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우의 두 번째 결혼 이야기
아직은 정오의 태양이 뜨거운 가을날.
여혜린은 신라호텔 스위트룸으로 서지우를 초대했다.
“무슨 일이야?”
“긴장하지 마. 싸우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 근데, 나한테만 이런 말투를 쓰는 거야? 아니면 클라이언트들한테도 다 똑같이 하는 거야?”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다며 불렀다. 식당이나 로비가 아닌 스위트룸으로 오라 하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했는데, 다이닝룸에 이미 브런치가 준비되어 있다.
“와서 주문하고 그러면 정신없을 것 같아서, 그냥 내가 알아서 시켰어. 상관없지?”
상관없다. 어차피 밥을 먹으러 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며?”
“잘되고 있다고.”
“고작 그거 이야기하려고 이걸 다 준비한 거야?”
“우리 훌륭하신 변호사님 대접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축하해. 한 방 먹이고 ‘The Dynasty’ 프로젝트 따낸 거.”
여혜린은 테이블 위에 있던 샴페인 병을 들어 자신과 서지우의 잔에 따랐다.
“웬일이지. 여혜린답지 않게 서론이 기네.”
“그렇지? 역시 나답지 않지?”
“밑에 식당에서도 해도 될 이야기를 굳이 스위트룸까지 잡아서, 그것도 서빙 봐주시는 사람 없이 직접. 궁금한 것이 뭐야?”
“호호호. 딱 걸렸네.”
여혜린은 방금 따른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네 이야기라며?”
주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서지우는 그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아차렸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내 두 번째 결혼 이야기.’
“이 한국 엔터 업계에 관심이 많더라고 며칠 전에 만났어. 그쪽 인하우스 카운슬하고 재무 이사를.”
“굳이 어디서 들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도 상관없으니까? 이제는 아무런 상관없는 전 부인이라 이건가, 내가?”
“질투심이 나서 부른 거는 아니잖아?”
답을 하기 전 여혜린은 서지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닌데. 질투심이 나서 부른 건데.”
농담이 섞인 눈빛이다. 그 말은 진심이 섞여 있다는 뜻도 된다.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아니었어?”
“우리 둘 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 나이잖아.”
“나는 그래도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할래.”
“하룻밤에 한 사람이 아니고?”
“내 뒷조사라도 하는 중이야?”
“이미 다 했는데.”
“그럼 뭐가 더 궁금한 거지?”
이제 농담이 그녀의 눈빛에서 사라진다.
“괜찮겠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
“나 이 작품 꼭 만들고 싶어. 아니 만들어서 성공시킬 거야.”
“그런데?”
“괜찮겠냐고? 너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가 이렇게 세상에 까발려지는 거.”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 자신의 두 번째 결혼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대본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른다.
몇 년 전, 오늘 같은 가을날, 대낮부터 마신 술에 만취하여 이중기 작가에게 사연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왜 그랬을까?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랬을까?
아무튼 속에 있던 말들을 그에게 쏟아냈다.
그 후로 며칠 뒤 어르신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다고 했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러라고 했다. 진짜 쓸 거로 생각하지 않았고,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실명을 쓸 것도 아니고, 어차피 소설일 텐데···.
그 후로 몇 년 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 나왔다.
“아직도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데. 뭐가 괜찮냐는 거지?”
“역시 너는 모르는구나.”
여혜린은 서지우를 위해 따랐던 샴페인을 가져가 마신다.
“서지우, 네 이야기에 너만 살아있는 거 아니야.”
“······.”
“나는 싫을 것 같아. 너랑 나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되는 거.”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다.
어차피 세상은 나를 모르니까.
그런데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나의 이야기에는 나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
압구정, 회사 근처.
정도, 아리, 이헌, 창현은 점심을 먹으러 새로 생긴 수제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수프림 버거 두 개, 새우버거 하나, 모짜치즈 버거 하나, 감자튀김 사이드 두 개, 코오슬로 두 개, 그리고 음료는 제로 콜라 두 개, 스프라이트 두 개. 이렇게 주세요. 아, 수프림 버거 하나에는 베이컨 추가해주시고요, 모짜치즈 버거는 빵 빼고 주세요.”
비서팀 창현이 주문 마치고 돌았다. 그리고 10분쯤 지났을까, 직원이 주문한 음식들을 들고 그들이 테이블로 찾아왔다.
“와, 맛있겠다.”
보들보들한 브리오슈 빵 위에 겹겹 쌓인 고기와 토마토, 양상추, 양파, 베이컨 위로 노오란 체더치즈가 흘러내린다.
아름답다.
마요네즈 소스에 한 번 버무려진 통통한 새우들이 빵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위태롭다.
“잘 먹겠습니다.”
다들 자기가 시킨 버거를 공략하기 바쁜 와중, 그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바라만 보고 있던 정도는 손으로 어떻게 들어 올리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칼과 포크를 집어 들었다.
나름 깔끔하게 먹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내용물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나는 말이지. 솔직히 짜장면, 짬뽕보다 이게 더 아닌 것 같아. 소개팅에서 마음에 안 드는 여자를 만나면 수제버거집을 와야 해.”
“왜요?”
“이거 봐. 이걸 어떻게 깔끔 떨면서 먹겠어.”
“변호사님, 이렇게 싸서 먹으면 돼요.”
“입이 작아서 힘들어.”
“근데 여기 변호사님 오자고 하셨잖아요.”
그렇다. 정도가 오자고 그랬다.
“나는 이상하게 새로 생긴 데는 꼭 가보고 싶더라. 막 정복욕이 생겨. 저기는 내가 가서 꼭 먹어봐야겠다는 하는.”
“저도요.”
“그렇지? 그렇다니까. 내가 이 세상 여자를 다 만나볼 수는 없지만, 음식 정도는 다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되는 거잖아? 김 변, 김 변은 그런 거 없어?”
언제나처럼 정도와 창현은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면 식사를 하고, 아리와 이헌은 음식에 집중하고 있다.
정도의 질문에 아리는 입안 가득 베어 문 새우버거를 다 씹어 삼키고 대답했다.
“저는 세계여행이요.”
“세계여행?”
“네, 세계 여러 나라를 가보고 싶어요. 조금씩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그럼 ‘걸어서 세계 속으로’ PD가 되지 그랬어?”
“안 그래도, 저 진짜 그러고 싶었는데.”
“뭐야? 농담이었어.”
“저는 진담.”
“세계여행이 진짜 꿈이었구나. 김 변이 여자였으면 나랑은 진짜 안 맞았겠네.”
“쿨럭- 쿨럭-”
가끔 저런 말이 나오면 깜짝깜짝 놀란다.
평소에 자신이 진짜 남자라고 최면을 걸고 생활하는 그녀였지만,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괜찮아? 왜 그래, 갑자기?”
“아, 새우가 목에 걸려서.”
“가만 보면 은근 뭐가 목에 잘 걸려. 꼭꼭 씹어 먹어. 여기 버거가 맛있기는 하네.”
정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포크와 나이트를 들어 햄버거를 썬다.
“변호사님.”
“왜?”
“우리 올가을 야유회는 어디로 가나요?”
<법무법인 해결>은 1년에 2회 야유회를 갔다. 주로 봄과 가을 이렇게 가는데, 일이 많으면 여름과 가을로 미뤄질 때도 있었다.
“아직 안 정해졌어. 어디로 가고 싶은데?”
“제주도요.”
“싫어.”
“왜요? 가을 야유회는 1박2일이니까 제주도 괜찮지 않나요?”
그리고 상반기 가는 야유회에는 소풍처럼 당일치기였고, 하반기에 가는 야유회는 1박 2일이었다.
“나 비행기 타기 싫어한다.”
“아, 맞다. 변호사님 비행기 공포증 있었지.”
“공포증이 아니라 기피증.”
“그럼 부산은 어떤가요?”
“어차피 남자들끼리 가는데 그냥 가까운 데 가자. 그래봤자, 술 먹으러 가는 거잖아.”
“에이- 그래도 1박 2일인데 바다 가서 먹으면 좋잖아요. 에브리 바리 세이 해운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네가 가서 대표님께 말씀드려.”
“아···.”
“왜?”
“서 변호사님이 아직은 좀···.”
“무서워?”
“네.”
“크크큭.”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상냥한 사람은 아니니까.
“유 과장, 서 변호사님이 이번 가을 야유회에 대해 아무 말 없으셨지?”
“네, 아직 없었습니다.”
칼과 포크를 이용해 빵 없는 모짜버거(?)를 먹고 있던 유이헌이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들어가서 내가 한번 말씀드려볼게. 부산?”
“네네!”
“근데 유 과장.”
“네.”
“그건 무슨 맛으로 먹어?”
---*---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점심 식사 후 돌아온 정도와 아리는 다시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커피 타임을 가졌다.
“정말 가끔 보면 몸매 관리에 진심이라니까.”
“유 과장님이요?”
“응. 아, 나도 몸 좀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네?”
“뭐야, 지금 그 반응은?”
“다시요?”
“허허- 김 변이 내 벗은 몸을 못 봐서 그런데. 진짜 으응! 응! 온몸 구석구석 숨겨져 있는 잔근육이 어마어마해. 으응!”
“아···네.”
“아, 진짜 여기서 보여줄 수도 없고. 좋아. 언제 한번 사우나 같이 가자고.”
아,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벌어져서도 안 되고.
“김 변은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야유회.”
“아···.”
가고 싶다. 좋은 곳으로.
“해외 가고 싶어요. 제주도도 좋고.”
“에이, 다들 왜 그래. 안 된다고.”
“그냥요. 가고 싶다고요.”
“웬만하면 육로로 갈 수 있는 곳으로 골라줘.”
“저도 부산 좋아요. 진짜 옛날에 가고 안 가봤는데.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요새 TV 보니까 사람들 여수도 많이 가는 것 같던데. 여수도 가고 싶고. 아, 강릉도 가보고 싶어요! 거기 카페거리인가? 거기도 가보고 싶고. 아, 통영! 통영이 진짜 좋다고 하던데. 나폴리 갔다고 하던데요. 변호사님 가보셨어요, 통영?”
여행이라는 말에 본 얼굴이 나와 버렸다. 설레하는 여자의 말투와 표정.
정도는 그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가끔 보면 말이지. 김 변 참 신기해. 어떨 때 보면 진짜 상남자 같다가도, 이럴 때는 뭐랄까 섬세하다고 해야 할까? 가끔 소녀 같을 때가 있어.”
다행히 눈치 없는 정도는 ‘막내’ 파트너로 들어온 그가 여자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제가요?”
“김 변이 그런 말 듣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진짜, 가끔 그렇다니까. 여성적인 면이 있어. 칭찬이야.”
여성적인 면이 있는 게 아니고, 여성인데요.
“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 그냥 순간 그런 느낌이 왔을 뿐이야.”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튼 김 변도 부산 좋다는 거지?”
“당연히···.”
아리는 ‘너무 좋죠’라고 하려다가, 일부러
“존나 좋죠.”
라고 했다.
“아, 또 이럴 때는 상남자 포스, 응? 크큭. 오케이. 그럼 내가 서 변호사님한테 이번 야유회는 부산으로 말씀드려볼게.”
역시 눈치 더럽게 없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정도는 당장 서지우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사무실 앞에 이미 눈에 익은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누군가가 서 있다.
“둘째 형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