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33)

장비 업그레이드

“이 내용은 조금 위험할 것 같습니다.”

<영화사 청아>를 통해 받은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7, 8회차 각본을 검토하던 여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중국인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을 만한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얘기했어?”

“네, 공 대표하고 이야기했는데, 자신들은 작가의 창작영역에 관여하고 싶지 않답니다.”

얼굴색이 어두워지니 원래 나이가 얼핏 보인다.

“이게 왜 문제인지는 알고 있는 것 같고?”

“네, 알고는 있는 눈치입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자기네도 이중기 작가랑 직접 이야기를 하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곤란하답니다.”

“그러니까 여태껏 돈도 안 되는 영화만 만들고 있는 거지. 곤란해서 안 하겠다는 거야? 곤란해서 못 하겠다는 거야?”

“아무래도 상대가 대문호이다 보니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 할 때 관계를 잘 유지해야 다음 작품도 같이 할 수 있고요.”

“우리는?”

“네?”

“투자사 눈치는 안 보고?”

“······.”

예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가 MJ 엔터테인먼트에 먼저 오고 그다음에 시장에 돌았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넷플릭스, 디즈니, 애플 등 미국 OTT 플랫폼과 중국, 홍콩, 싱가폴 자본들이 한국 콘텐츠에 서로들 투자하겠다고 나서니, MJ 엔터테인먼트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물론 여전히 국내 드라마·영화 시장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MJ 엔터테인먼트가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는 OTT 플랫폼 ‘티빅스’의 중요한 시장 중 하나가 중국이었다.

이미 선발주자인 넷플릭스가 국내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고 디즈니, 애플마저 국내 콘텐츠 제작에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티빅스’의 성공적인 런칭을 위해 어마어마한 예산을 책정해 놓은 MJ 엔터테인먼트는 국내 시장만 노리고는 성공할 수 없었다.

국제 시장에서 플레이하는 그들과 경쟁하려면 MJ 엔터테인먼트 역시 국제 시장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했고, 그런 의미에 있어서 미국산 OTT가 점령하지 않은 중국은 아주 중요한 시장이었다.

“이 작가님 아직 춘천에 계셔?”

“예, 계십니다”

여혜진이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자, 차동균은 비서팀에 재빨리 차량 대기를 지시했다.

“공 대표 말이 이중기 작가는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님하고만 이야기하신다고···.”

“얼음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불하고 놀겠어.”

여혜진은 이중기를 만나러 춘천으로 향했다.

---*---

“아- 덥다.”

날씨가 꽤 더워졌다. 한여름도 아닌데 벌써부터 대낮 온도가 30도 가까이 올라가는 날들이 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이 압박붕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미국 NBA 아시죠? 미국 NBA 선수들이 연습할 때, 혹은 부상을 당했을 때 사용하는 전문 콤프레션 밴드 혹은 콤프레션 랩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졌고요. 미국 정형외과 의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의료 밴드와 동일한 규격으로 제작되어 아주 사용처가 다양한 그런 제품입니다.”

“와- 탄성이 정말 좋은데요.”

“물론입니다. 탄성이 좋아 성인 남성이 힘껏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고, 감으면 감을수록 압박감이 끝내주는데요. 한번 해보시겠어요?”

“와- 이거 압박감이 엄청난데요.”

“누르는 압박감, 누르는 강박감이죠?”

“하하하. 선생님 센스가···. 웃기고 싶은 강박감이 있으신 거 같은데요? 하하하.”

“이렇게, 이렇게 감아도 재질이 워낙 고급스러워서 살갗에 자극을 주지 않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땀! 우리가 한여름에는 러닝셔츠만 입어도 덥고 땀이 차면 찝찝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이 압박붕대는 통풍이 잘되고, 또 물에 젖으면 금세 마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실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와- 진짜네요. 여러분 이거 한번 보십시오. 통풍이 너무 잘됩니다. 진짜 이걸 시청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요. 진짜 시원합니다.”

“컴퓨터를 하느라 손목이 아프신 직장인들이나 집안일에 손목이 저리신 주부님들이 사용하기에 너무 좋은 제품입니다.”

“그렇네요.”

“그리고 요새 옷 입을 때 몸매 보정 속옷들 많이 입으시잖아요. 다이어트용으로도 입으시고. 이 붕대를 배나 허벅지에 감으시면 똑같은 효과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한가한 토요일.

무지성으로 TV를 틀어놓고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시청하고 있던 아리는 자기도 모르게 TV에서 광고하고 있는 압박붕대를 주문한다.

---*---

“할아머니, 저 왔어요.”

날씨가 더워지니 새로운 장비가 필요하다. 토요일 오후, 아리는 동대문, 트랜스 양복점을 찾았다.

탄탄한 스포츠 브라와 어두운색 와이셔츠로 커버하고 회사에서도 항시 재킷을 입어 커버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더워지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틀어놔도 재킷을 입은 채로는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 걸 막을 수가 없다.

“덥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할아머니는 아리가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신기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네.”

“여름 양복 하려고?”

“네.”

“정말 시원한 거로 해주세요.”

“알았어.”

“색은?”

“어두운 거로요.”

“자, 골라봐.”

노동춘 할아머니는 지난번처럼 다양한 원단이 꽂혀 있는 책자를 들고 와 아리에게 건넸다. 책자를 둘러보던 아리는 지난번처럼 검정색 원단과 감색 줄무늬 원단을 골랐다.

“이거랑 이거요.”

“이 앞에 서 봐.”

원단 선택이 끝나자, 할아머니는 아리를 거울 앞으로 불렀다.

“고새 좀 근육이 붙었네.”

“운동하고 있어요. 헤헤.”

“광배근이랑 허벅지 운동은 너무 하지 말어. 양복 입었을 때 태가 잘 안 나니까.”

“네, 알겠습니다.”

할아머니는 능숙한 손짓으로 아리 몸의 이곳저곳을 쟀다.

할아머니는 단순히 아리의 몸에 맞는 남자 양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스러운 부분을 감춰줄 수 있게 그러면서도 헐렁해 보이거나 남의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할아머니.”

“왜?”

“여름에 사무실에서 더워서 그런데, 재킷 말고 입고 있을 만한 거 없을까요?”

“조끼.”

“조끼요? 조끼는 더 덥지 않을까요.”

“내가 리넨 소재로 된 거로 만들어줄게. 그거 입고 있으면 재킷 입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시원할 거야. 없는 것보다야 덜 시원하겠지마는.”

“어떤 건데요?”

아리의 물음에 노동춘 할아머니는 조끼를 입고 있는 이탈리아 신사들 사진이 들어있는 책자를 가져다준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구매해야 할 물건이다.

“만들어주세요.”

“소재는?”

“여기 이 사진이 있는 아저씨가 입은 재질의 원단도 있어요?”

“있어.”

“그걸로요.”

“그럼 그거랑 여기 까만 거랑 해서 두 개 만들어주면 돼?”

“네!”

그렇게 여름 양복과 리넨 조끼를 맞춘 아리가 돌아가려는 순간, 할아머니는 러닝셔츠같이 생긴 하얀색 셔츠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압박붕대 써?”

“네? 아···네.”

“한번 써 봐. 압박붕대만큼 압박감이 세지는 않지만, 여름에는 아주 실용적이고 좋아. 브라자 형태가 아니고 난닝구 형태라서 혹시라도 어디에서 벗을 일이 있어도 들킬 염려 없고.”

“조끼 입을 거면 안에 이거 하나만 입어도 충분할 거야.”

역시 일을 하려면 좋은 장비가 필요하다.

동대문에 있는 명장에게 찾아가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고 업그레이드한 아리는 왠지 모르게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

“혹시 이건 안 필요해?”

“이건 뭔데요?”

할아머니는 남성 성기를 본떠 만든 고무 모형을 아리에게 쓱 내밀었다. 발기된 것은 아니고, 양쪽에 고무줄이 달려 팬티 안에 차고 다니면 두툼한(?) 모양을 내주는 용도이다.

“아악! 아뇨, 아뇨. 그것까지는···. 고맙습니다. 일주일 뒤에 가봉할 때 올게요.”

그런 걸 처음 본 아리는 가게를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

월요일 아침,

<법무법인 해결>, 서지우 사무실.

“이걸 지금 신청서라고 쓴 거야?”

“죄송합니다.”

<법무법인 해결>의 서버에는 각종 서류 양식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아리는 지난 삼 개월 동안 그 안에 있는 서류들을 모두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러나, 저장했다고 모든 서류를 변호사처럼 작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합의서 같은 것은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었는데, 신청서, 소장 등은 쉽지 않았다.

“기억력만 좋지 도무지 이런 실력으로 법대는 어떻게 졸업한 거지?”

끄응-

애초에 나이스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떨 때는 진짜 못되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다시 써와.”

“바로 다시 써오겠습니다.”

아리는 퇴짜맞은 서류를 들고 대표 변호사실을 나왔다.

“왜? 서 변호사님이 뭐라고 하셨어?”

어깨가 축 늘어져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아리를 보고 휴게실에서 커피를 들고나온 정도가 다가왔다.

“네.”

“왜?”

“가압류 신청서 하나 작성하라고 하신 게 있는데,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해왔다고 혼내셨어요.”

“원래 1년 차 때는 다 그런 거야. 나도 엄청 깨졌어.”

“네···.”

“줘 봐. 내가 한번 봐줄게.”

“진짜요? 아니에요. 선배님도 바쁘시잖아요.”

“바빠도 신청서 하나 보는 건 일도 아니야. 줘 봐.”

“그럼, 여기···.”

아리는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정도에게 파일을 건넸다. 동산 가압류 신청서로 살짝 까다롭기는 했어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푸하하하.”

“왜요? 그렇게 못 썼나요?”

“미안, 미안. 그냥 좀 웃겨서···. 김 변.”

“네?”

“로스쿨 다닐 때, 머리 좋은 거만 믿고 놀았지?”

“네에?”

“이거 단어들이 변호사가 쓰는 단어들이 아닌데. 분명 학교에서 배웠을 텐데···. 혹시 뭐 놀러 다니느라 바빴던 거야? 근데 또 그런 거치고는 성적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아···하하하···로스쿨 다닐 때, 제가 좀 방황을 해서···.”

“방황? 무슨 방황.”

“아, 남자, 아니! 여자 문제가 좀 있어서.”

“그래? 언제 한번 술 한잔하면서 들어봐야겠는데. 그래, 내가 김 변 본 첫날에 딱 느낌이 왔는데,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어. 오케이, 그러지 말고, 말 나온 김에 오늘 끝나고 한잔 어때?”

“오늘···이요?”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방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내뱉은 ‘여자 문제’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즉흥적으로 대처하다가는 서사에 구멍이 생기니까.

“왜 바빠?”

“네, 제가 오늘 저녁에는···.”

바로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건물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서지우, 이놈 어디 있어? 당장 나오라고 해.”

“어, 저 목소리는······.”

이중기 작가님이시다.

“투자자주제에 어딜 감히 찾아와서 작가한테 이래라저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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