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33)

민태이의 진심 (1)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보세구역 안,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아무리 국내법을 모른다고 해도 그 정도로는 법원이 표절 판결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서지우가 앉았다.

그녀는 그가 어떻게 그녀를 찾아 그 안에까지 들어왔는지 놀라웠지만, 묻지는 않는다.

그런 재주가 있는 남자니까.

“그 정도로도 충분히 상대를 괴롭힐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는 됐지.”

6년 전.

라스베가스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태이는 <타일러 앤 로즈>를 나와 한동안은 변호사 일을 하지 못했다.

타이밍도 좋지 않았지만, 약혼자이자 직속 파트너였던 로건 폴슨이 이곳저곳 말을 뿌리고 다녀 좀처럼 괜찮은 어쏘 변호사 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장 돈이 급했던 그녀는 탤런트 에이전시에서 일했고, 프로덕션 컴퍼니에서도 일을 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방황한 후, 현재 근무하는 <데이비스 앤 마이어>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초고속 승진으로 시니어 파트너 타이틀까지 4년 만에 오르게 되었다.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아.”

“그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잖아.”

그녀는 서지우의 확답에 곧장 대꾸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없어.”

“이미 촬영이 시작됐고 연계된 계약만 백 개가 넘어. 무엇보다도 이런 표절 시비 뒤에 촬영을 접는다면, MJ 엔터가 문제가 아니라 작가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할리우드에서는 일 년에도 수십, 수백 개 작품이 중간에 무너져.”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주연 배우의 스캔들 하나만으로 끝나는 게 작품이야.”

“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지우는 민태이에게 다른 의도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작품을 도로 빼앗아 오라는 넷플릭스(Net-flicks)의 지시가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언가 다른 것을 받아오라는 지시가 있었을 거라고.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표절 시비를 가지고 정말 프로젝트를 망치려는 게 그녀의 의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진심이구나.”

그녀는 6년 전 그를 보던 것과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때도 진심이었고, 지금도 진심이야.”

서지우는 깨달았다. 그녀는 프로젝트를 멈추기 전까지 이 싸움을 계속할 거라는 걸.

“어차피 사람들은 그게 네 이야기라는 걸 몰라.”

“내가 알아.”

‘그게 무슨 말이지?’ 서지우는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둘 사이의 개인적인 일을 이렇게 만들지 마.”

“훗, 네가 우리 둘 사이의 개인적인 일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니고?”

“그거라면 개인적으로 사과할게.”

“사과? 사과받고 끝낼 거면 한국에 오지도 않았어.”

그녀는 화를 내는 것도 그렇다고 짜증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협상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프로젝트 접어. 그러면 표절 소송 취하할 테니까.”

“1주일 안에 가처분 명령 취소될 거야.”

“그래도 끝나지 않아.”

“영업방해, 명예훼손. 몇억 원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때마침, 울리는 안내방송.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행 대한항공 KE011편 탑승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일등석과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을 소지한 분들부터 탑승을 도와드릴 예정이오니, 해당 항공권을 소지한 탑승객들은 지금 게이트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정도 협박에 접을 거면 3년 만에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어.”

“민태이.”

“아직 서로 보고 웃을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서지우.”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게이트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똑똑똑.

“이사님, <김앤강> 황재수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잠시 뒤, 능글능글한 미소를 짓는 황재수 변호사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보면 서글서글한 인상인데, 또 어떨 때는 욕심이 득실득실한 중년 남자 같기도 하다.

여혜린은 황재수를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아버지 때문에 같이 일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다.

MJ 미디어의 자문 로펌은 여전히 <김앤강>이었지만, MJ 엔터테인먼트의 자문을 맡기진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안녕하셨어요, 변호사님.”

“그러고 보니 회장님 그렇게 되시고는 처음 뵙는 거 같네요.”

“그런가요?”

“네.”

황재수는 여혜린의 사무실을 한번 둘러본다. 크고 스타일리시하다. 책상 뒤로 보이는 한강뷰 역시 근사하다.

“사무실이 멋집니다.”

“변호사님 사무실 뷰도 만만치 않던데요.”

“그래도 저는 대표님하고 바꾸라고 하면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바꾸겠습니다.”

황재수의 사무실에서는 경복궁 전체가 보였다.

대충 인사치레를 마친 여혜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하는 프로젝트 중에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작 중지 가처분 명령이 떨어졌어요.”

“가처분 명령이요? 아이고, 곤란하시겠네요.”

“네. <법무법인 율지>의 이세문 변호사가 상대방 변호사인데, 혹시 아시나요?”

“이세문 변호사···이세문···모르겠는데요?”

안다.

“양순길 판사님은 아시죠?”

“아, 네, 동창입니다.”

“가처분 명령 내린 판사가 그 사람이에요.”

“아···그래요.”

여전히 시치미를 뚝 내는 황재수.

흥.

여혜린은 콧방귀를 뀌고 말을 이었다.

“재벌가에 태어나서 이 위치에 오르니까 좋은 점이 있어요.”

“······.”

“굳이 말을 돌려 할 필요가 없다는 점. 황재수 변호사님.”

“네, 대표님.”

“MJ 그룹 일 그만하시고 싶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김앤강>의 김성무 변호사님과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MJ 그룹 일을 계속 <김앤강>에서 봐왔죠. 황 변호사님도 그렇게 해서 일을 받아오신 거고.”

지금까지 계속 웃으며 답하던 황재수의 얼굴이 살짝 굳기 시작한다.

“저는 아직도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황 변호사님, 여기는 법원이 아니에요. 제 믿음에 굳이 증거를 제시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

“<데이비스 앤 마이어>의 변호사가 <김앤강>에 먼저 연락한 거 알고 있어요. 그다음에 <율지>로 간 거고. <김앤강>이 의뢰를 받을 수 없었던 건 MJ 그룹 일을 보고 있으니까, 컨플릭트 때문에 그럴 수 없었던 거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황재수가 계속 발뺌을 하자, 여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지금 확실하게 말씀하시면 재고를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확실하게 말하라는 건지 저는 아직도···?”

“황 변호사님께서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에게 개인적 감정이 있어서 사건을 <율지>에 넘겼고, 담당 판사와의 사적인 친분을 이용해 가처분 명령을 내리게 한 거잖아요?”

사실이다.

황재수는 서지우가 못마땅했다.

맨 처음에 MJ 그룹 여정남 일로 망신을 주더니, 그 뒤로 ‘The Dynasty’ 프로젝트도 빼앗아(?) 갔다.

당연히 그가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정황만 있을 뿐.

하지만, 여혜린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재판하는 게 아니었다.

여혜린에게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못하면···.

“저는 진짜···.”

“황 변호사님. MJ 그룹이 <김앤강>에 법률 비용으로 지급하는 금액이 일 년에 얼마나 되죠?”

“···300억 원이 조금 넘습니다.”

“본사 재무팀에 알아보니까 작년에 321억 원이었다고 하던데요.”

“네, 맞습니다.”

“그 전해는 390억 원이었고.”

“···아마 그 정도 될 겁니다.”

“<김앤강> 일 년 수입이 1조 정도 되죠? 작년에 1조1,000억 원이라고 들었는데.”

“···네, 맞습니다.”

“300억이라고 잡으면 대략 3% 정도 되네요? 그 정도는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 건가요?”

“대표님,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진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슨 득이 있다고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개인적인 이득도 없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냥 할아버지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지만, 저랑 오빠는 달라요. 당장 로펌을 바꾸면 지급 지출하는 비용 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왜 <김앤강>을 쓰는 줄 알아요?”

“······.”

“변호사님이 가처분 명령을 받을 때 쓴 인맥이 나중에 우리도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도 <김앤강>을 쓰는 거죠.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사들만 모여있는 로펌에. 반쯤은 보험 드는 기분으로, 그리고 또 반쯤은 삥 뜯기는 기분으로.”

여혜린의 말에 황재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근데 그 좋은 인맥을 나를 상대로 사용한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죠.”

“대표님, 이건 분명히 오해이십니···.”

“내가 재벌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곱게 자란 막내딸 정도로 보이세요? 그러다 운이 좋아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거로?”

“그럴 리가요.”

여혜린은 다음 말을 잇기 전, 잠시간 달아오른 황재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다시 한번 이딴 짓거리를 했다가는 제가 김성무 변호사님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거예요. 밑에 변호사 관리를 잘못하셔서 연 3% 매출 날리셨다고.”

“······.”

“듣기로 김성무 변호사님 아직도 정정하시고 일 못 따오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파트너급들을 극혐하신다고 들었는데.”

당장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게졌지만, 황재수는 딱히 다른 말 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가야만 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으셨을 테니까, 이제 가서 하셔야 할 일 하세요.”

갑과 을의 관계.

갑은 심증만으로도 충분히 을을 박살 낼 수 있다.

기업과 로펌의 관계를 갑과 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업 수장과 로펌 소속 변호사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라 볼 수 있다.

---*---

<법무법인 해결>, 김아리 변호사 사무실.

징징- 징징-

“작가님, 괜찮으시죠?”

-괜찮아. 덕분이 기분이 많이 좋아졌어. 고마워.

이중기 작가는 아리가 알려준 팬 사이트 덕분에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괴짜이면서 동시 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노인이다.

-자네 말이 맞아. 내가 여기서 죽거나 절필을 선언하면 그건 표절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마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싸울 거야. 암- 싸워야지. 조지 왕코인지, 조지 왕커인지 하는 놈하고.

“잘 생각하셨어요. 근데, 작가님.”

-왜?

“싸우는 거는 우리한테 맡기고 할아버니는 글을 쓰시면 돼요.”

아리의 따뜻한 말이 이중기에는 큰 위안이 된다.

-알았어. 근데 그놈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나한테 전화 한 통도 없고.

서지우를 말하는 거였다. 일이 터지고 나서 전화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없어서 괜히 심통 한번 부려본다.

“제가 찾아갔잖아요. 저는 부족하세요?”

-부족하긴! 우리 김 변이 최고지. 그러지 말고 이제 네가 내 변호사 해라.

“이미 작가님 변호사인데요.”

-아니, 서지우 그놈 말고 네가 내 일을 맡으라고.

“그런 소리 마세요. 안 그래도 서 변호사님 이 일 때문에 다른 일정 다 미루고 미국에 가셨는데.”

-미국에 갔다고?

“네.”

-뭐하러?

“조지 왕코인지, 조지 왕커인지 하는 놈 만나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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