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33)
  • 도쿄 출장 (1)

    띠리링- 띠리링-

    -좋은 아침입니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대표님.”

    -제가 좀 일찍 전화를 드렸죠?

    “아닙니다.”

    이른 아침, <꿈쟁이 스튜디오> 오동율 대표한테서 연락이 왔다.

    -조금 갑자기 결정된 거라, 변호사님 스케줄도 있고, 빨리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오동율 대표가 꽂힌 일본 만화가 있다.

    한국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현지에서는 인기가 제법 있는 작품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오동율 대표는 영상화 판권을 얻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고, 이제 그 결실을 보아야 할 타이밍이었다.

    -지난주에 호단샤의 사카구치 상이 한국에 와서 만났고, 미팅이 좋았어요. 사실 우리 말고도 영상화 판권을 요구하는 일본 제작사가 몇 있는데, 호단샤 측은 아무래도 한국 제작사가 요새는 대세이다 보니까 우리를 좀 더 선호한다고 하더라고요.

    “잘됐네요.”

    -네, 일단 출판사의 호감은 얻었는데, 그래도 아직 결정된 게 아니라서 이참에 계약해 버리려고 원작자와 최종 미팅을 요청했거든요.

    그랬더니, 작가가 이번 주 금요일에 봤으면 좋겠다는 이메일이 어젯밤 날아온 것이었다.

    -사람 심리라는 게 왔다갔다 하는 거잖아요. 변호사님 스케줄만 괜찮으시다면, 이번 출장에 동행해주셔서 간 김에 계약까지 마무리하고 싶어서요.

    계약서 초안은 이미 완성되었고, 호단샤 쪽에서 이미 초안 문구에 대해 동의를 한 상태였다.

    다만, 작가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아 홀드가 되어 있는 상황.

    만약 이번 출장에서 확정된다면, 체결 직전에 세세한 부분에 있어 조율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물론 실무진 미팅에서 먼저 결정한 후, 계약서 사인은 나중에 할 수도 있지만, 경쟁자들이 끊임없이 구애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 결정이 내일 번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사실 저번 주, 한국에서 열린 미팅에도 작가가 참석하기로 예정되어있었으나, 오지 않은 것이었다.

    오동율이 이번 출장에 <해결>의 동행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확정 짓고 싶다.

    “알겠습니다. 그럼 스케줄 조정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딸깍.

    ---*---

    “아- 머리 아퍼. 아- 속 쓰려.”

    어제 빈속에 깡소주 세 병을 들이마신 것이 타격이 컸다.

    아침부터 골골거리고 있는 정도에게 아리는 그가 선호하는 ‘상쾌환’과 이온 음료를 전달했다.

    “괜찮으세요?”

    “아- 안 괜찮아. 아- 죽겠네.”

    “타이레놀 같은 거라도 드릴까요?”

    “출근하다 먹었어. 김 변은 괜찮아?”

    “네···뭐 저는···.”

    “속도 괜찮고?”

    “네, 어제 안주를 많이 집어 먹어서 그런가? 속도 괜찮아요.”

    “아- 대단하네. 나도 어디 가면 술 약하다는 소리는 안 듣는데, 김 변하고 작가님은 신계(神堺)네, 신계.”

    하늘이 낳은 주당이다. 그렇게 마시고도 숙취 하나 없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사다 드릴게요.”

    “아냐, 이 대리한테 부탁하면 돼. 아, 근데, 오늘은 진짜 안 되겠다.”

    “왜 그러세요?”

    “근처 병원에 가서 링거 한 방 맞고 와야겠어. 아주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

    “같이 가 드릴까요?”

    “아냐, 아냐. 가서 일 봐. 내가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이제는 힘들다 못해 얼굴색까지 하얘지려고 한다. 정도가 벽을 붙잡고 방을 나서려는 순간,

    “왜 그래?”

    서지우가 들어왔다.

    “아···어제 작가님하고 한잔했는데, 앉자마자 빈속에 소주 세 병을 들이마시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

    무표정의 서지우. 한심하다는 말이 그의 무표정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이번 주, 금요일에 <꿈쟁이 스튜디오> 건으로 일본 출장 스케줄 잡혔어. 10시 10분 비행기니까 알고 있으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 말만 하고 나가려던 서지우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멈춰서 다시 돌아섰다.

    “그러지 말고, 이번 출장, 김 변이 나랑 가지.”

    “네에?!”

    “윤, 괜찮지?”

    “아, 저야, 그러면 좋죠.”

    윤정도는 비행기 공포증이 있다. 비행기를 못 탈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지만, 진정제가 필요할 정도이다.

    “그래, 그럼. 윤이 사건 브리핑 좀 해주고, 김.”

    “네, 변호사님.”

    “금요일 7시 반에 인천공항에서 보는 걸로.”

    “아······.”

    “왜? 문제 있어?”

    “그게 제가 여권이···없습니다.”

    남장을 하고 회사에 나오는 것이랑 오빠의 여권을 들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 것이랑은 왠지 느낌이 다르다. 게다가 혹시 검색까지 당한다면···.

    “그럼 이참에 만들어.”

    “네? 그게 그렇게 빨리 나오나요?”

    여권은 신청하면 아무리 빨라도 1주일은 걸리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초구청에 신청하면 3일 안에 나와. 유 과장한테 얘기하면 바로 신청해줄 거니까, 가서 얘기해.”

    “아···.”

    “왜? 또 무슨 문제 있어?”

    정말이지 사건의 연속이다.

    “없습니다.”

    ---*---

    같은 날, 퇴근 시간.

    <꿈쟁이 스튜디오> 판권 구매 관련 파일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리의 머릿속에 온갖 상황들로 복잡해졌다.

    ‘공항에서 걸리면 어떡하지?’

    ‘한국 공항에서 안 걸려도 일본 공항에서 걸리면? 그럼 일본에서 감옥에 가는 건가?’

    ‘그럼 사이닝보너스 받은 것도 다 돌려줘야겠지?’

    ‘아···나도 그냥 그날 발목을 삘까? 그래, 그게 좋겠다! 전날 다치는 거야!’

    똑똑똑.

    이 상황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느라 그녀는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변호사님. 이제 좀 괜찮으세요?”

    “응. 그래도 링거 한 대 맞고 왔더니 좀 괜찮네. 그래서 파일은 좀 봤어?”

    “네? 아, 네, 봤어요. 재미있네요.”

    “재미있다고? 파일이?”

    “아니요. <꿈쟁이 스튜디오>에서 2차 판권 구매하려는 작품이요.”

    “그래?”

    “네, 네이버에 있길래, 1권만 구매해서 봤는데, 조금 잔인해서 그렇지 되게 재미있어요. 이 작가 스타일이 제 취향이랑 맞는 거 같아요.”

    “나는 만화는 별로 안 봐서···. 아무튼 그거 의뢰인이 되게 오래 공들인 거야. 우리한테 온 거는 6개월이지만, 근 1년을 구애했대.”

    “아, 그랬구나.”

    “그러니까, 김 변이 나 대신 가서 서 변호사님 보좌 좀 잘 해드려.”

    가지 않을 수 있을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괜히 죄책감이 든다.

    “···네. 근데,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냥 따라만 가는 거지. 잘 모르는데 오히려 짐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가서 보고 잘 배워. 해외 출장에서는 변수가 많아.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우습지만, 시간당으로 차지하는 변호사를 해외 출장에 대동하겠다는 건 사건을 해결하거나 계약을 종결하겠다는 의미거든, 그러니까 대표님 따라가서 잘 보고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보좌 잘해드리고. 일본어 좀 한다며?”

    “제가요?”

    “아까 유 과장이 그러던데? 이력서에 JLPT 2급이라고 되어 있다고. 그래서 서 변호사님이 김 변한테 가자고 하신 것 같다고.”

    허걱. 오빠 그놈이 일어를 했던가? 잘 모른다.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 관심 없이 살았으니까.

    아무튼 이번 출장 더 가면 안 되겠다.

    “아무튼 고마워.”

    “네? 뭐가요?”

    “내가 사실은 비행기 공포증이 좀 있어. 뭐 타라고 하면 못 타는 거는 아닌데, 탈 때 진정제 먹고 타. 그래서, 원래 해외 출장은 주로 선배님하고 ‘막내’가 가 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

    앞.으.로. 잘 부탁해······.

    그렇다는 말은 이번을 피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온다는 이야기······.

    복잡했던 머릿속에 하얘진다.

    ---*---

    퇴근 후, 부랴부랴 집에 달려온 아리는 오빠의 이력서를 확인했다.

    「외국어: 영어(iBT 107점) 일본어(JLPT N2)」

    있다. 일본어 자격증.

    ‘어떻게 이걸 놓쳤지?’

    오빠가 모아둔 <해결>에 관한 정보와 학교 관련 정보는 꼼꼼하게 챙겨봤으나, 정작 이력서는 이름과 사진만 보고 넘겼다.

    당연히 다 안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아리는 고민이 많아졌다.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도의 말을 들어보니, 앞으로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계속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그냥 나도 비행기 공포증이 있다고 그럴걸.’

    이미 늦었다.

    그걸 말하려면 아까 물어봤을 때, 그때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이번만 피할까? 괜히 갔다가 일본어를 하라고 하면 어쩌지? 그래, 다음에 따라가고 이번에는 피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으려 했더니 갑자기 실망하는 서지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섭다. 그의 싸늘한 무표정.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도망치지 마. 습관이 습성이 되니까.」

    다른 상황이기는 해도, 그 말이 또 떠올랐다.

    ‘한번 도망치면 또 도망치고 싶어지겠지···.’

    결국 밤새 어떻게 하면 믿을만한 핑계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가기로 마음먹었다.

    *

    띠리링- 띠리링-

    다음날, 출근길.

    아리는 동대문 트랜스 양복점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할아머니, 저예요, 아리.”

    -아리가 누구야?

    “아리요! 몇 주 전에 여름 양복하고 리넨 조끼 맞추고 간.”

    -아, 그놈. 이름을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왜? 바지 뜯어졌어? 가지고 와. 수선해 줄게.

    “아니요. 옷은 괜찮고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뭔데?”

    “그···그때 보여주셨던 있잖아요.”

    “뭐? 원단?”

    “아니···그거 말고···그···고무로 된···.”

    “고무? 고무로 된 거 뭐?”

    “그···왜···모형···남자···거시···.”

    “아아- 오가닉 실리콘 리얼 사이즈 아시안핏 모형 자···.”

    헉!

    “네···그거···요.”

    “있어. 퀵으로 보내줄까?”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까, 만발에 준비가 필요하다.

    “라지? 미디엄?”

    ---*---

    금요일, 10시 10분.

    인천공항.

    “그럼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온갖 상황을 머릿속으로 준비했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그녀는 인터넷을 뒤져 공황과 비행기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해 리서치했고, 문제가 될만한 것들은 아예 챙기지 않았다.

    혹시라도 몸수색을 당할까 해서, 몸수색 매뉴얼 찾아봤고.

    공산국가나 미개발 국가가 아닌 이상 속옷까지 벗기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만발의 준비를 했다.

    그 징그러운 물건까지 차면서 말이다.

    그런데···.

    “뭐해, 안 타?”

    “네? 아니요. 타겠습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너무나 쉽게 통과했다.

    항공사 티켓팅 창구에서부터 게이트까지 새로 만든 오빠의 여권을 네 번씩이나 체크했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쉬워 허탈감마저 들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허탈감도 도쿄행 아시아나 항공 비즈니스석에 앉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꿈만 같았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해외여행.

    이걸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오빠와 엄마가 그렇게 되고 영영 못 갈 줄 알았는데···.

    눈물이 흐르려고 하는 것을 겨우 참는다.

    “샴페인 드시겠어요?”

    “네, 드실게요. 아니 마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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