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브레이커
<영화사 청아>는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잘나가던 프로듀서 공국현이 차린 제작사로 옛 명성에 기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 예산 예술 영화들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꾸준히 수상은 하고 있었지만 늘 제작비에 허덕였고, 당장 다음 작품 투자자를 구하지 못하면 회사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 작품이 기회야. 이거 망치면 진짜 끝이 될지도 몰라.”
그때 만난 작품이 이중기 작가의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제)’였다.
비록 그들의 주특기인 영화가 아닌 TV 드라마이지만, 공국현은 사비를 털어 넣을 정도로 작품에 사활을 걸었다.
“김은규 선생님 캐스팅은 어떻게 되고 있어?”
“스케줄 확인하고 있는데요. 다음 작품 계약된 거는 없다고 하세요.”
“그럼 박정혜 팀장 설득해서 바로 픽스하자고 해. 김은규 선생님은 무조건이야. 주인공만큼 중요해.”
“네.”
“여도환은?”
“저번 주에 시놉이랑 1회차 시나리오 전달했고, 답변 기다리고 있어요.”
“느낌이 어때?”
“그냥 느낌인데, 요새 워낙 잘나가서, 현재 대한민국을 돌아다니는 시나리오는 다 거기로 들어가니까···.”
“안 될 것 같다?”
“자, 그럼 차선책은?”
“이세림 배우 차기작 스케줄만 이성환 이사님한테 슬쩍 물어본 상태예요.”
“뭐래?”
“보고 있는 작품은 있는데, 아직 정해지지 않았대요.”
고민이다. 여도환으로부터 답변을 듣기 전에 섣불리 다음 배우한테 작품을 돌렸다가 나중에 뒷말이라도 나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이 바닥은 계약서 찍기 전에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고, 계약서를 찍어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알았어. 이성환 이사는 내가 한번 만나볼게. 조 팀장은 여도환 쪽 좀 계속 푸시해봐. 여도환만 잡을 수 있으면 시작부터 마케팅 반은 성공하고 들어가는 거니까.”
“네, 알겠어요.”
“아, 넷플릭스 계약서는?”
“<해결>에서 받은 조언대로 넷플릭스에 조항 몇 개 수정 요청했는데, 그쪽에서 또 뭘 요청해와서, 추가로 검토해달라고 어제 <해결>에 보냈어요. 회신 기다리는 중이에요.”
“빨리 해. 그게 제일 중요해.”
“회의 끝나고 전화해서 재촉할게요.”
“조 팀장아, 이거 못 띄우면 나랑 우리 가족 다 길거리에 나앉는다. 명심해라.”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열심히 하고 있어요.”
“더 열심히 해. 너는 집 담보로 대출까지 하지는 않았잖아.”
“그러니까, 대표님이 더 열심히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이미 피똥 쌀 만큼하고 있거든요.”
“저는 그만큼은···.”
“저게 진짜. 야, 나가. 나가, 일해.”
“알겠슴다아-.”
“아. 조 팀장아, <해결>의 서 변호사님하고 통화할 때, 이 작가님 상황 좀 슬쩍 물어봐. 집필하실 때 민감해하시는 거는 아는데, 이황규 PD가 한번 찾아뵙고 싶어 한다고 하면서, 언제가 좋을지.”
“네, 알겠습니다.”
---*---
조선 팰리스 호텔, 33F.
조용히 방문을 닫고 스위트룸을 나가려는 찰나, 양복 안주머니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징징- 징징-
<영화사 청아>의 조신애 팀장이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검토해서 그쪽 오프닝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중기 작가님은 요새 어떠신가요?
넷플릭스 계약서 검토 상황을 문의한 조신애 팀장은 이중기 작가에 관해 물었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연출로 내정된 이황규 PD가 한번 찾아뵐 수 없겠냐는 질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여쭤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변호사님.
딸깍.
재촉하는 투는 아니었지만, 급한 마음이 느껴지는 통화.
서지우는 바로 춘천에 있는 이중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질 않는다.
서지우는 전화 달라는 문자를 보내고 다시 문으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이번에도 그렇게 도망가게요?”
방문이 열리고 어젯밤을 같이 보낸 여인이 나왔다.
175cm, 34-23-34, 54kg.
캔디스 스와네포엘과 같은 몸매.
몇 달 전 본 몸이다.
“자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나가지 않고 밖에서 통화를 한 건 일부러 나를 깨우려고 한 건가?”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랬다면 미안한데.”
“그럼 사과해요.”
그녀는 요염한 걸음으로 서지우에게 다가갔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그를 구해주는 전화 따위는 오지 않는다.
“말했죠? 난 모닝 섹스 없이는 안 보내준다고. 한번은 도망갔지만, 오늘은···.”
---*---
[최신일: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윤정도: 응. 최 변은? 여친한테 안 혼났어? 전화 무지하게 오더만.]
[최신일: 자기 전에 화상 통화해서 많이 풀렸어요. 근데, 어제는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젯밤, 정도는 미국으로 떠나는 최신일을 위해 개인적으로 마지막 환송회를 열었다.
원래 계획은 <해결> 옛 멤버들만의 조촐한(?) 회동을 위해 (플러스 개인적으로 ‘운명 같은 만남’을 기대하고) 마련한 자리였는데, 졸지에 무슨 셀렙 파티가 되어버렸다.
서지우가 내뿜는 폐왕색에 당시 클럽에 있는 여자들이 그들의 VIP룸으로 몰려들었고, 한번 들어온 여성들은 도무지 나가지를 않는 바람에 시큐리티까지 출동해야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최신일: 근데 그 마지막에 온 여자는 우리 회사에 이력서 넣었던 여자 변호사 아닌가요? 한소희인가?]
[윤정도: 맞아. 아, 무섭더라. 거기까지 찾아올 줄 몰랐네.]
[최신일: 우연이 아니었어요?]
[윤정도: 말은 그렇게 하는데, 아닌 거 같아. 클럽에 혼자 오는 여자가 어디 있어?]
[최신일: 그럼 어떻게 알고···?]
[윤정도: 사실 거기 형부랑 나랑 친한 동기거든. 그놈이 오늘 한잔하자고 해서 내가 오늘 여기 온다고 말했어. 근데, 그 여자가 나타난 거야. 냄새가 나.]
[최신일: 근데 거길 왜 온 걸까요?]
[윤정도: 도대체 그걸 나도 모르겠어. 처음에는 나도 그냥 온 줄 알았다. 근데···.]
[최신일: 서 변호사님 옆에서 떠나질 않던데요.]
[윤정도: 내 말이.]
[최신일: 말은 사납게 하면서도 서 변호사님한테 약간 엉기는 것 같기도 하고···.]
[윤정도: 최 변도 그렇게 느꼈어? 나는 순간 그 여자가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잖아.]
분을 이기지 못한 한소희는 그 자리에 따지러 갔다.
도대체 왜 자기한테 면접 기회조차 주지 않았느냐고 물으러 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 서지우의 폐왕색에 이성을 잃어버렸다.
[최신일: 근데 원래 클럽에서 VIP룸 잡으면 그렇게 여자들이 들어와서 안 나가는 건가요?]
[윤정도: 응? 어제가 좀 특별하기는 했지. 어제 우리가 다들 좀 괜찮았잖아. 쓰리 핸섬 로이어즈.]
[최신일: 그런 것보다도 서 변호사님 때문인 거 같던데. 중간에 가시고 나서 좍 빠졌잖아요.]
[윤정도: 아니야. 시간이 원래 그때 빠질 타이밍이야.]
[최신일: 아아- 근데 서 변호사님은 그러면 중간에 가신 건가요? ]
[윤정도: 응. 그런 거 같아. 시끄럽고 그런 데를 별로 좋아하시지는 않으셔.]
[최신일: 설마 그 여자 변호사님하고 나간 거는 아니겠죠?]
[윤정도: 누구? 한소희? 아니야. 그럴 리가. 에이, 설마···.]
빠르게 오고 가던 문자들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흐른다.
서지우가 사라지고 잠시 뒤 한소희도 사라졌다.
(한소희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다 사라졌지만···.)
[최신일: 아무튼 어제 잘 마셨습니다. 어제 우리가 샴페인을 몇 병이나 시킨 거예요?]
[윤정도: 몰라. 엄청 시켰을걸.]
[최신일: 변호사님도 모르세요?]
[윤정도: 응.]
[최신일: 그럼 누가···?]
[윤정도: 계산했냐고? 대표님이.]
---*---
그래서 서지우는 클럽을 피한다.
가뜩이나 호르몬 충만한 젊은 피들이 모이는 곳인데, 삭제 능력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발동하기 시작하면 꼭 문제가 생긴다.
어제는 얌전한 편이었다.
여자들만 꼬이는 거는 문제도 아니다. 그 여자들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성가셔진다.
그나마 한국은 총이 없어 다행이지, 라스베가스에서는 정말 죽을 뻔했다.
징징-
[서 변호사님, 한소희예요.]
징징- 징징-
[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어요.]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은데, 문자 확인하시면 연락주세요.]
징징-
[기다릴게요.]
어제도 사실 큰일 날뻔했다.
한소희가 나타났고, 삭제 능력을 두 번이나 쓴 상황에서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그랬다면 아마 조금 전 호텔 방에 마주친 사람이 그녀였을 수도.
휴-
평소 긴장하는 일이 별로 없는 그였지만,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진다.
사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섹슈얼리티 해소 룰 No.4 – 한번 관계를 맺었던 여성과는 절대 두 번 관계를 맺지 않는다’를 깰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잠시 VIP룸을 나온 서지우는 계단에서 몇 개월 전 논현 바(bar)에서 만났던 한국 투자회사에 파견 나와 있는 미국교포 여성을 마주치게 됐고, 그렇게 그녀와 함께 클럽을 나오게 된 것이었다.
징징-
[잘 도망 다녀요. 다음번에 또 우연히 마주치면 운명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면 차라리 약속을 잡고 만나는 거는 어때?]
[운명을 피하려고?]
[운명은 만드는 거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주의라서.]
[생각보다 많이 못된 남자네. 싫어요. 나는 로맨티시스트라서.]
[좋을 대로.]
[씨유 레이터, 바람둥이 변호사님.]
[굿바이, 레이철.]
아무리 멋진 여자고 멋진 하룻밤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룰 No. 1’까지 깰 마음은 없다.
그냥 예의를 갖췄을 뿐.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글은 잘 쓰고 계시나요?”
---*---
오빠 여혜성과 함께 아버지 여정남을 몰아낸 여혜린은 약속대로 MJ 그룹의 엔터테인먼트 계열사인 ‘MJ 엔터테인먼트 컴퍼니’를 받아냈다.
그녀의 오랜 염원이었다.
‘MJ 엔터테인먼트’의 컨트롤을 얻자마자, 그녀는 그동안 아버지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아 진행할 수 없는 계획을 서둘러 실행해 나섰고, 그중 가장 큰 프로젝트는 국산 OTT 플랫폼 런칭이었다.
“런칭 라인업을 봤는데, 뭔가 부족해. 좀 더 확 당기는 작품 없어?”
MJ 엔터테인먼트 산하의 주력 제작사, <이블린 스튜디오>를 찾은 여혜린은 OTT 플랫폼 런칭과 함께 당당하게 내걸 수 있는 오리지널 작품을 찾았다.
“요새 돌아다니는 시나리오 중에 좋은 거 없어? 고만고만한 거 말고 구독자들을 확 당겨올 만한 거.”
여혜린의 재촉에 <이블린 스튜디오> 대표 허유나는 책상에서 프린트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사님, 이게 지금 도환이한테 들어온 작품인데, 진짜 괜찮더라고요.”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누가 하는 건데?”
“<영화사 청아>에서 준비하는 작품인데, 소문에는 현재 넷플릭스하고 계약 얘기 오고 가고 있다고 해요.”
“오고 가고 있다는 말은 확정된 게 아니라는 거네?”
“네, 아직 확정된 거는 아닌 것 같아요.”
“진짜 괜찮아?”
“네. 진짜 캐스팅만 잘 되면 초대박 스멜.”
“그래?”
“그럼 빼앗아와야지. 작가 누구야?”
허유나의 극찬에 여혜린의 눈이 반짝인다.
“이중기 선생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