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우의 한 방 (1)
싱가포르,
사무실.
“로건, 어제 오기로 했던 <언리얼> 대표랑 그쪽 이사 오늘 온다는 말 들었지?”
일주일 전, 서지우와 통화를 끝낸 로건 폴슨은 그가 요구한 어덴덤 계약서를 <언리얼> 측에 보냈다.
계약 내용은 단순했다.
기존 투자계약서 하에 지급했던 1차, 2차 투자분할금을 남은 분할금 지급 시, 시장가격에 <언리얼>의 주식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었다.
“들었어.”
“그쪽 변호사는 안 온다고 하대.”
“끝난 게임이니까, 실력 없는 변호사한테 비용 주기도 아까운가 보지.”
사실 그의 심정도 반반이었다. 한편으로 서지우의 낯짝 앞에서 어덴덤에 사인을 박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날의 수치심이 상기될 것 같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덴덤은 별문제 없는 거지? 몇 가지 수정해서 왔던데.”
로건이 작성한 문구의 몇 가지를 수정했다.
하나는 주식 전환가를 어덴덤 계약 체결 시점이 아닌 3일 뒤에 있을 분할금 지급 시점으로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분할금 지급을 거부하거나 지연될 경우, 을 압류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한국법 적용 조항이었다.
“괜찮아. 지도 뭘 하는 척을 해야 해서 이것저것 건드려놨는데 별 실익이 없는 것들이야.”
“분할금 지급을 거부하거나 지연될 경우, 저쪽에서 압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것도? 우리 자금이 한국에 있는 거는 알고 있지?”
“알아. 근데, 리스크 제로야. 문구는 되게 위협적으로 쓰여있는데, 법을 잘 모르는 클라이언트에게 그냥 쇼하는 거지. 우리가 분할금을 지급 안 할 이유도 없거니와 설사 백만 분의 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압류 못 해.”
“진짜? 문구는 그렇게 읽히던데.”
재무 이사 해롤드의 질문에 로건은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그 자식, 남의 여자나 건드리는 놈이라도 실력은 괜찮은 줄 알았더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우리 한국 로펌 파트너랑 확인해봤는데, 한국법상 가압류가 아닌 계약상 본압류 권리를 인정받으려면 까다롭다고 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지금 <언리얼> 변호사가 추가해온 조항이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는 거야?”
“흥. 원 계약서상에 합의한 대로 영국법으로 놔뒀으면 효력이 있었겠지. 근데, 한국법으로 바꾸는 바람에 의미가 없어진 거야.”
“진짜?”
“국제 거래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실수지.”
“그래서 한국법 적용 조항을 네가 그대로 놔둔 거구나? 안 그래도 숀이 그 부분 너랑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 했는데.”
숀은 대표로 현재 미국에 있었다.
“제 손발을 자기가 묶는 꼴이지. 솔직히 <언리얼> 대표에게 말해주고 싶다니까.”
“그러면 안 되지!”
“농담이야. 단지, 그러고 싶은 심정이라는 거지.”
진심 그러고 싶다. 그래서 서지우에게 망신을 주고 싶다. 하지만, 로건 폴슨은 그러지 않는다. 그는 감정적이지만 동시에 계산적인 인물이었으니까.
“근데, 왜? 어덴덤 체결 시점 시장가로 하지 않고 분할금 지급 시점으로 바꿨을까?”
“그것도 그냥 쇼야. 괜히 뭔가 하는 척하는 거지.”
“설마 3일 안에 <언리얼>의 주가가 급등한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건 네 전문 아니었어? 그럴 일이 있겠어?”
“아니. 비트코인도 아니고 비상장 주식이 그렇게 오를 일이 없지. 하늘에서 대박 계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
「일주일 전,
한국, <언리얼 VFX팀> 사무실.
“변호사님, 그렇게 해도 진짜 괜찮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정말 <퓨처리스틱>에서 그 프로젝트를 우리한테 맡길까요?”
“제가 부탁한 거는 준비되셨나요?”
“네, 여기.”
<언리얼>의 장 이사는 나흘간 밤새워 준비한 포트폴리오와 제안서를 서지우에게 건넸다.
“최대한 단가를 낮췄습니다. 정말이지 이윤을 남길 생각으로 넣은 오퍼가 아니라, 무조건 계약을 따내겠다는 심정으로 나온 숫자입니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이 가격에 저희 퀄리티를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먼저 만나서 설득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언리얼>로부터 자료를 받은 서지우는 할리우드 제작사 <퓨처리스틱>의 론 실버가 묶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코즈모미디어>의 임환 대표가 극비에 주선한 만남이었다.
*
광화문, 포시즌 호텔.
“이렇게 또 만나네요, 서 변호사님.”
“다시 뵙게 돼서 반갑네요, 미스터 실버.”
“그냥, 론이라고 불러요. 미스터라는 말 너무 늙은이 같잖아.”
몇 달 전 다른 일로 미국에 갔을 때, 임환 대표의 소개로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론, 내가 보내준 자료들은 보았나요?”
“임 대표가 보여줘서 봤어요. 사실 <언리얼 VFX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어요. 1년 전쯤에 일본 토세이 애니메이션하고 함께 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거기 크레이티브 팀장이 얘기해줬어요. 앞으로 눈여겨 볼만한 회사라고.”
“그렇다면 제가 보내준 자료가 과장된 게 아니라는 것도 눈치채셨겠네요?”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정말 제시한 그 가격에 맞출 수 있다는 확신까지는 들지 않았어요. 그렇잖아요? 퀄리티는 지급 업계 탑이라는 <모션 로직>이나 급인데 프라이스는 거기 반도 안 되는 게···. 이 업계에 오래 있다 보니까, 너무 좋은 제안은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게 되죠.”
“믿으셔도 됩니다.”
서지우는 <언리얼 VFX팀> 장 이사로부터 받아온 포트폴리오와 제안서 담긴 USB 메모리를 론 실버에게 내밀었다.
숀은 메모리에 담긴 내용을 그 자리에서 확인한다.
포트폴리오 폴더에는 <언리얼 VFX팀>이 만들어 본 ‘The Dynasty’의 컨셉아트와 영상이 들어 있었고, 제안서에는 제시한 비용에 대한 상세한 명세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냥 슬쩍 한번 훑고 넘기려고 했던 론 실버는 컨셉아트와 영상에 매료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안서 역시,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한눈에 봐도 가격에 맞추기 위해 숫자들을 막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걸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만들었다고?”
서지우는 론의 질문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The Dynasty’는 조선왕조를 모티브로 만들어지는 공상과학물입니다. 이 작품에서 탄탄한 서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시각적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걸 당신도 잘 알 겁니다. 한국적인 색채, 건물 양식, 문화가 이 작품의 매력이 될 것이고 이 작품으로 다른 SF 드라마와 차별화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되겠죠. 그걸 과연 다른 나라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디렉팅을 잘하면 되겠지만, 한국 회사만큼 커뮤니케이션이 수월하게 잘 될 수 있을까요?”
“······.”
“결국 퀄리티와 프라이스의 문제라고 했을 때, <언리얼 VFX팀>만큼 <코즈모미디어>의 적격인 파트너는 찾기 힘들 겁니다.”
서지우의 설득이 끝나자, 론은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임환을 곁눈질했다. <코즈모미디어> 임환 대표는 <언리얼 VFX팀>과 계약하는데 대찬성이었고, 서지우가 오기 전 둘은 이미 충분히 논의한 상황이었다.
“서지우 변호사, 대단한 사람이네요. 솔직히 임환 대표가 이번 프로젝트 한국 법률 자문으로 당신을 추천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오늘 보니 왜 그렇게 당신을 신임하는지 알겠네요. 솔직히 서 변호사가 오기 전에 임 대표랑 얘기를 나눴어요. 임 대표는 찬성하는 의견이길래 제가 말했죠, 만약 그들이 제안한 비용의 명세를 세부적으로 보여줄 수만 있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그런데, 이건 기대했던 것 훨씬 이상입니다.”
상세명세도 만족스러웠지만, 론 실버는 서지우가 가지고 온 컨셉아트와 영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정말 매력적인 아이디어라 <코즈모미디어>에 투자하기로 계약했지만,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걸 실제로 보는 건 또 다른 레벨이었다.
<언리얼>의 컨셉아트와 영상은 환상적이었다.
“그러면 계약하시겠습니까?”
“좋아요. 계약서를 보내주세요. 그동안 미국의 있는 우리 팀한테 이 제안서를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하도록 하겠어요.”
“계약서 여기 있습니다.”
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지우는 준비해간 계약서 초안을 내밀었다.
“당신, 날 계속 놀라게 하는군요.”
론이 사용한 단어는 ‘impress’ (깊은 인상을 주다, 감동을 주다)였다.
이틀 뒤, <퓨처리스틱> 론 실버의 동의하에, 78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 ‘The Dynasty’에 개발 관련하여, <코즈모미디어>와 <언리얼 VFX팀>은 파트너십 계약을 맺었다.」
---*---
다음 날,
서울, <법무법인 해결>.
서지우의 휴대폰.
징징- 징징-
「언리얼 VFX팀, 장현철 이사」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싱가포르에 간 <언리얼>의 장 이사님으로부터 기다리던 전화가 들어왔다.
“네, 장 이사님.”
-변호사님, 방금 계약서 체결했습니다. 계약서 사진 찍은 거 보내드렸는데 받으셨나요?
“확인했습니다. 원본은 챙기셨나요?”
-네, 챙겼습니다. 이제 기사 터트리면 되는 건가요?
“네, 계획한 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국 가서 뵙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과 어덴덤 체결한 지 한 시간 만에 국내 모든 파이낸셜 매체와 엔터테인먼트 매체에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국내 특수효과 전문 회사 <언리얼 VFX팀> 1조 원 규모 프로젝트 ‘더 왕조’에 탑승한다.」
「<언리얼 VFX팀>, ‘모션 로직’과 ‘ILM’ 재치고 <코스모미디어>와 파트너십 체결.」
「실력으로 승부한 <언리얼 VFX팀> 할리우드 간다. <퓨처리스틱 픽처스>와의 계약 소식에 미국 대형 제작사들 눈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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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뒤.
싱가포르, 사무실.
“뭐라고? <언리얼> 주가가 그사이 네 배나 뛰었다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아니, 하늘에서 대박 계약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렇다고 했지. 연 매출 천만 달러도 안 되는 회사가 육천만 달러짜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으니 하늘에서 대박 계약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지.”
“그게 뭔 개똥 같은 소리야?”
“그리고 오늘 아침 기사 못 봤어? ‘The Dynasty’ 프로젝트로 관련해서 <퓨처리스틱>이 워너와 계약했다는 거? 론 실버가 7년 동안 1조 프로젝트로 만들 거라고 했으니, 네 배밖에 안 뛴 게 다행이라고.”
“지금 남의 회사 얘기해? 네가 전문가잖아. 어떻게 이런 일도 예상 못 해?”
“극비에 진행된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솔직히 이런 거는 법적으로 계약 전에 <언리얼>에서 전부 밝혔어야 하는 거 아니야?”
재무 이사 해롤드의 말이 옳았다.
이미 그전에 재무 조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비상장 회사의 정보는 미리 사실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럴 수 없었던 건,
“그걸 어떻게 사실 확인해. 애초에 우리가 계약을 깨려고 했던 건데.”
그들의 행위가 합법적인 권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