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3)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여자 (2)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아인 변호사님. 법무법인 해결의 유이헌 과장입니다.

“아, 네.”

-윤정도 변호사님이 이미 말씀하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실무적으로 확인할 것들이 몇 가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졸업증명서하고 성적표, 토플 성적표를 사본으로 제출해주셨는데, 저희 로펌은 원본을 확인하고 있어서요. 첫날 출근하실 때, 주민등록등본하고 통장 사본도 가져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 변호사님?

“···네, 알겠습니다. 가지고 갈게요.”

-그리고 에퀴티 바이인(equity buy-in) 관련해서 대출로 진행하실 거라고 서 변호사님한테 들었는데, 그러면 인감이랑 인감증명서도 가지고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월요일부터 출근하시죠? 혹시 스케줄에 변동사항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네···.”

딸깍.」

*

새벽같이 일어나 오빠의 몸을 닦고 체위를 변경해주고 방을 청소했다. 혹시라도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해서 전화기를 확인하지만, 전부 빚 독촉 문자들뿐이다.

라면을 먹기 위해 가스 불 위에 물을 올려놓고 끓기만 기다리고 있던 아리는 문득 잘생긴 로펌 대표변호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 한계를 덜어주면 그 특별한 능력을 백프로 발휘해줄 수 있나?」

‘내 한계······.’

지난 며칠간은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식물인간인 오빠의 옷을 입고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마치 판타지 세상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긴장감에 손발이 떨렸지만, 동시에 짜릿했다.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흥미로운 사건들이 일어났다.

‘아이덴티티만 바꿨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하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늪 같았는데.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쳐대도 아무 말 없던 세상이 기회를 주려고 한다.

뽀글뽀글 냄비 바닥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물방울들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아리는 불을 끄고 방으로 달려갔다. 서랍 속에서 클리퍼를 찾은 그녀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지이이잉-

이제는 진짜 남자처럼 생겨야 한다.

진짜 남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진짜 남자처럼 생각해야 한다.

어설프게 해서는 금세 들통이 날 게 뻔하니까.

아리는 옆머리를 밀어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남자다!’

---*---

“난 남자야~ 쓰레기 같은 남자야~.”

똑똑똑.

“변호사님, 무슨 즐거운 일 있으신가 봐요?”

“굿모닝. 응?”

“아침부터 노래를 흥얼거리시고···.”

“아- 아니 차 타고 오는데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더라고. 중독적이잖아. ‘난 남자야~ 쓰레기 같은 남자야~.’ 박진영 씨가 노래를 참 잘 만들어, 중독성 있게.”

“저는 그 노래만 들으면 가수 싸이 씨가 생각이 나서···.”

“왜?”

“싸이가 콘서트에서 부르는 노래 아닌가요?”

“에이- 그건 ‘성인식’이고 이건 ‘난 남자야’.”

“아···.”

“뭐야? 그 표정은? 지금 나 ‘틀’ 취급하는 거야?”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유이헌, 왜 왔어? 할 말 없으면 가.”

“할 말 있는데요.”

“뭔데?”

아침 인사 겸 정도와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은 유이헌 과장은 용건을 말했다.

“어제, 김아인 변호사님하고 통화했고요, 다음 주부터 출근하는 것에 대해 확인받았습니다.”

“아, 그래? 인제 ‘막내’ 공석이 채워지겠구먼.”

“방은 최신일 변호사님이 쓰시던 방을 쓰시면 될 것 같아서, 청소해두었습니다.”

“잘했네. 컴퓨터랑 그 외 기기들도 다 세팅했지?”

“네.”

“하긴 최 변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그대로 쓰면 되겠구나?”

“네. 최 변호사님 쓰시던 키보드랑 마우스는 가지고 가셔서 그것만 새것으로 세팅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와서 본인이 선택하게 해. 내가 유별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키보드랑 마우스를 내가 원하는 거 쓰지 않으면 글이 잘 안 써져. 그러니까 일단은 사무실에 안 쓰는 거 있으면 그걸로 잠시 쓰라고 하고, 오면 원하는 거로 바꿔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김아인 변호사한테 배당될 케이스 리스트 작성해서 서버에 올려놨거든, 김 변호사 오면 그거 주고 리스트에 있는 사건 파일들 찾는 법도 바로 알려줘.”

“네.”

“됐나? 뭐 더 할 이야기 있어?”

하나 더 있다.

“네. 김아인 변호사 에퀴티 바이인 관련해서 서 변호사님이 대출로 진행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방금 세무사님하고 통화했는데, 그렇게 하면 세무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하셔서요.”

“응? 그런 얘기가 있었어?”

“네.”

“대출로 진행한다는 게 뭐야? 회사에서 돈을 빌려주겠다는 거야?”

“네.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래?”

“예.”

에퀴티 바이인(Equity buy-in)은, 변호사가 자기가 근무하는 로펌의 지분을 취득할 때 쓰이는 용어로 주로 근무 연차가 최소 칠 년에서, 많게는 십수 년이 되었을 때, 로펌의 기존 지분 파트너들의 동의를 얻어 지분을 구매하는 행위이다.

지분 파트너는 로펌의 수익을 소유 지분 퍼센티지에 따라 나눠 갖게 되는 것이므로 (반대로 손실이 날 경우에는 소유 지분 퍼센티지에 따라 책임을 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로펌에 들어가는 변호사들은 지분 파트너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로펌이 크면 클수록 입사 후 지분 파트너가 되기까지의 기간 길고 경쟁도 심하다. 로펌이 작으면 상대적으로 지분 파트너가 되는 여정이 짧지만, 그렇다고 해도, <해결>처럼 입사와 함께 지분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한민국 법상, 법무법인의 자격을 유지하려면 최소 세 명의 지분 파트너 변호사가 존재해야 하기에, <해결>은 입사와 동시에 에퀴티 바이인 옵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아- 알았어? 그건 내가 대표님하고 이야기해보고 알려줄게.”

“넵, 알겠습니다.”

<해결>의 특수한 상황상, 이제 막 입사하는 ‘막내’ 변호사에게 에퀴티 바이인을 제공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출까지 해주며 옵션을 제공한 적은 없었다.

비서 유이헌과 대화를 마친 정도는 대표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

똑똑똑.

“네.”

“변호사님, 잠시 회의 가능하실까요? 김아인 변호사 관련 일인데.”

“응. 왜?”

정도는 조금 전 비서한테서 들은 보고 내용에 대해 말했다.

“김아인 변호사 다음 주부터 출근한다고 합니다.”

“배당할 케이스들은?”

“리스트업해서 서버에 올려놨습니다. 유 과장한테 사건 파일들 보는 방법도 알려주라고 지시해놨고요.”

“굿.”

“근데, 에퀴티 바이인 관련해서 말입니다.”

“내가 그러라고 했어.”

서지우는 윤정도가 무슨 말을 하러 들어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다.

“아···. 근데 왜···?”

“형편이 안 좋은가 봐.”

“아···. 그래서······.”

<해결>에서 막내 변호사에게 제공하는 지분 구매 옵션은 전체 지분에 3%밖에 되지 않고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주식이 아니기에 액면가로 책정되어 구매비용이라고 해봤자, 고작 삼백만 원이 다였다.

근데, 삼백만 원이 없다고?

윤정도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굳이 회사에서 대출해줄 이유가···. 그 정도는 어딜 가도 신용대출로도 빌릴 수 있을 텐데.”

세상이 변해 변호사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변호사 자격증 하나면 한도 1억짜리 카드가 그 자리에서 발행되고, 같은 금액의 신용대출도 큰 빚이 없는 한 며칠 만에 승인이 난다.

그런데, 회사에서 돈을 빌린다고?

이상하다.

“사정이 있나 보지.”

“그래도 회사에서 1억씩이나 대출해주는 건···.”

“왜? 들고 튈 것 같아?”

매년 1,600~1,700명씩 신임 변호사들이 쏟아지는 업계라고 해도 여전히 몇 다리 건너면 누가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더구나, 스타팅 연봉이 세금 떼고 실수령액으로 1억2천 가까이 되는 포지션을 얻어놓고 고작 1억 원을 들고 튄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할 짓이 아니다.

“그런 거는 아니지만···.”

“예전에 이운천 변호사한테도 대출해줬었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때는 입사 1년 뒤에 해준 거라서 지금과는 조금 다른···.”

“그래서? 윤은 해주지 말자는 거야?”

막상 그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다. 그도 이미 김아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조금 특이한 상황이라서 대표변호사의 말을 직접 듣고 싶었을 뿐이다.

“아니요. 그런 거는 아닙니다. 아, 근데, 대출로 진행할 경우, 세금 문제가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다고 하네요. 어찌 됐건 저희가 대출업자가 아니니까.”

“이운천 변호사 때는 어떻게 했지?”

“그때는······아···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야. 그렇다면 그냥 사이닝보너스로 하지.”

“사이닝보너스요?”

“응. 그러면 간편할 거 같네. 작년에 최 변호사 연말 성과급으로 얼마 지급했지? 1억 원 조금 안 되었던 거 같은데.”

“세금 떼고 8천 3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럼 얼추 비슷하네. 사이닝보너스로 지급하고 연말 성과급에서 제하는 걸로 계약하면 되겠네. 그렇게 하자고.”

‘작년은 역대급 매출이어서 그랬던 건데···. 뭐 물론 올해도 시작부터 좋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시원시원한 서지우의 정리에 윤정도는 딱히 더할 말을 찾지 못한다. 사실 없다. 애초에 이의를 제기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넵,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할게요.”

라고 대답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윤.”

서지우가 부른다.

“네, 변호사님.”

“혹시 YGP 표절 사건 관련해서 광현에서 들어온 이메일 봤어?”

“아니요, 아직.”

“보고, 30분 뒤에 회의 좀 하자고. 재미있는 전략을 쓰네.”

“어떤···?”

“보고 와.”

“넵, 알겠습니다.”

---*---

법무법인 광현, IP팀.

“한 변, 아무래도 이거 힘들 것 같지? 들려준 사람 열의 열 모두 비슷한 거 같다고 그러네. 그리고 의뢰한 표절 점검 사이트 두 개에서도 표절 의견을 내놨고.”

음악저작물의 경우, 법 어디에도 저작권 침해에 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그렇기에, 기존 판례에서 법원이 세운 가이드라인을 통해 해당 음원이 표절에 해당하는지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이와 관련해서 대한민국 법원은 창작성, 의거성, 실질적 유사성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창작성이란 문제 되는 부분이 단순히 아이디어가 아닌 「저작권법」상 보호되는 창작적인 부분인 건지를 판단하는 것이고,

의거성은 해당 음원이 원 음원에 의거하여 만들어졌는지, 즉 해당 음원을 만든 사람이 원 음원을 참고한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며,

실질적 유사성은 실질적으로 두 음원이 듣기에 비슷한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현재 광현이 대리하고 있는 YGP 엔터테인먼트 사건의 경우 의거성과 실질적 유사성에서는 승산이 없었다. 해당 음원 작곡가가 원 음원을 들었던 적이 있다는 점이 사실로 밝혀졌고, 실질적 유사성에서도 마땅한 증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싸워볼 만한 쟁점은 창작성과 관련해서 음원의 해당 구간이 소위 ‘머니 코드’라 하여 다른 곡들에서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해보는 건데, 솔직히 그것도 리스크가 있는 주장이었다. ‘머니 코드’라는 데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렸다.

“그냥 YGP한테 합의하자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인데. 한 변은 어때?”

“아니요. 지금 이렇게 바로 합의하자고 하면 상대방이 분명 공식적 사과를 요구할 거예요.”

“그건 못하지. 비밀 유지 조건으로 합의금을 조금 높여주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돈도 없는 가난한 음악가라며? 될 것 같은데.”

아니. 그건 서지우 변호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열 개를 다 가질 수 있는 게임에서 안전하게 일곱 개만 취하고 끝낼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말이다.

게다가, YGP 입장에서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합의로 인해 실추될 명예가 우려이지. 설사 종국에는 합의해야 한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약해 보인다.

“아닐 거예요. 설사 비밀 유지에 합의한다고 해도 합의금으로 상상 이상을 요구할 거고, 무엇보다도 그렇게는 YGP가 하겠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아, 골치 아프게 됐네. 나는 그냥 IP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단순한 지적재산권 사건이 아니다. 엔터테인먼트 사건이다.

“방법이 있어요.”

“무슨 방법?”

한소희는 컴퓨터에서 음악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딴 따 딴다다 다다다다 딴-

“이게 뭔데?”

“돈도 없고 가난한 음악가가 전에 만든 다른 곡이요.”

“응? 이걸로 뭘 어쩌려고?”

상대의 선두공격을 막아내기 힘들면, 후방을 공격하면 된다.

“이거 표절이에요.”

씨익-

한쪽으로 올라간 한소희의 입꼬리가 컴퓨터 모니터에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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