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33)

이중기 작가님 신작, 나 줘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글은 잘 쓰고 계시나요?”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이중기의 목소리는 살짝 퉁명스러워도 짜증이 섞여 있지 않았다. 글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꾸 이런 식으로 독촉하면 더 글쓰기 싫어져.

“누군들 하고 싶나요. 어르신, 이참에 매니저를 구하시죠.”

-이 자식이, 누가 <해결>을 만들었는데···.

“제가 만들었는데요.”

-오호라, 이것 봐라, 고객도 하나 없는 허름한 사무실에 누가 이름도 지어주고 홍보도 해주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김앤강을 나와 작은 건물 코너에 로펌을 차렸을 때, 첫 고객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결>과 서지우의 능력에 대해 칭송해준 것도 사실이고.

그 인연이 이어져 지금의 독특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었다.

서지우와 이중기는 서로에게 있어 ‘행운의 부적’ 같은 의미였다.

“이황규 PD가 한번 찾아뵙고 싶답니다.”

-그 치가 연출할 건가?

“그렇다고 하네요.”

-어떤 친구야?

“만나서 직접 알아보시죠.”

-이 자식이, 잘나간다고 아주 배가 불렀어. 원고도 처음에는 지가 찾으러 오더느니만, 요새는 지 부하 놈을 보내고.

“부하가 아니라 파트너입니다.”

-파트너는 무슨. 부하지.

“이제 플랫폼 계약 완료되면 <청아> 대표님하고 직접 통화하세요. 정식 제작 들어가면 작가님 응석받아줄 수 시간 없습니다.”

이중기 작가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우면서도 짜증이 섞여 있지 않은 것처럼, 서지우의 말투 역시 매정한듯하면서도 얄밉지는 않다.

-흥, 그럼 그때까지 받아주면 되겠네.

“이번 주 안으로 계약 완료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윤 변호사가 가지고 간 계약서에는 왜 사인 안 하셨던 건데요?

다른 업계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정식계약서 체결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꽤 흔하다.

최근 들어 실태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모 유명감독이 촬영 시작 전 스태프들과 고용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마치 대단한 일인 것처럼 기사화될 정도니 뭐.

물론 이중기 작가가 계약서 사인을 미루는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네놈 괴롭히려고.

“계약서 사인 안 했다고 언제든지 발 뺄 수 있는 거 아닙니다. 구두 계약도···.”

-됐고. 이번 주 안에 계약 완료될 거라고? 그럼, 사람 보내.

“왜요?”

-왜긴 왜야? 방금 네가 계약서 사인하라며.

“윤 변이 계약서 드리고 왔잖아요. 그거 쓰시면 돼요.”

-어디에다 뒀는지 몰라.

“어르신, 그거 유출되면···.”

-니들도 내 원고 잃어버렸잖아. 나도 잃어버렸다. 왜? 니들은 잃어버려도 되고 나는 잃어버리면 안 돼. 잔말 말고 사람 보내라면 보내.

“그럼 오늘 퀵으로 보내드릴게요.”

-안돼!

“왜요?”

-그때 그 친구 보내.

“누구요?”

-왜 그때 정도 그놈이랑 같이 왔던, 니네 사무실 새로 들어왔다던 그 막내 변호사 있잖아.

김아인?

-오늘 그놈한테 들려 보내. 내가 바로 사인해줄 테니까.

“안 돼요.”

-왜 안 돼?

“작가님만 바쁘신 거 아닙니다. 우리 변호사들도 바쁩니다. 놀아드릴 시간 없어요. 그리고 오늘 오라고 당장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게 진짜···. 야, 너 자꾸 이렇게 나올 거야? 너 내 원고 잃어버린 거로 고소할 거야. 잔말 말고 보내. 내가 그 친구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무슨 할 말이요?”

-둘만의 비밀이야. 알려고 들지 말아. 다쳐. 아, 그리고 올 때 술하고 안줏거리 좀 사서 같이 들려보네. 그때 사 온 편육 맛있더라. 알았지? 오늘···알았어, 그럼, 내일 보네.

딸깍.

자기 할 말을 끝낸 이중기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서지우의 전화를 멋대로 끊고도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지구상의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다시 걸려던 서지우는 그만둔다. 그와 말씨름을 하느니 차라리 김아인을 보내는 게 속 편하다.

---*---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여느 날처럼 에스프레소를 내리러 들어왔다가 정도는 아리와 마주쳤다.

“굿모닝.”

“안녕하세요.”

“집안일은? 잘 해결했어?”

“네.”

분위기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목소리가 달라진 게 진짜 잘 해결됐나 보네. 다행이네.”

“네. 헤헤.”

“어제까지만 해도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더니···. 의외로 훌훌 잘 털고 일어나는 타입인가 봐?”

“네. 오뚜기에요.”

마음을 완전히 고쳐먹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제대로 해볼 생각이다.

언제까지 엄마와 오빠 원망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설사 지금 이 모습이 가짜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그녀 인생의 전부였다.

“변호사님, 며칠 전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런 건 법전에도 안 나와 있던데.”

“법전? 하하하. 그런 건 법전에 안 나오지.”

“그러면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요?”

“경험.”

“경험이요?”

“경험치를 쌓는 수밖에 없어.”

“아- 그럼 경험치를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뭐야? 갑자기 열의가 대단해졌는데? 오케이, 이렇게 열심히 하려는 후배의 열정을 선배가 무시할 수는 없지. 내가 대표님 밑에서 일 배우기 시작할 때, 주의할 사항이라든가 꼼꼼히 챙겨봐야 하는 같은 걸 적어놓은 게 있거든, 내가 김 변한테 그걸 줄게.”

“감사합니다!”

“그거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니야. 최신일 변호사한테도 주지 않은···.”

“뭘 주지 않아?”

“어, 대표님 오셨어요?”

때마침, 정도와 아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휴게실 안으로 서지우가 들어왔다.

“지금 출근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정도는 처음보다 훨씬 편해졌지만, 서지우는 여전히 어렵다. 순간 긴장한 아리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인사하자, 두 선배는 ‘얘가 왜 이러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곤 대화를 이어갔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응. 최 변은 잘 들어갔고?”

“네, 잘 들어갔답니다.”

“아, 그리고 어제는 잘 마셨습니다. 많이 나왔을 것 같은데···.”

샴페인만 30병. 진짜 많이 나왔다.

“열심히 일해서 보답해.”

“넵, 그러겠습니다!”

친한 동생이자 후배와 가벼운 아침 인사를 나눈 서지우는 커피를 들고 나가며 ‘막내’ 파트너를 불렀다.

“김 변호사.”

“네?”

“잠깐 내 방에서 볼까?”

예상하지 못한 호출에 눈이 동그래진 아리는 정도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서지우를 따라 그의 방으로 갔다.

---

“집안일은 잘 해결했고?”

“네, 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서지우도 느꼈다. ‘막내’ 변호사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마음에 든다. 이제야말로 일할 마음가짐이 된 것 같다.

“전에 윤 변이랑 춘천에 갔을 때, 이중기 작가님하고 무슨 얘기를 했지?”

“이런저런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무슨 영화나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주로 했습니다. 아, 만화도요.”

“그래?”

“네.”

“뭔지 모르겠지만, 작가님이 김 변호사가 마음에 든 모양인가 봐.”

“제가 원래 나이 드신 분들하고 소통을 잘합니다. 전에 샵에 있을 때도···.”

“샵?”

웁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변호사 되기 전에, 맞다, 학창 시절에 잠깐 샵에서 알바한 적이 있었거든요.”

“샵?”

“네?”

“샵이 뭐지?”

“아- 헤어샵이요.”

“헤어샵에서 알바를 했다고?”

“예. 잠깐, 아주 잠깐.”

서지우는 그제야 김아리의 헤어스타일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매우 스타일리시하다. 자기보다 짧은 머리칼들이 단정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게 정돈되어 있다.

“그래서 그랬네.”

“네?”

“헤어스타일이 멋지다고.”

“아,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헤어스타일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피식-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자꾸만 피식하게 만든다. 말투에 확실히 뭔가 이상한 게 있다.

“아무튼 이중기 작가님은 김 변이 마음에 든 것 같으니까, 김 변이 계약서 좀 들고 찾아뵈어야겠어.”

“넵, 알겠습니다.”

“오늘 당장 오라는 걸 내가 내일 내려간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유 과장한테 말하면 차량 준비해줄 거야.”

“넵, 알겠습니다!”

“김 변.”

“네.”

“마음가짐이 바뀐 건 좋은데, 말투까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넵, 알겠···어요.”

“그리고 갈 때 저번처럼 술 사가지고 가야 할 거야. 그때 편육을 사 갔다면서?”

“네. 그 편육 진짜 맛있었어요! 남 차장님이 시장에서 사 오셨다고 했는데, 진짜 맛있었어요. 안 그래도 저도 방금 생각났는데. 할아버지, 아니 작가님이 그거 사 오래요?”

할아···버지? 설마 이중기 작가님을 그렇게 부르는 거? 뭐지 얘는?

말투를 바꾸라고 했더니, 일 초 만에 군인에서 소녀가 되었다.

“변호사님.”

“?”

“아까 작가님이 오늘 내려오라고 하셨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그냥 오늘 내려가면 안 될까요?”

“···.”

“급한 일이 없으면···요?”

이 업계에서 똘기 있는 다양한 군상들을 만나봤지만, 얘도 만만치 않은 물건 같다.

그래서 어르신이 단박에 빠지신 건가?

“김 변호사, 내가 충고 하나 할까? 작가님하고 친해지는 건 좋은데, 어르신하고 술 먹을 때 조심해.”

“조심하라고요? 뭘 조심···?”

술에 취해 경계심이 풀어져서 사정을 털어놓으면, 그 노인네는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가 언젠가는 자기 글에 쓰니까.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도 그렇게 나온 작품이니까.

“말조심하라고.”

---*---

그날 오후.

춘천, 이중기가 머무는 암자.

“작가님, 저 왔어요!”

“왔어? 술은?”

“사가지고 왔죠.”

“얼마나?”

“좀 많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중간에 떨어지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세 짝 사 왔어요.”

“껄껄껄. 잘했어, 잘했어. 편육은?”

“당연히! 사 왔죠.”

이중기는 십년지기가 찾아온 것처럼 아리를 반겼다.

“오늘도 나랑 밤새워 마셔줄 거지?”

“네, 대표님 허락받고 왔어요.”

“흥. 그놈의 시끼. 이제 머리 좀 컸다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고 말이야.”

“아 또 왜 그러세요. 제가 왔잖아요.”

“진짜 자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해결>하고 연을 끊으려고 했어. 어디 감히 내 원고를 맘대로 갈취해서 잃어버리고 있어.”

“자꾸 그렇게 화만 내실 거예요? 술 안 드실 거예요?”

“먹어야지, 먹어야지. 드루와, 드루와.”

“네.”

“아-참, 근데 마시기 전에 이건 좀 한번 읽어봐 줘.”

“뭔데요?”

“그날 자네랑 술 마시고 영감이 확 와서, 5회차에서 8회차까지 단숨에 써냈거든. 취하기 전에 이것부터 한번 봐주라고.”

“넵, 알겠습니다. 그럼 영광으로 생각하고 첫 독자가 되겠습니다. 혹시 읽고 감평 해도 되나요?”

“예끼, 어딜 대문호의 글을···.”

“농담이죠. 그래도 한잔 마시면서 읽어도 될까요?”

“그건 오케이지. 내가 고집이 세도 그런 유도리는 있지. 자, 받으시게~.”

---*---

늦은 밤, 법무법인 해결 사무실.

서지우가 홀로 일하고 있는 그 안으로 한 여성이 들어왔다.

또각또각.

그녀의 하이힐 굽이 조용한 공간에 청아한 소리를 낸다.

“그렇게 소매 걷어붙이고 야근하고 있는 남자는 언제봐도 섹시하단 말이야.”

여혜린이다.

“무슨 일이야?”

그녀의 용건이 궁금해서 한 질문이 아니다. 그저 왜 왔냐는 의미였을 뿐.

그렇다고 말투가 공격인 것도 아니다. 단지, 성가신 일을 만들러 왔으면 도로 나가달라는 의미였을 뿐.

근데 왠지 성가신 일을 만들러 온 느낌이다.

“이중기 작가님 신작. 나 줘.”

그리고 그런 서지우의 느낌은 적중했다.

사실, 이혼 후 근 7년 만에 나타났을 때부터 감지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 거라는 걸.

그녀와 자지 말았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