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33)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 (4)

변호사와 의뢰인의 공적인 관계는 위임장 혹은 위임계약서 체결부터 시작된다.

변호사는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위임장 혹은 위임계약서 사본을 상대방에게 제공하여 권한을 위임받았음을 증명하고,

소송 시에는 법원에 제출하여 소송대리인(형사소송일 시에는 변호인)의 자격을 인정받게 된다.

“법원에 확인해봤어?”

“네, 법원 기록에도 서명날인이 되어있지 않다고 하는데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문서를 삭제하게 되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일들이 벌어진다.

“그럼 법원 잘못이잖아?”

“그렇기는 한데······.”

책임소재 문제가 생긴다.

법원에 체결되지 않은 위임장을 제출했는데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럼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일차적으로는 제출된 서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법원의 잘못이다.

그렇다고 상대방 변호사에게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 역시 기록을 제대로 확인해야 의무가 있으니까.

또한, 체결되지 않은 위임장을 제출한 변호사(지금 상황에서는 <해결>)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단순한 착오 아니야? 지금이라도 법원이 상대방 변호사한테 제대로 된 위임장 제출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상대방 변호사가 <해결>이라는 로펌인데, 자기네는 의뢰인으로부터 정식 위임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법원에 그쪽 로펌 직인이 찍힌 서류들이 제출되었다며?”

“제출되기는 했는데, 사실 첫 기일 열리기 전에 합의로 종결하겠다고 양측이 소송을 중지시켜놓은 상태라서.”

그래서 삭제했다.

기일이 진행되기 전에 멈춰놓은 소송이라, 설사 책임소재를 두고 문제가 생겨도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이기에.

“그래도 이 정도면 표현대리 아니야?”

「민법 제125조 - (대리권수여의 표시에 의한 표현대리) 제삼자에 대하여 타인에게 대리권을 수여함을 표시한 자는 그 대리권 범위내에서 행한 그 타인과 그 제삼자 간의 법률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제삼자가 대리권 없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즉, 표현대리란, 대리권을 수여한 것처럼 행동한 한 사람은 설사 실제 대리권을 준 사실이 없어서도 법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법리이다.

“저희가 상대방 의뢰인하고 직접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표현대리를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직접 이야기한 적도 없고, 위임장도 제대로 확인 안 했는데, 이 변호사는 도대체 뭘 믿고 <해결>을 대리인이라고 간주한 거야?”

“그건 저도 잘······.”

단순하지만 심각한 문제.

아니,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 있는 사안이다.

권한이 없는 로펌과 합의서를 체결한 것이니까.

게다가 법원의 과실(?)도 연결되어 있다.

이제 사건은 단순히 한소희 변호사와 광현의 IP 파트너 변호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니어 파트너의 관심을 끌었다.

“가서 이 변호사한테 전해. 판사한테서 연락 왔는데, 웬만하면 양측이 합의로 종결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어느 조직이나 과실이 발생한 사안은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덮고 가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예, 알겠습니다.”

---*---

법무법인 광현, 회의실.

IP팀 이세훈 파트너 변호사와 한소희 변호사가 서지우를 맞이했다.

얼굴이 좋지 않다.

서지우는 그들의 표정에서 지난 24시간이 꽤 혼란스러웠음을 곧바로 짐작했다.

“솔직히 어떻게 날인도 안 된 위임장을 확인도 안 하고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해결>에게 수권이 있었다는 건 변호사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위임장의 사인만 기억에서 삭제되었을 뿐, 서지우가 무명 작곡가를 대리하여 이메일을 주고받고 협의한 내용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세훈은 그것들을 바탕으로 한 번 더 주장을 펼쳤다.

“아니요. 저희도 임시적인 권한을 받아 협의만 했을 뿐, 합의를 체결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사인이 된 위임장은 아니었지만, 원고를 대리해서 위임장하고 다른 서류를 제출한 것도 <해결> 아닙니까?”

“저희 권한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찌 됐건 위임장에 원고의 사인이 없습니다. 광현은 수권과 관련해서 한 번도 원고가 확인한 적도 없고.”

표현대리 주장을 할 수 없다는 의미.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희가 <해결>을 상대로 소송할 수도 있습니다.”

“하시죠.”

할 수 있다. 체결된 위임장은 없었지만,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부분이 있으니까.

다만···.

“근데, 법원이 좋아할까요?”

좋아할 이유가 없다. 이 분쟁이 소송으로 가면 법원의 과실이 드러날 테니까.

“법원하고는 상관없죠.”

조용히 있던 한소희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이세훈이 재빨리 그녀를 째려본다. 아마도 들어오기 전, 말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있으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다.

“광현은 우리한테 직접 위임장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지고 계신 빈 위임장은 법원을 통해서 받으신 거죠. 법원이 상관없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였어요. 어찌 됐건 그쪽 변호사가 와서 마치 권한이 있는 것처럼 합의서에 사인을 한 건 사실이니까요.”

“‘마치 권한이 있는 것처럼’은 실제 권한이 있는 거랑은 엄연히 다르죠.”

“제 말은 합의서에 사인을 했다는 겁니다!”

파트너 변호사가 계속 눈짓을 주는 대도 한소희는 멈추지 않는다.

“그쪽이 바꿔치기한 합의서에 사인을 했죠. 우리는 동의한 적이 없는.”

“자꾸 말도 안 되는 혐의를 제기하시는데, 증명하실 수 있나요?”

“그러는 한 변호사는 증명할 수 있나요?”

“뭘 말이죠? 이렇게 합의서에 사인을 증거가 명확한데.”

한소희는 서류철에서 광현이 보유하고 있는 합의서 원본을 서지우 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서지우는 그것이 원본임을 확인한 뒤, 좌아악-

“서 변호사!”

“뭐 하는 짓이에요?”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찢어버렸다.

이제 세상에 원본은 없다.

“정말 황당하네요. 지금 설마 증거를 없애려고 그러신 건가요? 제정신이에요? 당연히 사본을 만들어놓았고, 스캔본은 <해결>의 이메일로 보내놓은 기록도 남아있거든요.”

만약 이 뻔뻔한 여자가 끝까지 가려 한다면, 이제 서지우는 <해결> 사무실에 있는 원본의 서명날인만 지우면 된다.

(다만, 그렇게까지 하면 부작용이 조금 걱정되지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짓으로 체결된 서류였으니까.”

“뭐라고요? 아니 어떻게 이런 사람이 변호사가···.”

서지우는 방방 뛰는 한소희를 무시하고 이세훈에게 말했다.

“만약 이 사안으로 끝까지 가실 거라면 소송해야 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광현이 치졸한 방법으로 합의서를 바꿔치기해서 체결했다는 사실도 공론화될 거고요. 그리고 수권 논쟁은, 솔직히 광현 같은 대형 로펌에서 상대방 위임장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광현이 왜 김앤강 아니 그보다도 변호사 수가 적은 세운에게도 밀리는 방증이 되지 않을까요?”

“······.”

“원하면 한번 해보시죠? 저희는 이런 싸움 환영하니까.”

끄응.

이세훈은 싸울 마음이 없다.

이미 시니어 레벨에서 로펌 이미지와 법원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조용히 해결하라고 명령이 떨어진 사안이다.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밀어 붙여봤지만, 상대는 이미 이쪽 수를 꿰뚫어 보고 왔다.

“흥. 그런 식의 협박에 우리 로펌이···.”

“한 변은 조용히 있어! 뭘 잘했다고 자꾸 나서!”

참을 만큼 참은 이세훈이 소리쳤다.

그도 알고 있었다. 한소희가 합의서를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을.

“서 변호사님, 그러면 원래 합의한 조항대로 진행하면 없던 일로 하고 종결하실 의향은 있으신 건가요?”

“지금 오늘 이 자리에서 합의서를 체결한다면.”

“새 위임장을 가지고 오셨나요?”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왔다.

“네, 물론이죠.”

서지우는 가방에서 오늘 아침 의뢰인으로부터 새로이 서명날인을 받은 위임장을 꺼냈다.

---*---

법무법인 해결, 대표변호사 사무실.

광현에서 돌아온 서지우가 책상에 앉기가 무섭게 정도가 따라 들어왔다.

“어떻게 됐나요?”

서지우는 대답 대신 새롭게 체결한 합의서 원본을 그에게 내밀었다. 기존에 동의한 조항대로 작성된 합의서이다.

“오- 해결하셨네요? 그쪽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거면 됐지. 더 말할 게 필요해?”

“아, 궁금하잖아요. 그 맹랑한 여자 변호사 표정은 어땠나요? 꼭 가서 보고 싶었는데.”

발목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통쾌해해도 될 만큼 안 좋았어.”

“아- 진짜 그걸 봤어야 하는데.”

“김은?”

서지우는 그녀에게 당한 ‘막내’ 변호사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당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정리해야 할 집안일이 안 끝나서 아무래도 오늘 월차를 써야 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집안일이 뭔지는 들었고?”

“어머니가 치매인지 아니면 원래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건지, 요양병원에 계신다고 하네요. 근데, 합의서 체결했던 그 날 다른 환자의 귀를 물어서 병원에서 연락 오고 난리가 났던 모양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족쇄가 되기도 한다.

서지우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끊어버릴 수 없는 족쇄.

“사이닝보너스는 지급했어?”

“네, 변호사님이 바로 지급하라고 해서, 오늘 했습니다. 아, 변호사님, 이따 저녁에 최신일 변호사 마지막 환송회에 오실 거죠? 매번 못 오셔서 오늘 꼭 오셔야 하는데.”

“아, 그게 오늘이었던가?”

오늘은 조금 곤란한데···.

“네. 모레 출국이라서, 오늘 아니면 진짜 기회가 없습니다.”

“알았어. 어디라고 했지?”

어제 풀어주지 못해서, 만약 오늘도 넘기면 부작용이···.

“클럽 원나잇이요.”

이런······.

---*---

법무법인 광현,

한소희 변호사 사무실.

벌써 한 시간째 위임장만 쳐다보고 있는 그녀.

참담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분하다.

‘다음번에는 꼭 이긴다.’

가서 선전포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당장 얼굴 보고 해야겠다. 한소희는 위임장을 내려놓고 가방을 챙겼다. 서지우를 만나러 간다.

“한 변호사.”

그런데, 그녀가 퇴근하려는 그 순간, 광현의 시니어 파트너 우종윤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한소희 같은 시니어 어쏘시어트 변호사를 직접 만나러 올 때는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승진, 아니면···.

“지금 고작 이번 일 때문에 저를 펌에서 방출하시려는 건가요?”

“고작 이번 일이라고 하기는 한 변이 한 짓이 너무 조악했어.”

“이세훈 변호사님도 인가한 일이었는데요.”

“이 변은 그렇게 이야기 안 하던데.”

“······그래서 제가 방출되는 건가요?”

“어떤 방법을 써서든 이겼으면 상관없지. 이제 그 정도는 알 레벨 아닌가?”

그렇다, 비겁한 수를 써도 이기면 된다.

이건 조악함 문제가 아니라 져서 내려지는 벌이다.

“그냥 못 나가겠다면요?”

“우리도 방출까지 할 생각은 없어. 워낙 실력이 재목이니까. 그래도 그냥 눈감아주기에는···.”

늘 조건이 붙는다.

“조건이 뭔가요?”

“베트남 브렌치에 가서 한 일 년 정도 있다 와.”

“뭐라고요?”

“거기가 지금 일손이 부족해.”

거기는 늘 부족하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곳이니까.

“지금 저 귀양 보내시는 건가요?”

“하하하, 무슨 소리. 거기가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나라인데. 가서 프론티어가 되라고. 길게 보면 한 변 커리어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당장 내년에 유학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아, 그거, 해상팀의 정수원 변호사가 먼저 가기로 했어. 한 변은 베트남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우습게 생각하고 던진 수에 그녀는 지난 4년간 광현에서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

---*---

아리는 요양병원을 찾았다.

엊그제 일어난 일을 뒷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싸운 이유가 씁쓸했다.

엄마는 늘 그 환자에게 변호사 아들이 있다고 자랑했는데, 그 환자는 그 말을 믿지 않고 거짓말이라고 놀려댔다. 놀림이 계속되자, 화가 난 엄마는 그 환자의 귀를 물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또 오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진짜였네. 돈이 생겼다는 말···. 어떻게 구했어?”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앞으로 1년 치 병원비도 선납할게요.”

“아이고, 뭐 복권이라도 된 거야?”

다행히 회사에서 사이닝보너스 지급을 신속하게 처리해줘서 아리는 그 돈으로 밀린 병원을 먼저 갚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엄마가 문 환자분의 치료비도 대신 내주었다.

“근데, 병원비는 내준 거는 고마운데. 어머니가 다치게 한 환자분 보호자가 화가 많이 났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고, 소송하겠다고 하는데···. 내가 잘 달래서 진정시켜놓기는 했는데, 내가 보니까 아무래도 정신적 피해 보상금 같은 걸 요구하는 것 같아. 어찌 됐건, 어머니가 잘못한 건 맞고, 그러니까, 아리 씨가···.”

이틀 전에는 정신이 없었다.

남자 흉내를 내고, 그것도 변호사인 척을 하고. 첫 임무를 받아 수행하러 가던 중. 이 사건이 터졌다.

부랴부랴 달려왔더니, 사인했던 합의서가 바꿔치기 된 것이었다.

자초지종도 모른 채 상대방 보호자에게 따귀까지 맞았다.

세상이 때리는 대로 얻어터졌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뒤통수 맞고 살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맞을 때마다 도망치지 마. 습관이 습성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날 밤 서지우가 한 말이 그녀를 바꾸기 시작했다.

“사무장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순간, 바뀐 그녀의 눈빛과 태도에 사무장은 살짝 긴장했다.

“정신병이 있는 어머니를 한 달에 120만 원씩 주고 이 병원에 맡긴 건, 이 같은 사고를 일어나지 않게 잘 봐달라고 믿고 맡긴 거예요. 근데, 지금 병원이 관찰, 관리를 소홀히 해서 난 사고의 책임을 저한테 전가하시는 건가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전가하려 한다니? 나는 그저···.”

“상대방 보호자에게 가서 똑바로 전하세요. 우리 어머니가 그쪽 어머님을 다치게 한 데에 대한 정말 미안하고 도의적 책임을 느껴 치료비까지는 주지만, 만약 손해배상 운운하고 나오면, 그날 우리 오빠한테 한 손찌검과 욕설을 형법 제260조에 의거하여 고소하겠다고. 그리고 사무장님도 알아두세요. 이 문제 해결하지 못하면, 중증 환자 관리 소홀로 이 병원도 고소할 거니까.”

우리 아리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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