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33)

우리 식구를 건드리면 (1)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에 있는 한 골목.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아직 해가 걸려있는 듯했지만, 20층~30층이 넘는 건물들 사이에는 벌써 짙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네온사인들이 켜지고 고급 차량들이 들락날락한다.

최성태 사무장은 멀찌감치 차를 대놓고 편의점 안에서 골목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선배님, 그 아가씨가 현재 일하는 가게 상호가 역삼의 <라운딩>입니다. 소위 쩜오라고 불리는 술집이고요. 가게에서 쓰는 예명은 ‘젬마’라고 합니다.]

서지우의 부탁을 받은 최성태는 경찰청에 근무하는 잘 아는 후배에게 연락해 정보를 얻어냈다.

그 정도 정보는 서지우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부탁했다는 것은, 좀 더 신중한 방법으로 알아봐달라는 의미였기에 강남서 후배를 통하지 않고 청에 있는 후배에게 연락했다.

[사기 혐의로 피소된 적이 있는데,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는 바람에 수사가 종결된 사건이 있고요. 그리고 이건 우연히 찾아낸 건데, 1년 전인가 성폭행 피해자로 신고했다고 합의로 끝난 사건도 있습니다.]

속단할 수는 없었지만 구린 냄새가 진동했다.

그날 진짜로 성폭행을 당했다면, 아무리 ‘직장’이라고 해도 버젓이 술집에 나와서 희희낙락거리며 술을 따를 가능성이 희박했다.

집에 병든 노모라도 있지 않는 이상 말이다.

[주소가 부산, 수영구 남천동으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집을 나온 거 같고. 실거주지는 논현동의 W아파트입니다. 가족관계는 양부 모두 살아있고,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는 선생님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인 것 같습니다.]

최성태는 김인경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라운딩>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

“변호사님이 왜 여길···.”

---*---

석 달 전, 윤하에게 돈을 빌리려 했을 때, 그녀로부터 그녀가 일하는 가게의 상호를 들었다.

역삼역 근처에 있는 <라운딩>.

아리는 윤하를 만나기 위해 남장을 한 채 가게를 찾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도 앱에서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아리가 가게 입구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려 하자,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윤하 씨를 좀 만나러 왔는데요.”

“누구요?”

“윤하 씨요. 정윤하.”

남자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어딘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도 본명을 잘 쓰지 않았기에 남자는 정윤하가 누군지 몰랐고, 2~3분을 기다린 후에야 정윤하가 ‘하이디’라는 걸 알아낸 그는,

“어디서 오셨죠?”

좀 더 의심스러운 눈치로 아리를 바라봤다.

“좀 아는 사람인데요.”

그런 데를 가본 적이 없기에, 입구에서 이런 식으로 컷을 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혼자 오셨나요?”

“네.”

“약속은 잡고 오신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대응이 길어지자, 이제는 또 다른 남자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아리의 앞에서 섰다.

“무슨 일이야?”

“아니, 이 손님이 하이디를 찾아오셨다고 하는데, 약속도 없이 혼자 왔다고 하셔서요.”

“하이디면 송하 마담 밑에 있는 애잖아. 전화해 봐.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나중에 나온 남자는 첫 번째 남자보다 몇 살 위로 여유로워 보였지만, 인상은 훨씬 더 험악하다. 둘 다 자신을 쉽사리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찾아온 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은 아리는 그냥 돌아섰다.

바로 그때,

“전화를 하고 오는 건데, 제가 실수했네요. 그럼 윤하 씨에게 연락하고 찾아···.”

초록색 레인지로버 이보크가 아리 앞에 정차하더니만, 그 안에서 풀메이크업에 파티에 가는 것처럼 머리를 세팅한 정윤하가 내렸다.

“어! 변호사님이 여길 어떻게···.”

---*---

근처 커피숍.

“무슨 일이세요.”

직감적으로 인경이 벌인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윤하는 지레 겁을 먹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지만,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혹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니분한테 들으셨나요?”

“네? 아니, 저는 잘······.”

“둘이 같이 나오셨는데, 그날이 아니면 다음 날이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도 안 나누셨다고요?”

“언니가 아파서······.”

쭈뼛거리는 모습이 누가 봐도 대답을 회피하려는 모습.

그날 일을 목격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이렇게 대면하기 전까지는 100% 확신할 수 없었던 아리였지만, 안절부절못하는 윤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분명 무언가 숨기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가요?”

“그건 저도 잘······.”

“저기요, 윤하 씨.”

“···네.”

“무고는 심각한 범죄예요. ‘형법 제156조,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만약 김인경 씨가 지금 저희 선배님에게 사실이 아닌 허위로 성폭력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하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게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네? 저는 모르는 사실이에요.”

“만약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닉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아, 진짜 왜 그러세요! 지금 저 협박하러 오신 건가요? 저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협박하는 말투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제 발 저린 그녀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윤하 씨, 윤하 씨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어쩌다 보니까 이런 일을 하게는 됐지만, 거짓말로 남을 해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런 사람을 혐오하는 사람 아닌가요?”

“그쪽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요! 언니가 말한 것처럼, 그쪽도 내가 술집에서 일한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나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궁금한 게 있으면 언니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마치 그녀의 과거를 아는 듯한 눈빛.

따뜻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손.

순간 죄책감이 몰려온 윤하는 자신을 붙잡은 변호사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커피숍을 나왔다.

그길로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간 윤하는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인경에게 문자를 했다.

[윤하: 언니, 지금 방금 그 변호사가 가게로 찾아왔어요.]

[인경: 누구? 윤정도?]

[윤하: 아니요, 김아인 변호사님이요.]

[인경: 걔가 왜?]

[윤하: 무고죄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저더러 언니를 설득하라고···.]

[인경: 진짜? 널 협박했어? 야, 너 쓸데없는 말 안 했지?]

[윤하: 협박은 아닌데, 그냥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인경: 야! 너 쓸데없는 말 했어, 안 했어?]

[윤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진짜예요. 그냥 저는 잘 모른다고만···.]

[인경: 또 뭐래?]

[윤하: 그냥 그 말만 했어요. 그래서 저는 모른다고만 하고 가게로 들어와 버렸어요. 근데 언니 오늘도 가게 안 나와요?]

[인경: 성폭행 신고했는데 바로 나가기가 뭐해서.]

[윤하: 언니, 그냥 혼만 내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사과만 받으면 신고한 것 취소한다면서요. 변호사 오빠한테 연락 안 왔어요?]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알아보니 윤정도가 생각보다 돈이 많은 남자였다. 인경은 마음이 바뀌었다.

[인경: 이디야.]

[윤하: 네, 언니.]

[인경: 넌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알았지?]

[윤하: 언니, 왜 그래요? 무섭게.]

[인경: 무서울 거 없어. 혹시라도 검사가 부르면 너는 그냥 그날 이자카야에서 같이 술 먹은 거만 얘기하면 돼. 그 뒤에 나랑 얘기한 거는 모르는 얘기고. 알았지?]

[윤하: ···.]

[인경: 하이디.]

[윤하: ···네.]

[인경: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면 너도 큰일 나. 그러니까, 넌 조용히 있기만 하면 돼.]

[윤하: 언니, 어쩌려고요?]

[인경: 내가 아는 오빠 중에 이런 거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있어. 그 오빠가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넌 걱정할 거 없어. 아, 맞다. 그 오빠가 이런 것도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야, 나랑 톡하고 이거 톡한 거 다 삭제해. 알았지?]

[윤하: ······.]

[인경: 하이디!]

[윤하: 알았어요···.]

까톡을 끝낸 윤하는 좀 전보다 마음이 훨씬 더 무거워진다. 아리의 말대로 그녀는 남을 속여 등쳐먹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법무법인 해결>, 대표 변호사 사무실.

“김아인 변호사가 거길 찾아갔다고요?”

최성태의 보고를 들은 서지우는 ‘막내’ 파트너가 거기에 있었다는 말에 의아했다.

“네.”

“그래서 누굴 만났다고요?”

“정윤하라는 그곳 업소 아가씨인데 아마도 토요일 자리에 같이 있었던 여성인 듯합니다.”

“업소 여성인 것을 둘 다 숨겼다면서요?”

“네.”

“근데 거기를 어떻게 알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구하기 엄청 어려운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막 변호사 자격을 딴 신참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인의 소재지를 파악했다는 데에 대해 서지우는 살짝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혹시 둘이 한 얘기를 들을 수 있으셨나요?”

“가게가 작아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창가 쪽에 앉아서 입술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최성태 사무장, 독순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뭐라던가요?”

“설득을 하려던 것 같습니다.”

“설득?”

“네. 증인에게 솔직하게 말하라고 설득하면서 고소인 김인경도 설득하라고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

피식-

1년 차 변호사치고는 꽤 신속하게 증인을 만나서 고작 한다는 행동이 자수를 권하는 설득이라···.

저번에도 느꼈지만, 순진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증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술집 여자라고 무시하지 말라며 고함치고는 가게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쉽게 설득될 사람들은 애초에 남의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도 있는 허위 고소 따위는 하지 않는다.

무고는 악질의 범죄이다. 단순히 자신의 행위를 감추기 위해 방어적으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타인이 국가에 의해 형사처벌을 받도록 악의적으로 하는 거짓말이다.

“알겠어요. 김인경이라는 여자 사기 혐의로 피소된 적이 있다고요?”

“네. 5년 전 지인 여러 명에게 투자목적으로 돈을 빌린 적이 있었는데, 투자가 잘못되면서 사기로 형사 고소를 당했습니다. 재판까지 갔는데, 극적으로 합의가 돼서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합의가 되면서 검사가 기소를 취하하였습니다.”

“1년 전 성폭행 신고는요?”

“그건 남아있는 기록이 별로 없어서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지는 못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사건과 비슷한 상황인 것처럼 보입니다. 헌팅을 통해 만난 남자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를 했는데, 곧바로 합의를 보면서 검찰에 가기도 전에 사건 파일이 닫쳤습니다.”

그래서 기록이 별로 없는 거다.

“원하시면 제가 다른 루트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그건 서초서에 신고된 사건인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신, 당시 변호사를 알아봐 주세요. 1년 전에 성폭행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요?”

“네. 아마도 이번에도 같은 변호사가 사건을 대리할 것 같네요. 어떤 사람인지 알아주세요. 이름, 주소, 출신학교, 이력, 그리고 주로 어떤 사건들을 많이 하는지.”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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