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33)

우리 식구를 건드리면 (2)

서초동의 한 건물.

파란색 배경에 하얀색 글자로 적힌 간판들.

6층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변호사 이름만 스무 개가 넘는다.

그중 하나에

「형사소송전문

변호사 성만희」

라고 적혀있다.

똑똑똑.

“왜?”

“변호사님, 김인경 씨 오셨어요?”

“아, 그래? 들어오라고 해.”

“네.”

“아, 잠깐, 잠깐. 밑에 가서 스타벅스에서 아아 두 잔 시럽 달달하게 넣어서 사가지고 와.”

사소한 심부름에 어린 비서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성만희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방에서 나가지 않고 서성이자, 그제야 왜 안 나가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뭐해? 가서 안 사 오고.”

“카드를 주셔야···.”

“야이- 이 새끼야, 그냥 네 거로 사고 결재 올려. 그럼 되잖아. 뭘 그거 하나 시키는 데 법카를 달라고 해. 얼른 갔다 와, 목마르니까.”

“네.”

썩은 표정으로 비서가 나가고, 한껏 치장한 김인경이 들어오자 성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뽱~.”

“우리 젬마 여전하네.”

“예뻐?”

“신혼부부도 이혼시키겠어.”

까르르르-

별 시답지도 않은 농담에 자지러질 듯이 웃는 김인경. 성만희는 입꼬리가 귀에 걸린다.

“오빤, 왜 이렇게 웃겨.”

“웃겨?”

“웅. 웃겨.”

“내가 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내가 말했던가? 내가 변호사가 안 되었으면 아마 MC 같은 거 해도 잘했을 거라고.”

“잘 어울렸겠다. 오빠 카메라발도 잘 받잖아.”

“아는구나?”

“알지, 그럼. 우리 한때 같이 골프 많이 치러 다닐 때, 내가 오빠 사진 많이 찍어줬잖아.”

“아, 그때가 좋았는데.”

“오뽱.”

“왜?”

“근데 왜 요새 연락 안 해? 다른 년 생겼어?”

“다른 년은 무슨. 조금 바빴어.”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비서가 들어와 커피를 두고 나갔고, 성만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1억 2천 정도 어때?”

“그렇게나 많이? 그때 뒤탈 안 나는 합의는 3,000만 원에서 5,000만 원이라며?”

“이번에는 돈 좀 있는 놈을 무셨어.”

“진짜?”

“응. 알아보니까 신사동에 제 명의로 되어있는 아파트도 한 채 있고, 차도 BMW M6 몰고 다니더라고.”

“그렇게 부자였어?”

“몰랐어? 알고 만난 거 아니었어?”

“아니. 뭐 좀 돈은 있겠거니 했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지. 사실 알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어.”

“아무튼 돈이 좀 있는 집안의 놈이야.”

“근데, 그 사람도 변호사인데 괜찮겠어? 1억 2천이나 부르면 합의 쉽게 안 해주지 않을까? 아니, 벌써 가게 날 찾으러 왔다고 하더라고.”

“누가?”

“거기 로펌 밑에 있는 변호사가.”

“그래? 와서 뭐래?”

“내가 없으니까, 아마 그날 같이 간 가게 동생을 붙잡은 모양인데. 무고죄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협박했대, 신고한 거 취소하라고.”

“이 새끼들이, 그런 꼼수를 썼어? 그래서 뭐라고 그랬대?”

“아무 말 안 했지 뭐. 걔야 그날 그냥 1차만 하고 갔으니까. 근데 간이 콩알만 한 애라서 괜히 증인으로 불려가고 그러면 골치 아플 수도 있어. 나 사실 그날 걔한테 분위기 좋으면 할지도 모른다고 했거든.”

“입단속 시켜.”

“시키기는 했는데, 자꾸 겁난다고 하는 게 신경 쓰여.”

“말하면 가게 단속 들어가고 그러면 구속될 수 있다고 해. 그러면 되잖아.”

“걔 아직 2차 안 나가는 애야.”

“그래? 요새 그런 애도 있어?”

순간 성만희 얼굴에 더러운 욕정이 드리워진다.

“오빠 지금 걔가 누군지 물어보려고 그랬지?”

“아, 아니야. 너는 나를 어떻게 보고···. 근데 이름하고 연락처는 주고 가.”

“오빠아!”

“아니야. 주요 증인이라서 그런 거야. 걔가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안 되니까 그런 거지.”

“걔는 내가 알아서 할게. 오빠는 상대방 변호사나 잘 구워삶아.”

“야, 경아,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냐, 서울중앙지검 검사 출신이야. 안 그래도 이 사건 하늘이 돕고 있어.”

“왜?”

“오늘 담당 검사 배정됐는데, 내 후배 놈이야.”

“진짜?”

“내가 바로 전화때렸지. 주말에 공이나 치러 가자고.”

“아, 역시.”

“그러니까 그 애 입단속 잘하고, 잘 숨어있어. 야, 너 가게 나가는 거 아니지?”

“아니지. 오빠- 장사 원투데이 하는 거 아니잖아. 호호호”

---*---

며칠 뒤···.

“뭐? 얼마? 1억5천? 하- 미친···.”

대리를 맡아준 동기 변호사로부터 상대방 변호사가 제시한 합의 금액에 대해 들은 정도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아무래도 사기꾼 같기는 한데···. 어떡할래?”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 합의 안 해. 죽어도 안 해. 못해.”

억울한 마음에 친구한테 소리를 질러보지만, 상황이 참 엿 같다.

“너도 알겠지만, 이런 사건은 진짜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져.”

증거라고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밖에 없는 상황, 판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때, 법의 원칙은 피해자가 주장하는 혐의사실을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는 정도로 증명해야지만 법원은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는 정도’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에 있어 판사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고, 판사 개인의 가치관, 신념 등에 따라 그가 들고 있는 법의 저울은 시작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수도 있다.

“야, 나 진짜 억울해. 동의하에 한 성관계였다고!”

법의 현실을 잘 아는 변호사라도 막상 그러한 재판대에 심판을 받으러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도는 애꿎은 동기 녀석에게 신경질을 냈다.

동기도 안다, 정도의 심정을. 그래서 그저 다독여줄 뿐이다.

“믿어. 그런데 어쩌겠냐. 너도 봤잖아, 그날, 검사 표정. 합의 없으면, 기소할 거야.”

기소가 되면, 재판이 열릴 거고.

설사 공평한 판사를 만난다고 해도 명예가 실추될 것은 뻔했다.

정도는 <해결>에 피해가 갈까 봐, 조용히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다. 서지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늘 그렇듯이 그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줄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이런 일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막내 파트너도 연루시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변호를 맡은 동기가 증인진술서를 내자고 했으나, 반대했다. 그런 식으로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렇게 얘기해서 그렇지만, 만약에 싸울 거면, 전력을 다해야 해. 그 너희 펌 후배 진술서도 내야 하고, 피해자 뒷조사도 해야 하고. 10, 20년 전이면 몰라도 요새는 이런 사건 우습게 봤다가는 큰일 날 수가 있어. 그것도 싫으면 합의하는 수밖에.”

합의하면 기록이 없게 된다.

해당 경찰서와 검찰청에 신고 사실은 남겠지만, 전과나 다른 공식적인 기록은 남지 않는다.

“······.”

“세상 살다 보면 똥 밟아. 어쩌겠냐, 재수 없다고 생각해야지. 똥하고 싸울 수는 없잖아.”

“알았어. 생각해볼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1억 5천이라는 돈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억울함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고,

의사가 자기 병을 고칠 수 없듯,

변호사도 자기 사건은 해결할 수 없다.

떨쳐버릴 수 없는 패배감에 어깨가 무거워진 정도는 동기의 사무실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

<법무법인 해결>

똑똑똑.

동기 변호사 사무실에서 돌아온 정도는 막내 파트너의 방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려있었지만, 예의상 인기척을 냈다.

“김 변.”

“변호사님.”

“잠깐 시간 괜찮아?”

“네, 물론이죠.”

정도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하던 그는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했다.

“미안하게 됐어.”

“뭐가요?”

“괜히 나 때문에 지저분한 일에 꼬이게 됐고.”

“뭐가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아니, 그래도. 찝찝하잖아.”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상황이 좀 안 좋게 됐어. 아니, 안 좋게 될 것 같아. 느낌이 그래.”

정도는 몇 시간 전 동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아리는 상대방 변호사가 제시한 합의금 액수를 듣고 깜짝 놀랐다.

“1억 5천만 원이요?”

“쉿! 목소리 좀 낮추고.”

“죄송해요. 합의하시면 안 되죠.”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방금 또 전화가 왔어. 알아보니까, 상대방 변호사랑 담당 검사랑 선후배 사이라네.”

“그런 게 상관이 있나요?”

“다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찝찝하지. 특히 이런 케이스는···.”

“그럼 이제 어떡해요?”

“정말 미안한데. 혹시 증인진술서 하나 써줄 테야? 그냥 그날 있던 대로 적어주면 돼. 사실 진짜 이런 부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동기가 검사를 설득하려고 해도 뭐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물론이죠. 쓸게요. 원하시면 재판에 증인도 서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왜요?”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밝고 장난기 가득한 그였는데, 지금은 나락을 걷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동기 사무실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동기 녀석 말이 맞아. 똥이랑 싸울 수는 없지. 그러면 더 묻기만 하지. 에효.”

“네? 그럼 그냥 소송···.”

“아니. 조금 더 버텨보다가 합의하려고. 누굴 탓하겠어 내 눈깔이 병신이었는데, 그딴 쓰레기도 못 알아보고.”

이제는 촉촉하게 물기까지 차오른다.

얼마 만에 보는 남자의 눈물인가.

아리는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서 변호사님한테···.”

“절대. 선배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선배님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느니 그냥 1억5천 주고 말지 뭐. 차 팔면 돼. 흑흑.”

“변호사님···.”

“그러니까 김 변, 이건 그냥 죽을 때까지 우리끼리 비밀인 거야. 알았지?”

“···네.”

정도는 몰랐다. 사건에 대해 서지우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후에도 영원히 알지 못했다.

---*---

「형사소송전문

성만희 변호사」

늦은 밤, 성만희는 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오뽱.

“왜 이렇게 시끄러워? 설마 가게야?”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흘러나온다.

-아니. 그냥 좀 친구들하고 한잔하러.

“거- 합의될 때까지는 집에 좀 가만히 있지. 그새를 못 참아?”

-아- 왜~ 집에 계속 있었어. 너무 심심해서 오늘 처음 나온 거야~. 왜요?

“좋은 소식이야. 아까 상대방 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5천만 원에 합의하재.”

-안 돼, 오빠! 나 이미 새 차 계약했어. 5천만 원이라고 해봤자. 나한테는 2천 5백도 안 들어오잖아.

“걱정하지를 말아. 내가 이런 데는 선수야. 일단 카운터가 왔다는 게 벌써 저쪽에서 찌를 물었다는 거야. 걔 돈도 많고 이제는 줄다리기하면서 살살 당기기만 하면 돼.”

-그럼 오빠만 믿는다.

“믿어. 그때 말했던 것처럼 1억 2천 딱 맞춰서 받아내 줄 테니까.”

-알았어. 오뽜.

“그건 그렇고 오늘 건수가 있어서 너희 가게 가려고 하는데, 그때 말한 동생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오뽜, 잘 안 들린다. 그럼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끊어.

딸깍.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건 제 할 말만 하고···. 아이, 아쉽네. 그냥 들어가기 심심한데.”

똑똑똑.

“뭐야, 퇴근 안 한 거야? 왜?”

늘 불만 가득한 비서가 노크한 줄 알았는데, 웬 키 큰 젊은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세요?”

남자는 사무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만, 소파에 털썩 앉는다.

“누구냐니까?”

“앉아봐. 할 말이 좀 있으니까.”

“뭐야, 이건 또. 아! 잠깐, 너 낯이 익은데. 너···그 새끼 로펌 대표지? 맞지?”

“성만희 씨, 이리와 앉으시죠. 당신 미래에 관한 이야기니까.”

서지우가 서류철 하나를 탁자 위에 던지며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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