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33)
  •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 (2)

    쉼표가 있는 자리들까지 전부 머릿속에 있는 내용이지만 아리는 다시 한번 계약서 초안을 들여다봤다.

    “내용이 일치한 지 체크하고, 사인하고, 한 부 챙기고. 오케이.”

    라면 끓이는 것보다 단순한 지시사항을 그녀는 여러 번 되뇄다.

    “내용 체크, 사인, 한 부 챙기고.”

    띠리링- 띠리링-

    “앗, 깜짝이야.”

    진동모드로 해놓는다는 걸 까먹었다. 아리는 재빨리 양복 안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대화요양병원]

    그냥 꺼둘 걸 그랬다. 혹시라도 회사일까 봐 확인한 건데, 엄마 병원이다.

    잠시 망설이던 아리는 유리창을 통해 회의실 밖을 한번 쳐다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한 시간쯤 다시 전화···.”

    -아리 씨, 큰일 났어! 어머니가 다른 환자 귀를 물었어! 지금 그쪽 아들이 당장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난리도 아니야. 빨리 와야 해.

    “네에?!”

    아-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도와주질 않는다. 아리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우- 어찌나 오지게 물었는지, 귓불이 다 찢어졌어. 병원에서 치료는 했지만, 물린 환자분 아들이 화가 많이 났어. 빨리 병원으로 와.

    “많이 다치셨나요?”

    -방금 내 말 못 들었어? 귓불이 다 찢어졌다니까? 어디야? 한 시 간 안에 올 수 있는 거야?

    “죄송한데. 제가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지금 당장은 못 갈 것 같아요. 사무장님이 대신 잘 말씀해주시면, 제가 저녁때···.”

    -아리 씨! 사람이 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병원비도 몇 달째 밀린 거 봐주느라 내가 병원장님한테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데,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그럼 오늘 당장 어머님 모시고 나가!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구를 보자기로 아나.

    유 과장으로부터 사이닝보너스가 다음 주 안에 송금될 거라 들어, 다음 주에는 밀린 병원비를 모두 납부하겠다고 이미 이야기했는데도, 이전에 그런 말을 여러 번 했다 보니, 아무래도 사무장은 믿지 않는 눈치다.

    ‘당장 가야 하나? 여기 끝나고 가도 될까?’

    갑자기 닥친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겠다. 그녀는 전화기를 붙잡고 요양병원 사무장에게 읍소했다.

    “사무장님, 제발 부탁드려요. 몇 시간만···몇 시간만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세요. 지금 제가 진짜 중요한 자리에 와 있어서요. 다음 주에 밀린 병원비를 내려면 오늘 지금 이걸 잘 끝내···.”

    똑똑똑.

    하필이면 그때,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해결의 김아인 변호사님이시죠.”

    기다리고 있던 상대방 변호사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소희 변호사입니다.”

    까만색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

    한눈에 봐도 태어났을 때부터 엘리트일 것 같은 그녀는 짧게 자신을 소개한 뒤, 전화를 붙잡고 있는 아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붙잡고 있는 전화기 때문에 악수할 수 없는 아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미처 몰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통화 중이셨군요. 그럼, 좀 있다가 다시 들어올까요?”

    “아···아니요. 아니에요.”

    아리는 다시 전화하겠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뒤, 전원을 꺼버렸다.

    “통화 중인 줄 알았으면 좀 있다 들어올 걸 그랬네요? 급한 일인 거 같은데.”

    “네? 아니에요, 급한 일.”

    “그래요?”

    “네···.”

    “아, 맞다. 축하드려요.”

    “네?”

    “이번에 입사하셨죠?”

    “아···네.”

    “저도 지원했었는데.”

    “네?”

    “이번에 저도 해결에 지원했었어요. 면접도 못 보고 떨어졌지만.”

    그녀 앞에 있는 한소희 변호사는 아나운서 같은 딕션으로 말했다. 초롱초롱한 눈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 단, 몇 초 만에도 그녀의 스마트함을 인지할 수 있다.

    “아···그러셨구나.”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네?!”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에 아리는 순간 들썩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다. 그 반응을 눈치챘지만, 한소희는 그저 어리벙벙한 신임 변호사가 자신 앞에서 긴장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서지우 대표님이 여자랑 일하는 걸 혐오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진짜요?”

    “뭐 물론 대외적으로 그렇게 말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사무실에 여성 직원 한 명 없는 건 좀···.”

    ‘아, 그래서 여자 직원이 없는 거였구나.’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 냉철한 대표변호사가 자신이 사실은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 지을 표정을 생각하니 머릿속에 식은땀이 맺힌다.

    “그래도 여자같이 생긴 남자 변호사는 상관없나 보네요.”

    합의서 체결하러 와서 누군가와 정신없이 통화를 하더니만, 막상 마주 앉으니 잔뜩 긴장한 채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아무리 신임 변호사라고 하지만, 한심하다.

    ‘참나- 어떻게 이런 사람을 나 대신 뽑을 수 있는 거지?’

    기분이 상한 한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었다.

    비꼬는 말. 그러나, 정신없는 아리는 다르게 들었다.

    ‘역시나 아직도 여자 같나? 머리를 좀 더 쳐야 할까?’

    “아, 다른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냥 워낙 곱게 생기셔서. 살짝 질투가 나기도 하고···. 저도 엔터테인먼트 분야 관심이 많아서 그쪽 로펌에서 일해보고 싶었거든요.”

    “아···.”

    상대를 떠본 한소희는 확신했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신임 변호사는 계약서를 바꿔치기해도 모를 것이며, 설사 눈치챈다고 해도 실수였다고 하며 그냥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한마디로, 리스크 프리(risk-free) 상태.

    “제가 말이 길었네요. 그럼 계약서에 서명할까요?”

    ---*---

    “오셨어요? 병원에서 바로 퇴근하실 줄 알았는데.”

    “와야지. 이것 때문에 한나절을 공쳤는데, 일해야지.”

    점심때, 접질린 발목을 검사하러 근처 정형외과에 갔던 정도가 퇴근 무렵 사무실에 복귀했다.

    “발은 괜찮으세요?”

    “괜찮대. 그냥 저번에 늘어난 인대가 다시 좀 놀라서 그런 거래. 찜질하고 쉬면 괜찮을 거라네.”

    “그래도, 조심하시는 게···. 제 친구도 보니까, 발목 다친 거 우습게 봤다가 오래 고생하더라고요.”

    “아- 심각한 거 아니야. 그리고 이따 밤에 침 맞으러 갈 거야. 서초역에 24시간 하는 한의원이 하나 있거든.”

    유이헌 과장과 발목 상태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정도는 곧바로 김아인 변호사를 찾았다.

    “김 변호사 돌아왔지? 지금 자리에 있나?”

    “아니요.”

    “응? 광현에서 아직도 안 왔어?”

    “오셨는데, 갑자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다면서 조퇴하셨어요.”

    “그래? 무슨 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 변호사님한테 전화를 드렸는데, 전원이 꺼져있는 것 같다고 하시긴 했는데···.”

    “어, 전원이 나갔어. 그래? 알았어. 아, 합의서는?”

    “주고 가셨습니다. 스캔해서 서버에 올려놨고, 원본은 변호사님 책상에 올려두었습니다.”

    “그거면 됐어. 그럼 수고해.”

    “네.”

    신입 변호사의 갑작스러운 퇴근 사유가 궁금했지만, 정도는 내일 물어볼 생각이었다. 살다 보면 급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 이게 왜 이렇게 됐지? 합의서 문구가 왜···?”

    그럴 수 없었다. 신입이 체결하고 온 합의서 문구는 기존에 동의한 합의서 초안과 달랐다.

    “유 과장!”

    “네, 변호사님.”

    “지금 김아인 변호사한테 연락해서, 얼마나 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 들어와야겠다고 전해. 합의서 문구가 잘못됐어.”

    ---*---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을 때, 아리는 이미 의정부에 있는 요양병원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합의서 문구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사인 전에 확인했다. 완벽한 기억력이었지만,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들고 간 계약서 초안을 옆에 놓고 꼼꼼하게 체크한 뒤 사인했다.

    그런데 어떻게 합의서 문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간에 누가 바꿔치기를 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 그럴 수···.

    ‘헉! 설마, 그때···.’

    당장 사무실로 달려가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그곳에서, 전화기 너머에 있는 상사에게 고개가 닳도록 사죄를 빈 아리는 광현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

    “아무래도 한소희 그 여자 변호사가 바꿔치기를 한 것 같습니다.”

    후배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정도는 곧바로 서지우에게 연락했다.

    -바꿔치기했다고?

    “하- 진짜 대형 로펌 변호사가 어떻게 그런 쌈마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무슨 소리야? 자세히 설명해.

    “그게요.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정도는 아리에게 들은 내용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니까, 서류에 사인한 다음에 기록 저장을 위해 스캔하겠다고 하면서 원본 2부를 다 가져갔다가, 프린터에 끼는 바람에 다시 사인해야 한다고 하면서 문구가 다른 합의서를 가져와 사인하게 했다는 거야?

    누가 들으면 황당한 이야기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처음 한소희는 양측이 동의한 문구의 합의서를 꺼냈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김아리는 합의서를 문구를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는 한 부씩 돌아가며 두 원본에 모두 사인을 했다.

    사건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한소희는 기록 보관상 스캔이 필요하다며 사인한 원본 2부를 회의실 밖으로 가지고 나갔고, 절차를 잘 모르는 아리는 의심 없이 그러라고 했다.

    처음부터 친절하게 환심을 산 그녀이기도 했지만, 그런 큰 로펌에서 일하는 엘리트 변호사가 이상한 짓을 할 거라는 상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잠시 뒤, 곤란한 표정으로 회의실에 돌아온 한소희는 사인한 원본이 스캔 중 프린터에서 끼어 훼손되는 바람에 다시 체결해야겠다고 하며 양해를 구했다.

    아리는 그런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실수를 하는구나.’ 안심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소희가 두 번째로 가져온 합의서가 당연히 처음 가져온 합의서와 동일한 서류라 여기고 사인했다.

    상황이 그녀를 재촉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한소희를 믿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갔어야 했는데.”

    정도는 후배의 실수를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실수라고 하기도 그렇다.

    심판이 보고 있지 않다고 글러브 안에 쇳덩어리를 넣고 친 거나 마찬가지, 게임이 끝났다는 종소리를 듣고 돌아선 선수의 뒤통수를 가격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페어플레이를 기대하고 들어간 선수는 실력과 상관없이 얻어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노련했다면 피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다만, 경험이 부족했을 뿐.

    문제는 지금 이 경기가 심판이 있는 권투가 아니라는 거다.

    서지우는 잠시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했다.

    체결된 계약서에는 “이전에 논의된 모든 계약을 대체한다”라는 당연하고도 명백한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간 주고받은 이메일을 증거로 계약 성립을 다퉈볼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치졸한 방법을 써서 바꿔치기했다는 것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솔직히 저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그냥 이렇게는 이길 확률이 높지는 않았다.

    어찌 됐건 계약서에는 <해결> 측 변호사의 사인이 들어가 있었고, 체결 전 문구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의무는 <해결>에 있었으니까. 꼼수였든 아니든,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는 힘들다.

    -윤, 계약서에 계인 되어있어?

    계인: 관련된 계약서 여러 부 있을 때, 서로가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서류를 옆에 두고 그 위에 도장 (혹은 사인)을 겹쳐 찍는 행위.

    계약서 원본을 2부 만들 경우, 2부를 가지런히 옆에 놓고 그사이에 도장이나 사인을 걸쳐 찍음으로써 2부가 동일 원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계인을 하게 되면 같은 내용의 문서라 해도 도장 혹은 사인의 다른 부분이 각 원본에 남기 때문에,

    계인이 된 원본들은 각기 다른 원본으로 인지되어, 하나의 원본의 내용을 지워도 다른 원본의 내용은 지워지지 않는다.

    “네, 계인이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원본을 모두 갖고 있지 않거나 하나를 없애지 않는 한, 삭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알았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만나서 해결해야지.

    통화를 끊은 서지우는 곧장 광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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