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33)
  • 그걸 보지도 않고 사인하면 어떡해요

    “오라버니, 아니 작가님, 그걸 보지도 않고 사인하면 어떡해요?”

    “아니 나는 서지우 이놈이 이번 주 안에 계약 완료돼야 한다면서 당장 퀵을 보내느니 마느니 하길래, 진짜 급했나보다 생각했지.”

    “제가 온다고 했잖아요.”

    “그건 퀵이 온 다음에 들은 사실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서류인지 확인도 안 하고 사인을 하시면 어떻게요.”

    그날 이른 오후, 퀵으로 누군가가 어떤 계약서를 이중기 작가에게 보냈다.

    원래 서류에 사인을 잘 안 하는 사람이지만, 막상 사인할 때는 보지도 않고 해버리는 성격이다. 조금 전, 아리가 내민 계약서에 사인할 때도 본인 이름이 적힌 칸도 확인하지 않고 사인하려 했으니 말 다 하지 않았나.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아닌 서지우만을 믿는 것이었다.

    “나는 서지우 이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해서는, 퀵으로 계약서를 보내겠다고 했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퀵이 왔길래, 당연히 <해결>에서 보낸 거라고 생각해서···.”

    누가 보낸 건지, 어떤 계약서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사인해서 돌려보낸 것이었다.

    서지우는 대충 누가 보낸 것인지 느낌이 온다. 더 물어봤자 소용없다.

    -원본은 가지고 계십니까?

    스피커폰으로 상황을 듣고 있던 서지우가 물었다.

    “원본? 그런 걸 내가 가지고 있을 리가. 퀵을 다시 부르기 싫어서, 그냥 사인해서 들려 보냈어. 어떻게 부르는지도 모르고.”

    “혹시 퀵 하시는 분한테서 명함 같은 거 받으셨어요? 연락처나 이름이라도?”

    “그런 걸 내가 왜 받아. 쓸 일도 없는데.”

    아리는 나름대로 단서를 찾아보기 위해 애써보지만, 이미 누군지 추측한 서지우는 누가 보냈는지에 대해는 관심이 없었다.

    -계인하셨어요?

    계인했다면 원본 두 개가 모두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언제 그런 성가신 짓 하는 거 봤어. 같은 종이에 두 번 사인하기도 귀찮구먼.”

    이중기 작가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고 사인을 하기 때문에 계인을 하지 않는다 (성가셔서).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확인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네, 아주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 이 자식, 나 겁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무튼 이걸로 문제가 생기면, 저는 <영화사 청아>의 변호를 할 겁니다. 그것만 알고 계십시오.

    농담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 서지우가 아니다.

    “이 새끼가 어디 늙은이한테 협박을···.”

    뚜뚜뚜.

    “뭐야? 끊은 거야? 진짜 이놈이!”

    “할아버지, 저도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딜 가 술 먹다 말고.”

    “왠지 큰일이 난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 서지우 그놈이 다 해결할 거야.”

    신기하게 그를 믿는 사람은 다 그 사람이 해결한다고 한다.

    “저번에 제가 계약서에 잘못 사인해서 큰일 날 뻔했거든요.”

    “허허- 괜찮다니까.”

    “아무래도 이 계약서를 빨리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술은 다음에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진심 걱정하는 아리의 표정에 이중기는 술맛이 떨어졌다.

    “하— 그놈이 해결한다니까···. 알았어. 그럼 기다려봐.”

    이중기는 그가 급할 때 이용하는 콜택시를 번호를 눌렀다.

    ---*---

    그날 늦은 오후,

    이블린 스튜디오 대표실.

    이중기가 <영화사 청아>와 계약서 사인 직전이라는 정보를 들은 <이블린 스튜디오> 대표 허유나는 백방으로 이중기의 소재와 연락처를 찾았다.

    <법무법인 해결>이 이중기의 매니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해결>이 <영화사 청아>를 동시 대리하고 있다는 정보도 함께 들었기에, 허유나는 이중기 작가를 직접 컨택할 방법을 고민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러면 이게 효력이 있는 건가요?”

    급박한 상황.

    이중기의 번호를 알아냈지만, 받질 않았다.

    허유나의 보고를 받은 여혜린은 결단을 내렸다. 구애하는 간략한 친필 편지와 함께 ‘거절하기 힘든 액수’의 계약서 초안을 일단 춘천으로 보냈다. MJ 엔터테인먼트가 이중기 작가의 신작에 얼마나 큰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일종의 백지수표를 던지는 제스처였다.

    물론 이중기 작가가 바로 사인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저, <영화사 청아>와의 계약을 보류하게 할 작전이었을 뿐.

    그런데, 사인 된 계약서 원본 두 부가 보냈던 바로 그 퀵서비스를 통해 돌아온 것이었다.

    “이중기 작가 본인이 사인한 거라면 당연히 효력이 있습니다. 간인이나 계인이 되어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이 정도만으로 충분히 계약 체결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허유나의 질문에 여혜린의 개인비서이자, MJ 엔터테인먼트의 사내 비서인 차동균이 대답했다.

    “본인이 사인한 게 아니라면?”

    여혜린이 물었다.

    “제가 오기 전에 수소문에서 기존에 이중기 작가님이 사인한 계약서 사본을 구했습니다. 누군가 위조한 것이 아니라면, 계약서 사인은 이중기 작가님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차동균은 들고 있던 태블릿 PC에서 이중기 작가가 사인한 오래전 계약서 스캔 파일을 열어, 사인 부분을 확대했다.

    똑같다고 하지 못한다면 99% 비슷하다.

    “본인이 사인하기는 했지만, 내용을 읽지 않고 사인했다거나 무슨 이유에서였던 간에 제정신에 사인한 것이 아니라면?”

    “약관이 아니기에 내용을 읽지 않은 책임은 이중기 작가에 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한다면, 이중기 작가가 증명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그러면 정식으로 체결됐다고 간주해도 되는 거야?”

    “네. 다만···.”

    여혜린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전, 차동균이 단서를 단다.

    “다만 뭐?”

    “다만 아직 계약금을 지급한 것도 아니고, 우리 쪽에서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쪽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나오면 딱히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계약은 체결되었지만, 손해를 입은 것이 없기에, 해지해도 별수 없다는 의미였다.

    “우리가 손해를 입었다면?”

    “네?”

    “손해를 입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되지?”

    “그러면 계약 해지에 따르는 손해배상 청구를 구할 수도 있고, 계약이행을 청구해볼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법원에서 후자는 결정해 줄 확률이 높지는 않지만···.”

    “가처분은?”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손해가 생겼고 소를 청구 중인데 다른 영화사랑 계약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면, 가처분을 걸어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멈췄던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위로 올라간다. 이길 방법이 생각났다.

    “허 대표, 당장 기자들한테 전화 돌려. 내일 아침 기사로 <이블린 스튜디오>에서 이중기 작가님의 신작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를 제작하기로 계약 완료했다고 내보내. 그리고 바로 팀 구성하고 홍보 시작해. 계획 짤 시간 없어. 방금 차 비서 말 들었지? 손해를 입어야 한다는 말. 대대적으로 바로 홍보 돌리라고.”

    “네? 아, 네.”

    “그리고 <영화사 청아>에서 여도환한테 시나리오 돌렸다고 했지? 그리고 또 누구누구한테 연락했다고 했어?”

    “김은규 선생님하고 또···.”

    “다 알아내. 다 알아내서 우리가 하는 거라고 알려. 그리고 <청아> 제시금액보다 20%씩 올려 제안해. 바로 계약하겠다고 하면 바로 해도 좋아.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여혜린밖에 없었다.

    몇 시간 전에 찾아와 자기를 떠본 것이 그 증명이었다.

    이중기 작가와 통화를 마친 새벽, 서지우는 당장 여혜린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건 그녀의 공격에 당황했다는 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유명 포털 사이트 메인에 이중기 작가의 신작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를 <이블린 스튜디오>에서 제작하기로 했다고 기사들로 도배가 된 것을 본 서지우는 어젯밤 담판을 지을 걸 후회가 들었다.

    징징- 징징- 징징- 징징-

    “변호사님, <영화사 청아> 공국현 대표님이 계속 전화하시는데 어떡할까요?”

    분명 설명을 들었는데도, 쏟아지는 기사들에 불안한 모양.

    붙잡고 더 자세히 설명한들 의미가 없었다.

    서지우는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을 찾았다.

    ---*---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

    “이사님,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잠시 후, 비서의 안내를 받은 서지우가 이사실로 들어왔다. 대표 책상 뒤로 한강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이미 <영화사 청아>와 계약했다고 말했을 텐데.”

    “후훗. 그럼 계약서 있어?”

    서지우는 지난밤 아리가 허겁지겁 가지고 온 계약서를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렸다.

    “언제 사인한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제 내가 찾아갔을 때는 안 보여줘서.”

    “보여줄 의무가 없으니까.”

    “그럼 지금은 왜?”

    “그걸 몰라서 물어?”

    아침부터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으면서.

    “호호. 좋아. 근데 우리도 이 작가님이랑 체결한 계약서가 있는데.”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서랍에서 어제 오후 이중기가 사인한 뒤 퀵으로 돌려보냈다는 원본을 꺼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중계약인가?”

    서지우는 여혜린은 건넨 계약서를 훑어본다.

    “정말 이중계약을 한 거면 사기를 치신 거니까, 형사처벌까지 구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변호사님?”

    “착오 항변을 할 수도 있어.”

    착오 항변이란, 민법 제109조 1항에 규정된 권리로, 표의자의 의사표시에 법률행위 내용의 중요 부분 관련하여 착오가 있을 때 취소할 수 있는 법이다.

    즉, 이중기 작가가 진심 모르고 사인했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 민법 제109조에 의거하여 계약서를 무효화할 수 있다.

    “나도 들었어. 우리 변호사한테. 그거 증명하기 어렵다고 하던데. 그리고 중대 과실이 있다면 취소하기 힘들고, 특히나 지금처럼 우리가 이미 제삼자들과 계약을 한 상태라면···.”

    민법 제109조 2항, 「전항의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할 수도 있고.”

    “그거는 좀 그렇지 않아? 퀵서비스 증언도 있는데.”

    여혜린은 이미 법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를 검토한 상태였다.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아. 이 작품 나 달라고.”

    “작가님 죽어도 안 하실 거야.”

    “네가 설득해줘.”

    “왜 그래야 하지?”

    “안 그러면 사기로 형사처벌 받아야 하실 거니까. 설사 징역까지는 살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쌓아놓은 명성이······. 호호.”

    “어차피 MJ 이랑 한다면 똑같이 <청아>에서 고소할 거야.”

    “그것도 네가 막아줘. 들어보니까 해결사라는 별명이 있다며. 그러니까 네가 해결해줘.”

    “싫다면?”

    “현명하게 생각해. 괜히 우리 과거 개입시키기 말고. 우리 MJ 엔터야. 우리랑 싸우는 게 쉬울까, <청아> 같은 작은 제작사랑 싸우는 게 쉬울까? 어차피 계약금 받은 거 1억 원밖에 안 된다면서? 우리 오늘 아침에 홍보비로 나간 거만 1억이 넘어. 이미 캐스팅이랑 연출팀 계약도 끝낸 것들도 있고. 그리고 솔직히 작가님도 우리랑 하는 게 훨씬 더 나을걸?”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싸워도 <청아>가 쉽고, 설득도 <청아>가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서지우다.

    “좋아.”

    “동의하는 거야?”

    “이 계약서가 이중기 선생님이 사인한 계약서 원본인가?”

    “응. 안 그래도 두 부를 다 보내셨길래,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잘됐네.”

    “그럼 내가 가져가지.”

    서지우는 계약서 원본을 들고 여혜린의 사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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