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출장 (4)
금요일 늦은 시각,
도쿄의 한 노래 주점.
“아니, 아무리 우리가 당신네들 만화 판권으로 사러 왔다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지! 우리 필승 코리아라고! 응!”
한일 양국 간에는 아주 민감한 역사가 있다.
물론 대부분 나라 대 나라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사안이지만, 간혹 개인 대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민감해질 때가 있다.
1차 저녁 식사 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2차로 넘어오면서 술이 과해졌다.
특히, 긴장을 많이 했던 오 대표가 술이 들어가면서 그동안 눌려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시작은 정말 아주 단순한 거였다.
“요새는 한국도 만화를 아주 잘 만든다.”
“일본의 젊은이들도 요새는 라인, 픽코마 같은 플랫폼을 많이 이용한다. 근데 그러는 바람에 작화의 퀄리티가 많이 떨어졌다. 웹툰은 완성도가 좀 아쉽다.”
“이해는 하는 데 그게 트랜드다. 옛날과 같은 연재 속도로는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없다.”
“한국인들은 정말 뭐든 트랜드를 잘 따라가고 빨리빨리 하는 걸 중요시하는 것 같다. 일본인들은 다르다. 우리는 전통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고 디테일에 신경을 쓴다.”
“우리도 그렇다. 빨리빨리 한다고 디테일에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하는 것뿐이다.”
“지금 일본 만화가들을 열심히 안 한다는 말이냐?”
···
원작가에게 반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동율 대표가 딱히 공격적으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한 잔 두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제가 그렇게 바뀌었고, 의도치 않게 민족성까지 운운하게 된 것이었다.
“これは困るじょう。俺の作品を買いに来たとして、俺が今一生懸命やる漫画家ではないということじゃない!”
(이러면 곤란하지. 내 작품을 사러 왔다면서 내가 지금 열심히 하는 만화가가 아니라는 말이잖아!)”
“저희 대표님 말씀은 그게 아니고요. 변호사님 통역 좀 잘해주세요.”
“前田さん、おさんがした話はそれじゃなくて···”
(작가님, 지금 오 대표님이 한 말은 그게 아니라···)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때까지 통역을 잘하고 있던 아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난감했다.
이숙영 팀장은 자꾸 작가의 말을 통역해달라고 했지만, 제대로 통역을 하라고 하는 말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숙영 팀장의 말들 역시 전달한다고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アリス、人の心は言葉だけで表現するのではなく、行動で見せてくれるじゃない。”
(앨리스, 그 사람의 진심은 말로만 표현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잖아.)
아리가 그렇게 외쳤고, 그 한마디의 마에다와 호단샤 측 직원들이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私たちは時々間違いを犯します。いいえたくさんします。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人生の最も低い瞬間に、吐き気は言葉どおりに彼のすべてを評価し、彼が生涯成し遂げてきたものを切り下げ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それは不公平だと。アリス。”
(우리는 때때로 실수를 해. 아니 많이 해.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의 가장 낮은 순간에 내뱉은 말 따위로 그의 전부를 평가하고, 그가 평생 이뤄왔던 것들을 절하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불공평하다고. 아리스.)
“(‘열정의 시마다군!’ 6권 78페이지. 훌륭합니다, 변호사님! 변호사님이야, 말로 진정한 작가님의 팬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진정한 팬을 몰라봬서!)”
아리가 방금 읊은 말은 마에다 작가가 인기를 얻기 전 그렸던 초장기 만화의 주인공 캐릭터가 작중에서 내뱉은 대사였다.
마에다의 표정이 감동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출장 하루 전,
<법무법인 해결> 사무실.
퇴근하는 길, 아직 불이 켜져 있는 후배 사무실을 본 정도는 그리로 향했다.
“뭐해? 퇴근 안 했어? 내일 7시까지 인천공항에 가야 하잖아.”
“아, 요건만 다 보고 가려고요.”
“그건 다 뭐야? 만화책?”
책상 위에 만화책처럼 보이는 헌책 십여 권이 쌓여있다.
“네.”
호기심에 한 권 직업들을 펼쳐보니,
“어, 일본어로 되어 있네.”
“네. 헤헤.”
“이야- 일본어 잘한다고 하더니 일본어로 된 책도 있는 거야?”
“만화책인데요, 뭐.”
“그래도.”
정도는 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떤 내용인가 궁금해 한 권으로 휘리릭 넘겨본다.
“뭔 내용이야?”
“아직 다 읽지는 않았는데, 영업직 신입사원이 고군분투하며 회사에 적응하는 내용인 것 같아요.”
“그래? 듣기만 해도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유명한 거야? 이렇게 원서까지 구해서 읽을 정도로?”
“아니요. 한국에서는 발매도 안 되었더라고요. 인터넷으로 어렵게 구했어요.”
“왜?”
“콘도 마에다 작가의 초장기 작이더라고요. 보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콘도 마에다? 콘도 마에다가 누구···아! 그 <꿈쟁이 스튜디오>에서 판권 구매하려는 작품의 원작자?”
“네.”
아리는 어렵사리 구해 오후에 도착한 ‘열정의 시마다군!’을 읽고 있었다.
어쩌면 뭐 그런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냐고 할 법도 했지만, 정도는 오히려 엄지를 추켜세웠다.
“역시 대단해. 솔직히 그게 왜 쓸모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해.”
“그냥요. 파일 보니까 원작자가 까다로워서 판권 구매 진행이 더딘 것처럼 보이던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고,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날도 그렇잖아. 김 변이 이중기 작가님의 원고를 읽지 않았으면 지금쯤 우리 큰일 났을걸.”
“큰일까지는요 뭐. 아마도 서 변호사님께서 다 해결하셨겠죠. 해결사신데···.”
“해결사도 옆에 조력자가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거야. 하비 스펙터가 마이크 로스나 도나 폴슨 없이 하비 스펙터 짓을 할 수 있겠냐 말이야.”
정도가 유명 법정 미드 ‘슈츠’의 레퍼런스를 언급했다.
하지만 해당 드라마를 본 적이 없는 아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는다.
“‘슈츠’ 안 봤어? 하비 스펙터? ‘난 꿈 같은 거 없어, 목표가 있지.’ ‘코너에 몰리면, 그걸 부수면 그만이야.’ ‘이길 수 없는 게임은 규칙을 바꿔서 이기면···.’ 이야- 그 명드를 아직 못 봤네.”
“죄송요.”
“꼭 봐. 진짜 변호사라면 꼭 봐야지.”
“‘슈츠’요?”
“응. 한번 보기 시작하면 못 멈춰. 주말에 봐.”
“알겠습니다.”
“찾아보고 없으면 말해. 내가 블루레이 빌려줄게.”
“네, 알겠어요.”
“그래, 그럼. 수고하고 내일 도쿄 출장 잘 다녀와.”
언제나처럼 시끄러운 정도가 가고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아리는 다시 ‘열정의 시마다군!’에 집중했다.」
---*---
“(미천한 제 작품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1년간의 과정이 매번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제가 <꿈쟁이 스튜디오>에 갖는 믿음은 변함없습니다. 돈이나 다른 것들을 생각했으면 오늘의 계약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잘 만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동율 대표님.)”
지난밤 난동에도 불구하고, 2차 판권 계약은 아무런 문제 없이 체결되었다.
“정말이지, 변호사님께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여기서 하시죠, 대표님.”
“그럴까? 변호사님, 잠깐 앉으실래요?”
계약 체결 후, 호텔로 돌아온 오동율과 직원들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룻밤 사이에 지옥과 천국으로 오간 느낌이다.
그들을 지옥에서 구해준 사람이 <해결>의 막내 변호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팀장님이 왜요?”
“솔직히 변호사님 일본어가 구글 번역기 같다고 제가 그랬거든요. 근데 제가 오해했습니다. 변호사님 일본어 정말 잘하시네요.”
“아니에요, 아녜요. 저, 잘 못 해요.”
“이거 봐. 내가 말했잖아. 변호사님 ‘힘순찐’이라고.”
“대표님, ‘힘순찐’이 무슨 뜻인 줄이나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힘을 숨긴 찐’ 아니야?”
“‘찐’이 뭔데요?”
“찐? ‘찐, 찐, 찐, 찐이야~ 네가 찐이야~’ 할 때 ‘찐’ 아니야?”
“아니에요. ‘찐따’할 때 ‘찐’이에요.”
“진짜? 그럼, 내가 지금 변호사님한테 ‘찐따’라고 헌 거야?”
“네. 사과하세요.”
“대표님이 변호사님한테 큰 실수를 하셨네. 진짜 큰절하셔야겠는데요.”
“아이고, 진짜 그래야겠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아녜요.”
하하하하. 하하하.
일이 마무리가 잘 되어 모두가 만족스러워한다.
오동율 대표는 물론이고, 이숙영 팀장과 조재경 대리 둘 다 <해결>의 서비스에 감동했다.
“근데, 정말 바로 그냥 돌아가시게요? 이제 주말인데. 같이 계시면 저희가 호텔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좋은 데 모실 수 있는데. 서 변호사님, 하루 저희랑 관광하시고 내일 돌아가시죠?”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진짜 아쉽네요. 알겠습니다. 바쁘신 분들이니까, 두 번 잡지 않겠습니다. 그럼 서울 가서 뵐게요. 제가 진짜 크게 한번 쏘겠습니다.”
“그럼,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
도쿄, 나리타공항.
보세구역 안으로 들어가기 전, 커피 한잔을 마시러 카페에 들어온 서지우와 아리.
“쉬었다 와도 상관없어.”
“네?”
“도쿄 처음이라며? 혼자라도 관광하고 오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고. 내 눈치 볼 필요 없이.”
의뢰인과 함께 여행 다니는 것이 불편해 거절한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가라는 의미였다.
사실 아리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다.
“아니에요. 돌아가야 해요.”
“왜?”
“돌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어머니?”
그리고 오빠.
“네.”
“요양병원에 계신 거 아니었던가?”
“그렇기는 한데···.”
뭔가 더 물으려던 서지우는 그만둔다.
남의 사정을 꼬치꼬치 묻는 타입은 절대 아니다.
“수고했어. 그 기억력이 쓸모가 있네.”
어젯밤, 조재경 대리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주점에 도착한 서지우는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위급하다고 해서 ‘아일라 피셔’에게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를 다하지 못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그가 주점에 도착했을 땐, 오동율 대표와 콘도 마에다 작가는 어깨동무를 한 채 조용필의 ‘친구여’를 부르고 있었고 직원들은 <해결>의 막내 변호사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래서 뽑으신 거 아니었어요?”
“잘못 뽑은 거 아닌가 생각 중이었거든.”
“치이—.”
‘치이? 방금 내 앞에서 ‘치이’라고 한 건가?’
막내 변호사의 겁 없는 행동에 서지우는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입사 때부터 무언가 경직되어 있는 듯한 막내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고, 그건 좋은 징조였다.
“커피 다 마셨으면 그럼 이만 갈까?”
긴장의 연속이었던 한 주, 남아서 하루 더 놀고 싶은 만큼 아리는 집에 가고 싶다.
갑갑한 양복과 압박 속옷 그리고 아랫도리의 그 흉측한 물건까지 싹 다 벗어놓고 12시간 동안, 아니 24시간 동안 잠만 자고 싶다.
“네, 가시죠, 변호사님!”
아리는 그렇게 무사히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You, mister, can you come this way?”
(거기, 신사분, 잠깐 이쪽으로 오실까요?)
가방을 체크하던 검색대 직원이 아리를 다른 방으로 불렀다.
---*---
같은 시각, 서울, 은평구.
아리의 아파트.
띵동- 띵동-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수원중부경찰서에서 나왔는데요. 혹시 김아리 씨 집에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