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33)

수원중부경찰서 나중혁 형사

“내가 쓴 계약서야. MJ라도 이길 수 없어.”

언제나처럼 차분한 서지우의 목소리.

그가 말하면 거짓도 진실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지금 블러핑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여혜린도 알고 있었다.

“비길 순 있지.”

“지기 싫다고 이러는 거야 지금?”

“너라도 똑같이 했을걸?”

“아니.”

“하-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여혜린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언제나 여유로운, 아니 그렇지 않아도 그런 척을 해야만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갔다는 건 감정이 많이 고조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여혜린. 착각하지 마. 지금 우리는 같은 쪽에 서 있는 거야. 어르신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이 작품을 영상화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이런 식으로 무모하게 나오면 더 큰 손해를 보는 건 MJ야.”

그녀도 안다. 근데 칼을 뽑은 이상 그대로 넣을 순 없다.

“중국 시장을 놓치는 게 가장 큰 손해야. 그러니까 네가 가서 이중기 작가님을 설득해.”

그건 옵션이 아니다. 성역과 같은 곳이다.

“말했잖아. 불가능하다고.”

“불가능인 거야,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잖아.”

“아, 진짜! 별로 중요한 장면도 아니잖아! 그냥 장면에 나오는 중국인들을 필리핀이나 베트남으로 바꿔도 되는 거잖아.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일할 거면 그냥 소설을 쓰지, 그래? 드라마라고, 수백억 원이 들어가는 드라마! 장면 몇 개 고치는 걸 못 하겠다고? 지금 무슨 퓰리처상 기대하고 쓰시는 거야? 노벨상이라도 노리는 거냐고!”

여혜린이 소리쳤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자기의 결정을 남들이 이해해주지 않자 화를 낸다.

그녀의 관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패러다임 속에서 넷플릭스(Net-flicks), 디즈니(DIZNI), 애플(Aeple) 같은 대형 공룡들로부터 나름 자기 구역을 지켜내야 하는 부담감.

넷플릭스, 디즈니, 애플 역시 어떻게 하면 중국 시장으로 진출해볼까 항시 궁리 중일 것이다.

OTT 플랫폼의 성공적 런칭을 위해 중국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대표라면 그는 멍청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여혜린의 행동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한국인이 빌런으로 나온다고 안 보는 거는 아니야.”

“중국은 사정이 달라. 네가 더 잘 알잖아. 검열이 있다고.”

“어차피 검열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중국 당국의 검열 무서워서 작품을 훼손하면 어차피 졸작밖에 안 나와.”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검열의 시대에 나왔어.”

“지금 노벨상을 노리고 이 작품 만들려는 거야?”

“말장난하지 마.”

“말장난하는 거 아니야. ‘티빅스’의 가장 메인 시장이 어디야?”

당연히 한국이다.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한국 시장을 잡으라는 말이다.

“악당들을 중국인에서 다른 나라 사람으로 바꾼다고 한국 시청들은 크게 상관 안 해. 하지만 중국은 달라, 아예 상영을 못 하게 한다고.”

“과연 그럴까?”

“뭐?”

“그렇게 하나둘씩 눈치 보다가 김치가 파오차이가 되고 한복이 한푸가 되는 거야.”

“그거랑 지금 이거랑 같아? 한국 것을 중국 것으로 바꿔 달라는 게 아니잖아. 극 중 악당을 바꿔 달라는 것뿐이잖아.”

“나는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권력에 눈치를 보고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니까.

서지우의 의도를 눈치챈 여혜린은 그를 노려봤다.

“넌 언제나 네가 옳지?”

“···.”

“그렇다고 명분만 그럴싸한 네 말에 이 회사의 운명을 걸 수는 없어.”

서지우도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대표의 신념인지, 개인의 고집인지 가늠해보는 중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좋을 대로. 하지만, 경고했어. 내가 쓴 계약서라고.”

MJ가 아니라 넷플릭스, 디즈니, 애플이 와도 이길 수 없다고.

“서지우.”

경고를 남기고 뒤 돌아 나가는 그의 이름을 여혜린이 불렀다. 좀 전까지 주고받았던 날 선 말들과 달리, 어딘가 모르게 애절함이 묻어있다.

“부탁이야. 한 번만. 네가 작가님께 한 번만 말씀드려 줘.”

---*---

은평구, 아리의 아파트.

“이모님, 감사해요.”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

“네.”

“오늘은 오빠가 그래도 이런저런 반응을 보였어. 집에 오빠가 좋아하는 소설책 같은 거 없어? 좋아했던 거 읽어주면 더 자극이 될 것 같아서.”

‘정말 괜찮은 분이 오셨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으신 분 같기는 한데, 살아있는 것만도 못한 오빠에게 나 보다도 지극 정성이다.’

죄책감과 고마움이 동시에 든다. 아리는 씁쓸한 웃음이 났다.

“제 방 책장에 있는 것들을 가져다 읽어주시면 될 거예요. 애초에 오빠 방에 있었던 것들이니까.”

“그래도 될까?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아침에 몇 권만 빼주고 가.”

“진짜 괜찮은데. 그런데요, 이모님. 안 그러셔도 돼요.”

“뭘?”

“오빠한테 책 안 읽어주셔도 돼요.”

“아니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맨날 핸드폰만 보고 있어서, 나도 재미있고. 그리고 내가 찾아본 건데, 오빠 같은 상태는 신체적 자극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자극도 주고 그러면 좋대. 그러니까, 동생도 오빠한테 가끔 말도 걸고 그래.”

“······네.”

“그럼, 쉬어. 나 갈게.”

방금 들은 말을 잠시 생각하는 사이, 이모님은 어느새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향하고 있다.

아리는 그런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얼른 방에서 선물이 담긴 봉투를 들고 왔다.

“토요일 날 드리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이제 드려요.”

“아이고, 이게 뭐야?”

“별거 아니에요. 그냥 공항에서 산 과자랑 빵이에요. 집에 가서 아드님하고 드세요.”

“아이고, 고마워. 이런 걸 다···.”

“별거 아니에요. 진짜 늘 감사해요.”

“네가 감사하지.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그럼, 쉬어. 내일 아침에 올 테니까.”

“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다시 인사를 나누고 이번에는 진짜 가시는 줄 알고 돌아서는 찰나,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이번엔 이모님이 아리를 불렀다.

“오면 이야기해준다고 하고 깜빡하고 있었네.”

“뭐요?”

“금요일 날, 집에 경찰이 왔었어.”

경찰?

“경찰이요?”

“응. 수원중부경찰서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이름이···아, 나중혁 형사라고 하더라고.”

아, 기억난다.

“뭐라고 하던가요?”

“아리 씨를 찾길래, 내가 출장 가고 없다고 했지.”

“혹시 무슨 일이라고 하던가요?”

“오빠 교통사고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던데.”

“아···그래서요?”

“안 열어줬어. 솔직히 진짜 경찰인지 내가 어떻게 알고 열어줘.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리고, 내가 경찰을 안 좋아해. 우리 아저씨가 경찰한테 당해서 억울하게 옥살이도 하고 그랬거든···.”

맨 처음 인터뷰를 보러 오셨을 때도 말씀하셨다.

“혹시 오빠에 대해서도 묻던가요?”

“뭘 물으려고 하는 거 같긴 하던데, 내가 그냥 무시해 버렸어. 경찰이라면 꼴도 보기가 싫어서···. 미안해.”

“아니요. 괜찮아요. 잘하셨어요. 앞으로 계속 그냥 모른다고 해주세요. 경찰이 와도 절대 문 열어주지 마시고요.”

‘절대’라는 표현이 이모님을 살짝 의아하게 만드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집에 누가 들어오면 절대 안 되니까.

다행히, 아리의 짧은 설명에 이모님도 공감하는 눈치다. 아마도 경찰과 지독한 악연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오빠가 저렇게 되기 전에 빚쟁이들한테 많이 시달렸고, 사기 혐의로 경찰들도 찾아왔었거든요.”

“그렇다니까! 망할 놈들, 경찰들이라는 것들이 빚쟁이 편을 들고 말이야!”

“혹시라도 경찰이랑 마주치셔서 오빠에 관해 물으면, 모른다고 해주세요.”

“알았어. 내가 입 꼭 다물게.”

이모님은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듯한 시늉을 한다.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귀엽기까지 하다

“감사해요.”

“아이고, 내가 힘들게 일하고 온 사람을 붙잡고 말이 길어졌다. 그럼, 갈게. 쉬어, 아리 씨.”

“들어가세요.”

이모님이 돌려보내고 아파트 문을 닫은, 아리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책상 서랍을 뒤졌다.

서랍 구석에서 나온 명함 하나.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경장 나중혁」

오빠는 엄마를 데리고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뺑소니였다.

목격자는 없었고 시늉으로 달고 다닌 블랙박스는 해당 사건을 녹화하지 않았다.

다만 도로 CCTV 영상이 있었다.

가해자의 위협적인 운전으로 오빠와 엄마와 탄 차는 국도 밖으로 튕겨 나갔고, 사고 장면이 도로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문제는 가해자 차량의 번호판이 위조 번호판이라 차량과 운전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없었다.

많지 않은 보험료가 전부였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지?”

넉 달 전 그녀였다면 망설임 없이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리는 명함을 다시 서랍 안 깊숙이 집어넣었다.

---*---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중혁아.”

“네, 팀장님.”

“피해자 집에는 가봤어?”

“네, 금요일 날 집에 가봤습니다.”

“뭐래?”

“만나지 못했어요.”

“전화를 하고 가지 그랬어.”

“전화번호를 바꿨는지, 안 받더라고요.”

“아, 그래서 그냥 갔구나.”

“네.”

사실 장기 미제사건이나 다름없었다.

증인인 피해자들은 모두 심신장애 상태이고, 유일한 단서인 CCTV 기록만 가지고는 해당 차량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다른 경찰서에 접수된 교통 사건 가해자가 해당 차량 번호판을 소유하고 있었던 정황이 발견되었다.

그게 나중혁 형사가 금요일 아리의 집에 찾아간 이유였다.

“어머님한테 가보지 그래? 그분이 아마 의정부에 있는 요양병원에 계시지 아마?”

“그래서 거길 찾아가 보려고요.”

“그러지 말고 요양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연락처를 달라고 해. 거기 보호자가 아마 딸이었을 거야.”

“안 그래도 병원에 전화했는데, 유선으로는 안 가르쳐주겠대요.”

“하-참 우리나라 선진국이 다 됐어. 영장 없으면 별것도 아닌 거에 아무도 협조를 안 하고. 이러니 다 경찰을 빙다리핫바지로 알지. 아니, 범인을 잡아주겠다는데 피해자 보호자 만나는 게 이리 어려워서야, 원.”

“일단 가서 요청하면 알려주겠죠.”

“그래, 그래도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겠지.”

“네.”

“그거 꽤 불쌍한 사건이잖아? 아들이 아마 변호산데 엄마 모시고 근교에 식사하러 갔다가 뺑소니를 당한 거지? 아들은 사고 때문에 혼수상태고 엄마는 뇌를 다쳤나 해서 기억이 오락가락하고, 맞지?”

“네, 맞습니다.”

“보험금이 나오기는 했던가?”

“보험금은 나왔는데, 수술비랑 병원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거기 동생이 몇 번 찾아와서 부탁하더라고요.”

사실 그래서 더 나중혁이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었다. 아니었으면 진작에 장기 미제사건 파일에 던져졌을 것이다.

경찰서에 찾아와 범인을 꼭 좀 잡아달라고 애원하던 여동생.

금방이라도 생을 포기할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서.

“그려, 그럼 고생해. 나는 퇴근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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