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인연
약속된 토요일,
‘완전무장’을 한 아리는 수원중부경찰서 2층에 있는 교통범죄수사팀을 찾았다.
“나중혁 형사님?”
“아, 오셨어요?”
두 번째 만남. 자신을 김아인이라고 소개하는 남자의 얼굴과 동생 김아리의 얼굴이 갖는 유사함에 여전히 깜짝 놀라지만, 쌍둥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나중혁은 그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힘드시겠지만, 이 영상을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나중혁은 당시 사고 담긴 CCTV 영상과 가해자로 추측되는 용의자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본 영상이지만, 아리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유심히 시청한 뒤 용의자라는 사람의 사진도 한참 살펴봤다.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잘 생각해보시죠.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시나요? 가해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으시면, 가해자의 행동이나 손짓 같은 것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당시 상황이라고 괜찮습니다. CCTV 영상에 사고 당시 장면은 찍혀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에 이르는 영상은 없거든요. 물론 가해자의 차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만약 사고 전에 가해자와 김아인 씨 사이에 어떤 시비가 있었다면, 보복운전으로 기소할 수 있습니다.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은 처벌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보복운전이었다면 최대 20년 징역감입니다.”
“죄송합니다. 의식이 돌아온 이후에 몇 번이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날 일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나중혁은 갑갑했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걸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피해자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건 기소에 치명적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으신가요? 그냥 캄캄한 건가요?”
“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사고로 후유증으로 인한 해리성 기억상실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리는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갔다.
“아···그럼 영원히 기억나지 않는 건가요?”
“그건 의사 선생님께서도 확답을 주시지 못하시더군요.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영원히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고. 의학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라서 그런가?
답이 또박또박하고 명확하다.
하지만, 기계 같은 그의 어조가 그를 더 답답하게 한다.
“김아인 씨,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당시 CCTV 영상에 찍힌 번호판을 용의자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정황적인 증거가 발견되었을 뿐, 사고 관련해서는 용의자가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라, 목격자나 피해자의 진술 없이 기소까지는 어떻게 해도 법원 판결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기억해 내보라는 걸 에둘러 말해본다.
“그리고 이건 비공식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용의자가 재산이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변호사님이시니까,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아시겠지요.”
민·형사 합의를 할 수 있다는 의미.
나중혁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사고 직후의 힘든 사정을 아리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병원에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걸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요.”
아리는 자신을 보는 나중혁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오빠가 식물인간이 된 정확한 이유는 의사도 알지 못했다. 단지 사고 당시 쇼크 혹은 사고의 후유증이라고만 할 뿐.
그렇다고 당하지도 않은 것을 본 것처럼 말할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혹시 기억나는 게 생기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겠습니다.”
한눈에 봐도 고가일 것 같은 구두와 정장을 입고 경찰서를 찾아온 피해자.
포마드를 발라 가지런히 정돈한 머리칼 그리고 금테 안경.
드라마 속 로펌 변호사의 이미지 그대로 나타난 김아인은 몇 달 전까지 식물인간으로 의식 없이 누워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상한 점은 김아인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는 거다.
기억이 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행동에서 내비치는 감정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 남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나중혁 형사가 머릿속의 고민을 입으로 내뱉기가 무섭게 사무실 안으로 팀장이 들어왔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어, 팀장님. 팀장님이 이 시간에 여길 웬일이세요?”
“아우- 마누라가 하도 긁어대서 급한 일 생겼다고 하고 나왔어. 나 그냥 한숨 자고 갈 테니까, 일 있어도 말 시키지 마. 우리 법을 수호하는 공무원으로서 노동법을 준수하자고.”
“네. 하하. 알겠습니다.”
“아, 근데 방금 나간 사람은 누구야? 아주 쫙 빼입고 왔던데. 변호사?”
“그렇죠? 한눈에 봐도 변호사 같죠?”
“변호사 아니면 전형적인 사기꾼. 누군데?”
“49번 국도 교통사고 피해자예요. 김아인 씨.”
“그 사람 식물인간 되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몇 개월 전에 깨어났대요.”
“아-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그런데 그런 거 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이던데.”
“그렇죠?”
“응. 뭐 아무튼 잘됐네. 피해자 깨어났으니 진술서 받으면 사건이 조금 수월해지겠네. 안 그러면 검사실에서 또 추가 조사니, 뭐니, 닦달했을 텐데.”
“쓰읍-.”
“왜? 왜 ‘쓰읍-’이야?”
“기억이 안 난대요.”
“뭐가 기억이 안 나?”
“사고 때 기억이 안 난대요.”
“전혀?”
“네.”
“어허- 참 이건 뭐 깨어나도 깨어난 게 아니네. 기억을 못 하면. 용의자 사진 보여줘도 모르겠대?”
“네, 전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대요.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라나 뭐라나.”
“에이- 순간 쉽게 끝나나 했더니만···. 아우,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우리 마누라 피해서 나 쉬러 나온 거야. 일 얘기 하기 싫어. 나중에 해.”
사실 나중혁도 지금 뭔가 결론을 내린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걸리는 게 있다.
“알겠슴다. 그럼 쉬십시오.”
---*---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점심 식사 후 일로 복귀하기 전, 커피 타임을 갖고 있는 정도와 아리.
정도는 <코즈모미디어>에서 제작하는 공상과학물 ‘The Dynasty’ 프로젝트에 대해 열띠게 설명하는 중이다.
“사실 정말 아이디어밖에 없었던, 가지고 있던 건 15장짜리 시놉시스밖에 없었을 때, 서 변호사님이 미국 Scifi 전문 채널의 헤드 프로듀서를 임 대표님한테 소개해 드린 거거든.”
“아아-”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라 정말 포텐셜이 보여서 도와준 프로젝트이긴 한데, 그래도 좀 아쉬워. 말씀은 안 하셔도 서 변호사님도 아쉬울 거야. 잘만 만들면 진짜 대한민국의 첫 번째 초대형 SF 작품이 될 거니까.”
조선왕조를 모티브로 한 우주 배경의 건국 이야기.
상상만 해도 그 규모가 얼마나 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이디어는 진짜 좋은 거 같아요.”
“진짜 좋아. 지금까지는 극비리에 진행했지만, 이제 조만간 아마 발표할걸. 시놉은 우리 서버에도 있으니까 심심하면 찾아봐.”
“아, 진짜요?”
“응, 폴더 이름이 ‘<코즈모미디어> 언타이틀’”
“꼭 봐야겠는데요.”
“아, 맞다. 김 변, ‘용의 국물’ 좋아한다고 했지?”
“네?”
“아, 쏘리, 크크큭. 순간 헷갈렸어, 옛날에 본 에로 영화 제목이랑. 김 변도 알지? ‘용의 국물’? 유명했었는데.”
‘유명했다고?’ 그렇다면···.
“아, 당연히 알죠. 그거 안 본 사람이 있나요.”
“아는구나? 크크큭, 그때는 그런 게 왜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
“아, 네···. 그렇죠. 혈기 왕성한 시기다 보니까.”
“그렇지. 좋았을 때지. ‘용의 국물’, ‘공공의 젖’, ‘곧세우마 금순아’, ‘발기해서 생긴 일’, ‘넣는 내 운명’, ‘목표는 똥고다’···.”
풉!
점점 더 낯뜨거워지는 제목에 아리는 입에 있던 커피를 뿜었다.
“콜록, 콜록!”
“아이- 뭐야, 김 변.”
“죄송해요. 갑자기 사레가 들려서···. 콜록, 콜록!”
“또 뭐가 있었더라, 진짜 재미있는 거 많았었는데···. 아, ‘해리포터와 아주···.’”
“변호사님!”
아리는 주제를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깜짝이야. 왜?”
“‘용의 눈물’이요. ‘용의 눈물’ 이야기하시려던 거 아니셨어요?”
“아, 맞다! ‘용의 눈물.’ 그러니까, ‘The Dynasty’의 첫 번째 시리즈 가제가 ‘용의 눈물’이래. The Tear of Dragon. 조선 건국 이야기부터 시작한다는 거야. 어때? 설레지?”
“제가요? 왜요?”
“엥? 김 변 최애 드라마가 ‘용의 눈물’이라며? 리메이크되는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그랬다. 다만 그때도 주제를 ‘커피프린스’에서 돌리기 위해 말했던 것뿐이다.
“아, 그랬죠. 기대돼요.”
“그러니까 말이야. 솔직히 사극이 내 취향은 아닌데, 이건 진짜 기대되더라고. 참, 선배님은 감이 좋아. 물론 실력도 좋지만. 남자가 봐도 진짜 멋져. 안 그래, 김 변?”
정도의 칭찬에 아리는 문득 예전에 이중기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멋진 놈인데. 마음은 주지 마. 여자한테는 아주 나쁜 놈이니까.」
“윤 변호사님.”
“왜?”
“대표님의 두 번째 결혼하신 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어? 알고 있었어?”
“세 번 결혼하신 거요?”
“응.”
“네, 할아버···아니, 이중기 작가님한테 들었어요. 세 번 결혼하셨다고.”
“아, 그랬구나. 그 사이에 작가님하고 진짜 많이 친해졌네.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다 하시고. 그런데 둘째 형수님은 왜?”
“그게···.”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모델이 된 주인공이라서.
아리는 두 주인공의 그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모티브가 서 변호사님 두 번째 결혼 이야기라고 들어서···.”
“와- 작가님이 진짜 다 이야기해주셨네.”
“변호사님도 아세요?”
“아냐고? 나는 선배님하고 완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야. 당연히 알지.”
“그럼 알려주세요. 두 분이 그날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아이- 이런 말을 입사한 지 6개월도 안 된 막내한테 해줄 수 없는데···.”
“말해주세요-.”
그러지 않아도 말해줄 참이다. 입이 싸다기보다는 그만큼 그를 이미 식구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아마 선배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다이내믹했던 주말이었을 거야.”
“그럼 작가님 작품에 나온 일들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에요?”
“뭐 과장된 면도 있지만, 대부분은 진짜로 일어났지.”
아리는 순간 너무 궁금해졌다.
“그럼 그 이후에 어떻게 됐어요?”
“그날 이후에 어떻게 됐냐 하면은···.”
똑똑똑.
“윤 변호사님, 대표님이 부르세요.”
“대표님이? 어, 알았어. 김 변, 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걸로.”
정도는 말을 하다 말고 그렇게 나가버렸다.
---*---
같은 시각, 인천공항.
공항 나온 재무 이사 해롤드 스미스와 치프 인하우스 카운슬 로건 폴슨 그리고 주니어 인하우스 카운슬 제임스 런달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검정 벤츠에 올라탔다.
“호텔에 들렀다 갈 거야?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는데.”
“아니, 바로 가지. 어차피 기다리고 있을 거 아니야?”
“그렇겠지.”
“그럼 바로 가자고. 제임스, <언리얼>로부터 지분 양도 없이는 추가 투자는 없을 거라는 메일에 답변 왔어?”
“아직이요.”
“하긴 변호사랑 이야기하느라 정신없겠지. 그럴 때, 정신없을 때, 휘몰아치는 게 언제나 효과적이야. 바로 가자고.”
그들이 탄 검정 벤츠는 <언리얼 VFX팀>의 회사가 있는 삼성역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