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있는 그녀
조선 팰리스 33F.
아일라 피셔를 닮은 붉은 머리의 스코틀랜드 여자는 영국보험회사의 언더라이터(underwriter: 보험계약 인수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였다.
1년간 홍콩 지사에 파견 나와 있는 그녀는 동아시아 쪽 클라이언트 회사들을 돌고 있었던 중에 우연히 도쿄 파크 하얏트 호텔 바에서 서지우를 처음 만났고,
어젯밤 논현동 <바 어나니머스>에서 그를 또 마주쳤다.
“사실을 말을 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
“왜?”
“무섭잖아.”
“우연이 아니었던 거야?”
라운드 원이 끝난 뒤, 그녀는 옆에 누워있는 예의 바른 한국 남자에게 돌아누우며 말을 걸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달빛에 더 붉게 빛난다.
“내가 지금 이름도 모르는 널 찾아 한국까지 따라왔냐고 묻고 싶은 거야? 네가 매력적으로 생기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어나니머스>를 찾아온 게 우연이 아니냐고 물은 거였어.”
“바?”
한국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맨날 호텔 라운지에서 한잔하고 올라가는 게 답답해서, 홍콩 지사에 있는 동료한테 물었지. 괜찮은 데 있냐고?”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닌데.”
“걔도 그렇게 말했어.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라고. 좀 찾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두어 잔 정도 하도 돌아가려고 했는데, 네가 나타났어.”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네가 물었잖아.”
“한국까지 따라온 건 넌데.”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거야.”
침대 위, 농담을 주고받는 남녀.
둘은 아직 서로에게 이름도 묻지 않았다.
“너 누굴 닮았어.”
“누구?”
“헤어진 내 전 남자친구.”
“동양인?”
“아니. 근데 묘하게 닮았어.”
스코틀랜드 여자는 자신의 검지를 남자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히말라야산맥같이 굴곡이 진 그의 얼굴을 따라 턱 끝까지 내려간다.
달빛 아래, 그녀의 눈빛이 그녀의 머리칼 색만큼이나 영롱하다.
“설마 죽었다거나 그런 거는 아니지?”
“뭐? 하하. 아니.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지. 나 말고 다른 여자랑···.”
“그럼 나는 그 남자 대타인 건가?”
“너는 아니야?”
“나는 너 같은 여자랑 사귄 적은 없는데.”
“잔 적은 있고?”
부정할 수 없다.
“귀여운 붉은 머리 영국 여인의 구애를 거부할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많지 않지.”
“하하. 그런 느끼한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영화?”
“영화가 남자들을 많이 버려놨군.”
“싫으면 과묵해질 수도 있어.”
“아니, 계속해줘.”
스코틀랜드 여자는 두 번째 라운드를 치를 준비가 됐다.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가자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그의 코를 간지럽힌다.
그가 코를 찡긋거리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머리카락으로 더 장난을 친다.
“보면 볼수록 닮았어.”
“그렇게 그리운 사람이면 왜 나랑 여기 있는 거지?”
그늘진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눈만 아련하게 빛을 낸다.
“그런 거 알아? 멀리 있으면 죽도록 보고 싶지만, 같이 있으면 불행한 사이?”
“몰라. 그렇게 복잡한 남자가 아니라서.”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마법 같은 순간에 그를 닮은 남자를 만나 순간 감정이 뭉클하다. 그렇다고 그와의 멋진 사랑을 주저리 떠벌릴 생각은 없다.
“미안. 하지만 나는 그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녀는 일부러 ‘널 보며’라는 단어를 뺐다.
나름 예의라면 예의였다.
서지우는 상관없었다.
그 역시 그 순간 문득 다른 사람이 생각났기에.
‘민태이···.’
왜 그랬을까?
외적으로는 닮은 꼴이 하나 없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름도 모르는 스코틀랜드 여자가 보여주는 저 아련한 눈빛과 비슷한 눈빛을 그날 라스베가스를 떠나는 민태이의 눈에서도 본 것 같다.
---*---
토요일,
아리 집 근처 커피숍.
“죄송해요,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아···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중혁 형사는 그녀의 확 달라진 분위기에 순간 말을 더듬었다.
근 1년 전, 그를 찾아왔을 때 보였던 어둡고 절박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플래티넘 금발, 붉은 입술, 눈화장까지.
그녀가 다가와 인사하기 전까지는 그녀인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셨네요.”
“네. 그때는 상황이 절박했어요. 평소 제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 그렇죠.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네.”
오빠에 관해 묻기 전 나중혁은 간단하게 근황부터 물었다. 뭔가 의심될만한 것을 찾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형사로서 습관이었다.
“직장을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디···?”
“헤어샵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어요.”
“잘됐네요. 김아인 씨도 압구정에 있는 로펌에 출근하시는 것 같던데.”
“네.”
당연히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기에, 똑같은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뭐랄까······.
그렇다고 말투가 차가운 것은 아니지만 자꾸 대화를 끊으려는 느낌이다.
“김아인 씨는 완전히 나아지신 것 같더라고요.”
“네.”
“그런데 사건 당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리성 기억상실인가 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네.”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도 없는 건가요?”
“의사 선생님께 그렇게 들었어요.”
“아···. 김아인 씨에게 말씀드렸지만, 피해자의 정확한 진술 없이는 솔직히 처벌을 장담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네.”
“오빠분한테 들으셨나요?”
“네.”
“그래서 사실 만나자고 한 겁니다. 아리 씨께서 조금 도움을 주시면 오빠분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요. 그놈 진짜 나쁜 놈이거든요.”
솔직히 나중혁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오빠에게 기억을 ‘주입하더라도’ 사고에 관해 무언가 진술하게 하는 것이 기소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거였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힌트만 할 뿐이다.
“형사님, 우리 가족 이제 그 사건 잃어버리고 싶어요.”
그러나, 1년 전 그렇게 간절했던 쌍둥이 여동생에서 나온 대답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아, 그 심정 이해합니다.”
“오빠하고도 몇 번 이야기해봤는데, 기억이 전혀 안 난데요. 누가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그냥 그 부분이 까맣대요.”
“그렇군요.”
“우리도 그 사람 잡고 싶은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고에 대해 억지로 기억해가며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런 심정도 헤아리지 못하고 자꾸 이렇게 귀찮게 해드려서.”
“아닙니다. 기억해주시고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근데,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형사님.”
“네,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도움이 못 돼서.”
“아닙니다. 그래도 범죄자는 잡는 게 저희 임무라서요. 혹시라도 김아인 씨의 기억이 돌아오거나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저한테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아마도 그런 일이 생기면 저희 오빠가 먼저 형사님에게 연락할 것 같기는 하지만요.”
“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서로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커피숍을 나왔다.
---*---
며칠 뒤,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중혁아, 그 사건 어떻게 됐어? 검찰에 송치했어?”
“무슨 사건이요?”
“왜 그 49번 국도에서 난 뺑소니 사건? 주말에 거기 보호자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만났어요.”
“어떻게 됐어? 뭐 소득 있었어.”
“아니요.”
“그럼 서류 마무리해서 검사실에 보내. 안 그래도 요새 미제 사건 너무 쌓인다고 총장님이 친히 지랄하셨대. 칠 수 있으면 하나라도 쳐내자.”
“네, 그러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이지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나중혁으로 하여금 해당 사건을 계속 붙들고 싶게 만들었다.
주말에 만난 김아리는 너무나 달라 보였다.
물론 그런 사고를 당한 직후의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범인을 잡아달라고 그렇게 간절했던 사람이 이제는 사건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럴 수 있다.
돈이 필요했기에. 합의금이 간절해서 범인 검거가 간절했는데, 이제는 금전적으로 풍족해졌으니 과거의 안 좋은 일에 계속 매달려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도.
모든 것이 이해가 가면서도 나중혁의 수사 감각 세포는 여전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좋아 보여서 다행인데, 왜 자꾸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거지···?’
*
「2주 전···.
“그럼 그 압구정의 로펌은 언제부터 출근하신 건가요?”
“5월이요.”
“그러면 의식이 돌아온 거는 언제였나요?”
“연초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니요. 너무 멀쩡하셔서요.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제가 사고 직후 중환자실에 계실 때, 잠깐 뵈었었거든요. 그때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정말 기적이네요. 다행입니다. 동생분이 진짜 걱정을 많이 했는데.”」
*
띠리링- 띠리링-
-보건복지부입니다.
“안녕하세요.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나중혁 경장입니다. 교통사고 피해자 장애 수당 지급 관련해서 뭐 좀 여쭤보려고요.”
---*---
아리의 집.
나중혁 형사와 만나고 집에 돌아온 아리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오랜만에 한 화장이라 어색하다.
그렇다고 타인이 자신을 어색하게 볼 이유는 하나 없다.
아리는 플래티넘 금색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웠다.
2주 전, 남장으로 하고 오빠인 척 만났을 때, 나중혁 형사는 기억이 전혀 없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 왜 그런 일이···’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오늘 만났을 때는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남장했을 때와 차이가 확 날 수 있도록 평소보다 짙게 화장했고 노랗다 못해 하얀 가발까지 쓰고 나갔다.
못 알아본 것 같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래도 범죄자는 잡는 게 저희 임무라서요. 혹시라도 김아인 씨의 기억이 돌아오거나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저한테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나중혁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는 좋은 형사다.
사고 직후, 다른 형사들은 형식적으로 ‘네, 네’만 할 뿐 능동적으로 해준 것이 별로 없었는데, 그는 달랐다.
자기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은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장애 수당에 관해 알려준 것도 그였다.
비록 십몇만 원밖에 안 되는 돈이었지만 가뭄에 단비 같은 수입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걸린다.
왠지 그가 여기서 끝낼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화장을 지운 아리는 다시 머리를 뒤로 빗어넘기고 양복을 입었다.
혹시라도 나중혁이 조사를 멈추지 않는다면, 아리 역시 좀 더 꼼꼼하게 흔적을 지워야 했다.
아니, 흔적을 만들어야 했다.
띠리링- 띠리링-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은평중앙병원이죠.”
-네, 그런데요.
“예전에 거기서 치료받았던 환자인데요. 담당 의사님을 좀 만나 뵙고 싶어서요.”
김아인이 진짜 깨어나서 움직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