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라는 게 죽을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6년 전, 라스베가스의 한 불법도박장.
“태이, 너 미쳤어? 그거 로건이 준 청혼 반지잖아.”
그 당시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겉은 멀쩡해 보였어도 갑자기 나타난 병 든 아버지와 여혜린과의 이혼 등 꿈꿔왔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조건 이길 수 있는 패라며?”
“그래도 그렇지. 그걸 걸 수는 없어.”
“네가 이기면 딴 돈의 반은 내 거다.”
“태이.”
“이 결혼이 성사될 운명이라면 내가 뭔 짓을 해도 되겠지.”
내가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던 LA 로펌 <타일러 앤 로즈>의 4년 차 어쏘 변호사, Tei Min.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콘퍼런스 때문에 함께 출장 오게 된 우리는 꽤 중요한 딜(deal)을 마치고, 흥분한 상태였다.
물론 그게 그날 우리가 한 미친 짓의 핑계가 될 수는 없지만.
“오우- 쉣!”
5분 뒤, 나는 그녀가 같은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로부터 받은 십오만 불짜리 청혼 반지를 백만 불이 걸린 포커판에서 잃었다.
“이제, 어쩌지?”
눈앞이 캄캄했다.
순간 상대에게 달려들어 그가 들고 있던 카드의 모양을 지워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긴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있었고, 모든 것을 잃었다는 걸 인지했을 땐 딜러가 이미 카드를 회수해간 이후였다.
“태이, 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되찾아야지.”
당장 3주 뒤에 열린 결혼식.
그녀도 방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신기하리만큼 차분했다.
물론 눈에서는 미친 광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어떻게?”
“너 통장에 있는 돈이 얼마야?”」
*
춘천,
이중기가 머물고 있는 암자.
“작가님, 저 왔어요.”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대본 받으러 왔어요. 다 쓰셨다면서요.”
“금요일이나 돼서 올 줄 알았더니···. 근데 왜 빈손이야.”
아리는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마지막 회차 대본을 받으러 춘천에 내려왔다.
뜻밖의 손님이 반가운 이중기였지만, 그녀의 손에 술과 안줏거리가 들려있지 않자 기다리던 간식을 먹지 못한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바로 올라가 봐야 해요. 대신 다음에 올 때 꼭 사 올게요.”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안 돼, 그럼 이 대본 못 줘. 다음에 사 왔을 때 줄 거야. 아님, 지금 가서 사 오든가.”
“아이, 투정 부리시지 말고요. 다음에는 꼭! 사 올게요.”
“요놈 요거 점점 서지우 그놈을 닮아 간단 말이야. 처음에는 싹싹하게 잘하더니 이제는 대본만 쏙 받아 가고. 너도 다음에는 네 밑에 놈 보낼 거야? 그러기만 해봐, 아주.”
“걱정하지 마세요. 제 밑에 아무도 없어요. 제가 막내예요.”
“모르지 또 한 몇 년 뒤에는 밑으로 새끼가 하나 더 들어올지.”
이중기의 이런저런 투정을 받아주며 대본을 받아낸 아리는 곧바로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단번에 읽어내려갔다.
처음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극의 엔딩이 궁금한 그녀였다.
이중기가 그녀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큰 이유였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MJ 엔터 쪽에서 작가님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원래 12부작이었던 기획을 16부작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8부, 8부 나눠서 두 시즌으로 만드는 것을 고려 중이래요.”
“지랄들 하네.”
“왜요?”
“나는 그런 짓 안 해. 이야기 무슨 고무줄이야 지들이 늘리겠다 줄이겠다 결정을 왜 해? 내가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
“에이- 또 왜 그러세요. 할아버니,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한 번에 끝내기 아까워서. 계속 보고 싶어서. 그만큼 할아버니 대본이 재미있다는 뜻이라고요.”
아리의 칭찬에 더는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중기는 제작사나 투자사에 이끌려 작품을 변경하는 짓은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런 말도 못 들어봤어?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 원래 장인은 재미있다고 해줄 때 끝내는 거야.”
“진짜 장인은 관객이 지루해할 때까지 계속 해주 거 아닐까요? 어차피 엔터테인먼트라는 게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면, 할아버니?”
장난스럽게 받아친 말인데 묘한 울림이 있다.
아리의 말을 잠시 생각하던 그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고개를 흔들며 주제를 바꿨다.
“할아버니는 또 무슨 말이야?”
“할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조합. 할아버니. 귀엽지 않아요? 토끼 같기도 하고?”
“요새 애들은 언어파괴가 심하다고 하더니, 아주 별 해괴망측한 말을 다 만들어내네.”
“나, 요새 애들 아닌데요. 서른인데.”
“이 늙은이한테 비하면 애지.”
“그래도 말이 예쁘지 않아요?”
“예쁘기는···하네. 귀여워?”
“네.”
참 아이 같은 노인네. 그게 이중기의 매력이다.
“그런데요, 할아버니. 그 사람 다음은 어떻게 돼요?”
“무슨 다음?”
“이다음이요.”
이중기가 건네준 마지막 회 대본을 다 읽은 아리. 그녀는 대본을 가리키며 물었다.
“다음이 어디 있어. 그게 마지막 회차라니까.”
“서 변호사님 이야기라면서요.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만, 실제는 다음에 어떻게 되냐고요.”
아리의 질문에 뭔가 감지한 중기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이혼했잖아.”
“네에?!”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그놈 세 번 이혼했다고.”
“그렇게 말해주시기는 했는데···.”
아쉬운 듯하면서도 안도하는 듯한 표정의 아리. 복잡미묘한 심경.
“하긴 또 모르지. 인연이라는 게 죽을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허허허.”
갑자기 해탈이라도 한 도사처럼 이중기는 하늘 어딘가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
<법무법인 해결>, 서지우의 사무실.
윤정도가 서지우에게 보고를 하고 있다.
“<코즈모미디어> 임 대표님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The Dynasty’ 제작 관련해서 <김앤강>으로 가기로 했다고 죄송하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네, 아무래도 변호사님한테 죄송스러워서 직접 전화 못 드리고 저한테 연락을 주신 거 같아요. 하긴 미안하시겠죠. 솔직히 할리우드 쪽하고 제작할 수 있게 변호사님이 첫 단추를 끼워주셨는데.”
‘The Dynasty (가제)’
<코즈모미디어>가 개발한 아이디어로 조선왕조 이야기를 SF 장르로 만드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코즈모미디어> 임환 대표와는 이동주 대표의 소개로 만난 뒤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1년 전 개발 초기 당시 아이디어 수준이었던 ‘The Dynasty’ 프로젝트를 서지우가 미국의 SciFi 채널 프로듀서에게 소개해주었고 그게 초석이 되어 결국 최근 미국 <퓨처리스틱 픽쳐스>와 개발 계약을 맺게 된 것이었다.
“임 대표님은 저희를 계속 지지했는데, <퓨처리스틱>의 론 실버 사장이 <김앤강>으로 틀었답니다.”
첫 번째 시리즈 순제작비만 780억 원짜리 프로젝트였고, 그게 터져주기만 한다면 향후 7년 동안 조 단위 대형 프로젝트로 키울 메가 기획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지우나 <법무법인 해결>에 대해 잘 모르는 <퓨처리스틱 픽처스>의 입장에서는 프로젝트 법률 자문으로 이름이 알려진 대형 로펌을 선호했다.
“<김앤강> 누구?”
“황재수 변호사요. 최근에 대형들도 엔터테인먼트 팀을 만드는 추세라. 어찌 됐건 황재수 변호사가 MJ 미디어 자문을 맡고 있어서 <김앤강>에서는 기업팀이었던 황재수 변호사팀이 엔터도 맞는 거 같더라고요.”
정도의 보고를 듣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서지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사실 정도는 많이 아쉬웠다.
비록 아이디어 단계 때 SciFi 채널 프로듀서를 연결해준 이후로 <해결>이 법률적으로 크게 관여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서지우가 처음부터 지원을 많이 해준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의 포텐셜을 진작 알아보고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일하는 방식을 알려주었으면, 서지우가 <타일러 앤 로즈>에서 일할 때 알았던 인연을 소개해준 것이었다.
그 후 프로젝트는 여러 제작사를 거처 <퓨처리스틱 픽처스>의 론 실버 사장의 눈에 들었고, 정식 개발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도 저는 좀 아쉽네요. 여태까지야 투자자 구하는 거라 미국에서 일들이 벌어졌다면 이제부터는 한국에서 진행될 건데···. 개인적으로 이거 잘만 만들면 진짜 세계적으로 흥행할 것 같은데 말이죠. 쩝.”
서지우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움직일 마음은 없다. 손에 쥔 것도 없이 가서 달라고 하는 건, 떼쓰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니까.
그건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다.
“알았어. 그게 다야?”
“아, 아니요. 하나 더 있습니다. <언리얼 VFX팀> 장 이사님이 전화하셨는데, 싱가포르 오리온 펀드가 넘어간다는 소문이 있다던데요?”
“어디로?”
“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들었대?”
“오리온 펀드 직원한테 비공식적으로 들었다고 합니다. 아직 체결된 거는 아니지만 조만간 뭐가 벌어져도 벌어질 것 같다고.”
“인수야, 아니면 자산양도야?”
“저도 물었는데 그것까지는 못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직원도 모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 정도 정보면 회사 치프급들만 알고 진행할 테니까요.”
어느 업계든 마찬가지지만, 회사 인수나 합병은 민감한 사안이다.
기존의 계약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리온 펀드>와 100억짜리 투자 딜(deal)을 체결한 <언리얼 VFX팀> 처지에서는 자신들의 계약이 어떻게 될 제가 가장 궁금했다.
“인수돼도 계약은 살아남으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 양도가 되는 거면 연락이 올 거니까, 연락 달라고 하고. 이면 펀드 규모가 훨씬 크니까,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이때까지만 해도 서지우는 측의 누가 이 딜(deal)을 담당하고 있는지 몰랐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해서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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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오리온 펀드> 헤드쿼터.
“생각보다 재무 상황이 별로 안 좋은데.”
지난 몇 주간, <오리온 펀드>의 지난 10년간 재무제표와 현 계약 체결 상황을 검토한 의 재무 담당 이사가 말하자, 옆에 있던 치프 인하우스 카운슬(사내 변호사) 로건 폴슨이 법률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 추려낼 건 추려내고 취할 것만 취해야겠네.”
“가능하겠어?”
“못할 것도 없지. 이게 계약서들인가?”
“응. 이쪽이 알짜, 저쪽은 버릴 것들.”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 무더기들. 재무 이사가 세 개 중에 두 개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럼 이건?”
“그건 모호한 것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알짜배기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별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로건 폴슨은 ‘모호한 계약’ 무더기 맨 위에 놓인 계약서를 집어 든다.
“언리얼 VFX 팀 투자계약서···. 코리아···.”
‘코리아’라는 단어에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