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이의 남편이 될 뻔했던 남자 (2)
「6년 전, 라스베가스의 호텔 방.
“You fucking ungrateful son of bitch!”
(이 씨발 배신자 새끼!)
와일드한 밤이었다.
재미 삼아 천 불로 시작한 도박이 몇 시간 만에 몇만 불이 되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어쩌면 나는 지금도 LA에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박으로 시작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나는 그날 남아있는 내 행운의 끝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라스베가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도박을 하던 나와 태이는 어쩌다 보니 중국갱단이 운영하는 불법도박장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내가 가진 돈 전부와 태이의 청혼 반지까지 잃어버린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다.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정신을 차렸다면 호텔로 돌아와 하룻밤 운 따위에 인생을 바꾸려 했던 우매함을 뒤돌아보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게 맞다.
나와 태이는 그러지 않았다.
가짜 유가증권으로 중국갱단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
허위 담보로 갱단으로부터 판돈을 대출받은 뒤 다시 포커판에 앉았고 잃었던 돈과 반지를 되찾았다.
문제는 경기가 끝나고 갱단은 우리가 가짜 유가증권으로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을 눈치챘고, 영화 같은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총 쏜 알들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갔고 겨드랑이를 비껴갔다.
얼마나 술과 승리감, 스릴감에 도취해 있었는지, 그녀는 그 와중에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운을 테스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했고.
어딘지 모르는 채플에 들어가 결혼식도 올렸다.
생전 처음 보는 인디언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사막 한가운데서 코요테와 춤을 추기도 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었던 밤.
그렇게 와일드한 밤이 지나고 눈을 떴을 때,
나는 태이의 방에 있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방을 나가려는 순간, 그녀의 약혼자 로건 폴슨이 그곳에 나타났다.
“Logan, wait. I know how this looks but I can explain.”
(로건, 잠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겠는데, 그런 게 아니야.)
퍽!
피할 수 있었지만 그대로 서 있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
현재, 싱가포르,
오전 11시.
로건 폴슨의 사무실.
띠리링- 띠리링-
전화벨이 울렸을 때, 로건은 <해결>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서지우의 프로필을 읽고 있었다. 사실 웹사이트는 아까부터 그의 컴퓨터에 띄워져 있었고, 그는 6년 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미스터 폴슨, 한국 로펌 해결의 지우 서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연결해.”
로건의 지시를 받은 비서는 전화를 연결했다.
-헬로.
“이야.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로건은 잊지 않고 있었다. 6년 전 일을. 서지우를.
-<타일러 앤 로즈>를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헤지펀드 회사에 들어간 줄은 몰랐네.
“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어?”
6년 전에도 그는 이런 타입이었다.
쉽게 발끈하는 성격.
남의 말은 듣지 않는 성격.
변호사로서 마찬가지다. 늘 공격만 한다.
-그래서 전화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변호사라는 걸 의뢰인한테서 들었을 텐데, 그런데도 네가 전화한다고 하길래, 나는 이제 와서 네가 용서라도 빌려는 건가 의심했어. 그리고 만약 진짜 그런다면 내가 용서를 해줘야 하나 조금 전까지 고민하고 있었지. 그런데, 의미 없었네. 역시 아니지. 너 같이 남의 약혼녀나 뺏는 뻔뻔한 새끼가 변할 리 없지.”
-다했나?
“뭐? 하- 새끼, 내가 너 때문에 한국과 관련된 건 다 싫어해.”
-그러는 너는 6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거짓말이나 해대는 애네.
한국이 그렇게나 싫었다면 애초에 <언리얼 VFX팀> 사의 지분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 결정권이 없었다고 한들 굳이 이런 식의 전력을 만들지도 않았을 거다.
“네가 아주 <언리얼 VFX팀>을 우리한테 주려고 작정했구나? 이렇게 나오면 어느 정도 봐주려고 했던 부분도 어림없어.”
-애초에 봐주려고 했던 부분도 없었잖아?
“그럼 왜 전화한 건데.”
-경고하려고.
“경고?”
-그딴 식으로 체리 픽킹하고 소송으로 협박하면 형사 고소할 거야.
“어디서? 싱가포르에서? 한국에서? 어디서든 해볼 테면 해봐. 우리 이거 전문이야. 그깟 형법 하나 못 피할 것 같아? 소송 시작하기도 전에 <오리온 펀드> 재산 전부 조각나 있을걸? 그중 괜찮은 거는 당연히 다 우리한테 와 있을 거고.”
-이 한국에 투자한 자본에 가처분 걸어놓고 시작할 거야. 몇 년이 걸려도 회수할 거니까, 맘대로 해 봐.
“누구 맘대로? 설사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언리얼>이 몇 년씩이나 버틸 수 있을까? 왜? 그사이에 너네 로펌에서 다른 펀딩이라도 구해주게? 그게 가능할까? 뭘 담보로? 아무것도 없는데? 신주 발행에서 하겠다고? 설사 운 좋게 그런 투자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계약서상 <오리온> 동의 없이 신주 발행 못 하게 되어 있어.”
사실이다.
정작 계약을 깨려고 하는 건 인데 <언리얼>이 먼저 깨면 그걸 이용해서 잡아먹을 생각이다.
먼저 위협해놓고 반격하면 그걸 빌미로 쳐들어오겠다는 전략.
강국이 약국을 침략할 때 쓰는 방식이다.
이 정도면 계약 해지 의사를 명확히 했다고 볼 수도 있기에, <오리온 펀드>의 자산을 동결하는 방법 써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하수나 쓰는 수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은 <오리온 펀드>를 파산시킨 뒤, 입맛대로 조각들을 가져갈 게 분명했다. 업계에서 욕을 먹겠지만, 애초에 지킬 네임벨류 같은 건 없는 헤지펀드니까.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계약서에서 ‘신주 발행 제한’ 조항을 삭제하면 된다. 거기다 중재 조항까지 삭제하면 한국에서 소송이 가능하게 싱가포르 중재보다는 대응이 쉬워진다. 홈그라운드 어드밴티지가 생기니까.
계약 자체를 삭제하기에는 리스크가 크다.
이미 받은 돈이 있는 상황에서 계약 자체를 지워버리면 받은 돈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세상이 제멋대로 기억을 바꾸는 것이기에, 늘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만약 투자계약 없이 단순히 돈을 빌려준 거로 바뀌어버린다면, 더 복잡해지거나 오히려 더 불리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결국 ‘신주 발행 제안’ 조항과 ‘싱가포르 중재’ 조항을 지우는 게 가장 쉽고 간편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결국 상대의 공격을 겨우 막아내는 수준이다.
신주를 발행할 수 있게 된다고 한들 새로운 투자자를 모색해야 하는 장애물이 남아있고, 한국에서 소송한다 한들 5년짜리 싸움이 2~3년짜리 싸움으로 줄어드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6년 전 예의상 한 대 맞아주었지만, 서지우는 두 번 맞아줄 생각 없다.
-알겠어. 제안을 고려하라고 <언리얼> 측을 설득해볼 테니까, 투자계약 내용을 수정하는 어덴덤 초안 보내.
“하하하하. 하하하. 뭐야?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야? 나는 좀 더 파이팅을 기대했는데. 역시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괜히 건드려보고 아니면 바로 꼬리 내리는 겁쟁이 새끼야. 그래, 그래도 그건 인정한다. 변호사 실력은 썩 괜찮았지. 뭐 그렇다고 훌륭한 정도는 아니고.”
서지우는 그가 쏟아내는 말들을 다 들어준다.
-다했어?
“왜? 그때처럼 오해라고 변명이라도 늘어놓게? 남자라면 적어도 자기가 한 짓에 대해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깡 정도는 좀 가져. 한국 남자들은 원래 그래? 겁먹어서 핑계나 대는 주제에 괜히 신사인 척 흉내나 내고. 어이, 서지우, 네가 질문해놓고 왜 말이 없어? 쫄았어? 걱정 마. 전화라서 때릴 수는 없으니까. 하하하”
-다했냐고?
“다했다. 왜? 이 새끼야. 뭘 어쩔 건데.”
로건 폴슨이 그날 아침 라스베가스에 찾아온 이유는 그가 나와 태이의 사이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우리 둘을 출장에 보낸 것도 일종의 그의 테스트였고, 서프라이즈인 척 나타났지만, 사실은 지극히 계획된 출현이었다.
그의 의심이 완전히 근거 없는 의처증은 아니었다.
분명 나와 태이의 사이에는 밀어내려 해도 자꾸만 붙고 싶어 하는 남녀 간의 자성이 존재했었으니까.
그러나, 그날 밤 우리는 선을 넘지 않았다.
적어도 교활한 로건 폴슨이 멋대로 의심한 육체적인 관계는 없었다. (물론 그가 돌아간 이후 그 선을 넘었지만)
-거짓말해서 미안해.
“흥, 늦었어.”
-네 말이 맞았어. 나 태이랑 그날 잤어. 6년이 지났는데도 네가 극복하지 못한 거 같아서.
“이 퍽킹 코리안 개새끼가···.”
-계약서 보내.
“너 이 새끼 내 눈앞에 다시 띄면···.”
딸깍.
---*---
일부러 도발했다.
이 <오리온 펀드>를 파산시키거나 <언리얼 VFX팀>과의 계약을 그냥 그대로 해지하게 만들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로건 폴슨은 감정적이지만 동시에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언리얼>이 그냥 버리기에 아까운 회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자기가 짠 전력대로 지분을 받아내고 싶어 할 것이었다.
오히려 내 도발이 자신의 계약을 틀려는 꼼수라고 여길 것이고, 그래서 더 악착같이 <언리얼>을 먹으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 후에 비아냥거리겠지.
자기가 옳았다고 생각하면서.
만약 그때도 겁 없이 손을 든다면 바닥에 쓰러질 사람은 그가 될 것이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안 그래도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건 폴슨과 통화를 마친 서지우는 <코즈모미디어> 임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혹시 제가 보내드린 서류 검토해 보셨나요?”
-네, 잘 봤습니다. 너무 괜찮은 프로포절이던데요. 마침 <퓨처리스틱> 론 실버 사장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 론 사장에게도 보여줬는데 괜찮은 거죠?
“네. 오히려 잘됐네요. 괜찮으시다면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서 변호사님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드려야지요. 뭔가요?
이 <언리얼>을 먹으려 드는 걸 막을 수 없다면,
“론 실버 사장하고 미팅을 주선해주십시오. 삼십 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먹게 두지 않을 서지우다.
의 아가리를 찢어놓을 심산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주선해보겠습니다.
*
「6년 전, 라스베가스의 호텔 방.
차근차근 설명해보려 했지만, 흥분한 로건 폴슨은 이미 귀를 닫은 상태였다.
그래도 나는 그를 진정시켜 보려 했다.
하지만, 태이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되찾은 청혼 반지를 그에게 돌려주며 파혼을 통보했다.
“왜 그렇게 말했어?”
“사실대로 말한다고 믿을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서지우, 어젯밤 그가 준 청혼 반지를 포커판에서 잃고 나서야 깨달았어. 내가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청혼 반지를 찾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