 <영화사 청아>에서 기사를 낼 거라고 했습니다.”
“알았어.”
“여 대표님이 연락 와서 손해배상 청구 안 하냐고 물으시길래, 작가님께서 그럴 마음이 없으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서지우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도 하지 말라고 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차피 손해증명도 어렵고 합의서에 사인한 거라 해봤자 실익 없을 거라고.”
근거 없는 표절 소송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일단락이 났다.
와 <영화사 청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됐다.
제작 발표도 하기 전에 관심을 받아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작품이 표절이라는 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대중은 드라마가 하루빨리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민태이가 사라졌다.
그냥 연락이 끊긴 게 아니라,
그녀가 다니는 로펌에 휴직계를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공식적으로는 일단락이 됐지만, 개인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지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변호사님.”
“왜?”
“올해 야유회는 예정대로 진행하실 거죠?”
“야유회?”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
올해는 유독 정신이 없다.
“가야지.”
“아, 그럼 다들 부산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은데, 부산으로 정할까요?”
“좋을 대로.”
“알겠습니다. 그럼 부산으로 간다고 공지 올리겠습니다.”
“응.”
“바쁘시면 제가 유 과장이랑 얘기해서 호텔이랑 차편들 다 정할게요.”
“그렇게 해.”
개인적으로야 어찌 되었든 회사는 돌아간다.
그게 인생이다.
똑똑똑.
“네.”
윤정도가 보고를 마치고 돌아간 뒤, 최성태 사무장이 들어왔다.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바쁘시면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저번에 김아인 변호사 관련해서 알아보라고 하신 거 알아봤습니다.”
‘아, 맞다. 그런 적이 있었지.’
“네, 뭐 특별한 거라도 발견하셨나요?”
“특별하다고 하면 특별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김아인 변호사가 1년 전쯤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습니다.”
“교통사고를요?”
“네, 모친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뺑소니 사고를 당했는데, 하필이면 위조 번호판을 단 불법 렌터카여서 범인을 못 잡았습니다.”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걸 특별하다고 보고할 사람은 아니었다. 서지우는 최성태 사무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사고가 워낙 심각해서 약 6개월 정도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식물인간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 사고로 모친도 뇌에 이상이 생겨 병원 생활을 시작했고요. 원래는 병원에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여동생이 집으로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 보험금이 나오기는 했지만, 병원비를 감당하기는 턱없이 부족해서 쌍둥이 여동생이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리고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버텨온 것 같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서요.」
서지우는 인터뷰 때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네, 그럼.”
“아, 부장님.”
“네.”
“김아인 변호사 어머님 상태는 어떤지 알아봐 주세요. 정말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인 건지도 좀 알아봐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