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여자 (1)
“휴- 다했다.”
춘천 시내 한 PC방,
마지막 글자를 타입한 아리는 팔을 귀 뒤로 넘겨 길게 기지개를 켰다.
“대단해! 김 변! 아니 김 파트너! 니가 내 구세주다. 내가 반말해도 되지? 내가 형이잖아. 이야, 진짜 대박이다. 진짜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있는 사람은 실제로 처음 봤어. 맨날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봤는데···. 진짜 신기하네. 이걸 한 번에 다 외운 거야?”
처음 타이프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정도는 그녀가 200페이지 넘는 분량을 쉬지도 않고 처 내려가자, 그녀의 능력이 진짜임을 확신했고 그녀가 끝마쳤을 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작가님이 이 원고를 우리한테 내줬을 때가 이미 우리가 각 한 열 병씩은 마신 상태였잖아? 근데 그때 읽은 내용을 기억한다고? 아, 뭐 이 긴 거를 맨정신에 기억하기도 어려운 거지만···. 대박인데.”
“재미있게 본 거는 더 잘 기억이 나긴 해요···.”
“김 변.”
“···네.”
“뭐야? 너 천재야? 김웅용 선생님이야? IQ가 뭐 한 180 되는 거야?”
아직 술이 덜 깬 정도는 설레발을 떤다.
“자, 일단 쓴 거 세이브해서 회사 이메일로 보내고, USB에도 하나 저장하고, 마지막으로 프린트도 하나 하자고. 혹시 또 모르니까. 오케이?”
그는 부산스럽게 앉아 있던 자리와 카운터를 왔다 갔다 하며 파일을 저장하고 출력을 부탁했다. 이제 프린트가 다 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자, 그는 이온 음료 두 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아리 옆에 앉았다.
“하- 살았다. 마실래?”
“감사합니다.”
정도로부터 이온 음료를 받은 마신 아리는 어색한 침묵이 오기 전에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뭐? 아무거나 물어봐.”
“원래 변호사님들이 이런 일도 하나요?”
“응? 아— 크큭, 좀 특이하지?”
“네, 이런 일도 하는 줄 몰랐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좀 특이하지. 엔터 업계가 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어. 할리우드에 가면 생각보다 엔터 로펌이 많지 않아. 왜 그런 줄 알아? 그 업계 최고 변호사들은 다 에이전시에 들어가 있거든. 딜이 틀어졌을 때 뒷수습하는 변호사보다 딜을 성사시키는 변호사가 훨씬 더 인정을 받는 법이니까.”
“그럼 <해결>은 딜을 성사시키는 변호사들이 일하는 곳인가요?”
“아니.”
정도는 자신의 ‘아니’라는 대답을 아리가 의아해하기 전에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딜(deal)도 성사시키는 변호사들.”
“아···.”
“전통적으로 한국 변호사들은 협상할 때는 뒷짐 지고 있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만 개입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아냐. 공수 둘 다 해. 그게 <해결>이 대형 로펌들이 독식하고 있는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엔터 전문 부티크 로펌으로 인정받고 있는 비결이지. 카하하.”
윤정도는 서지우를 존경했고 <해결>의 파트너라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멋지네요.”
“멋지지? 우리가 좀 멋져. 하하.”
아리는 부러웠다. 어딘가에 그와 같은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하다못해 피가 섞인 가정에서도.
“그렇다고 해도 우리랑 이중기 작가님과의 관계가 조금 특별하기는 하지. 우리 로펌 이름이 뭐야?”
“<해결>이요.”
“그거 지어준 사람이 작가님이야.”
“아, 진짜요?”
“서 변호사님이 김앤강에 있다가 나오면서 맡은 첫 케이스가 바로 작가님 저작권 분쟁이었어. 서 변호사님이 김앤강에 계셨던 거는 몰랐지?”
“네? 아···네.”
“짧게 일하셨다고 알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 그래도 멋지지 않아? 누구는 없는 이력도 만들어 넣는데. 아무튼, 이중기 작가님이 해외 출판사랑 표절 분쟁이 붙었었는데, 당시 국내 출판사가 장난질을 해서, 서 변호사님이 변호를 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계속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거지.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런 일까지 하는 거고. 키킥. 그래도 재미있지 않아? 난 우리 펌 일이 다이내믹해서 좋은데.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도, 김 변도 있다 보면 재미있을 거야.”
‘김 변’이라는 호칭이 어색한 아리는 선뜻 뭐라고 대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금세 ‘식구’ 취급해주는 윤정도가 고마웠다. 따뜻한 사람 같았다.
“프린트 다 됐습니다.”
“아, 감사해요. 김 변.”
“네.”
“수고했어. 길고 독특한 면접이었네. 이제 가서 쉬어. 사무실에서 좋은 연락 갈 거야.”
아리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 친 정도는 USB 메모리와 프린트를 들고 회사로 떠났고,
긴장이 풀린 아리는 급격하게 감기기 시작하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집으로 향했다.
---*---
며칠 뒤···
-서 변호사님 덕분에 넷플릭스하고 딜이 잘됐어요. 우리 좋아하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저쪽에서는 시나리오가 너무 좋다고 벌써부터 시즌 2 제작까지 이야기하고 있고.”
이중기 작가의 각본에 대한 반응은 매우 좋았다.
플랫폼과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친 <영화사 청아>의 공국현 대표는 고무된 목소리로 감사를 표시했다.
“잘됐네요.”
-저쪽에서 다음 주 내로 계약서 초안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서 변호사님이 검토 좀 해주세요.
<해결>은 이중기 작가의 대리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화사 청아>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서지우에 대한 신뢰가 이중기만큼이나 무한한 공국현 대표는 이번 거래를 협의할 당시, 동시 대리에 동의하는 웨이버(waiver)에 사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서 변호사님.
“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합니다.
이제부터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는 이중기 작가의 시간에 맞춰 일했다면, 지금부터는 제때제때 다음 회차 대본이 나오지 않으면 큰 손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 변호사님.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모든 하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워낙 괴짜 같은 양반이라, 서지우와 <해결> 사람들 외에는 믿는 사람이 없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작가님하고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서 변호사님만 믿겠습니다.
“네.”
-그럼, 들어가십시오.
딸깍.
공국현 대표와 통화를 마친 서지우는 곧바로 이중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뭐래?
“최고랍니다. ‘시즌 2’까지 계약하자고 합니다.”
-진짜? 크크큭. 크크크하하하하. 하하하.
이중기는 서지우의 전화를 기다렸다.
아니,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원하는 말을 들었다.
“언제부터 들고 계셨던 거예요?”
-······한 달.
“그래도 이번에는 제정신일 때 연락을 주셨네요.”
지난번에는 완성된 원고를 석 달이나 끌어안고 있다가 급성 변비로 병원에 이송되고 나서야, 원고를 받을 수 있었다.
“하실 수 있겠어요? 앞으로 여덟 회차를 더 써야 하는데?”
-할 수 있어.
“못하시겠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계약 해지해도 지금은 감당할 수 있지만, 넷플릭스하고 계약하고 해지하면 손해가 클 거예요.”
-흥, 커 봤자, 몇억 원이겠지.
“그럼, 못하겠다고 전하겠습니다.”
-아니야! 해. 할 거라고.
소설가로 등단한 그는 인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글쓰기가 어려워졌고, 특히나 5년 전 표절 분쟁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때는 슬럼프까지 찾아왔다.
그걸 깨고 다시 펜을 들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시나리오 집필이었다. 좀 더 가볍게 마음을 놓고 쓸 수 있었던 그는 다시 이야기꾼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본인의 글 쓰는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아도, 시나리오 집필을 계속하고 싶은 이유였다.
“그럼 쓰세요.”
-알았어. 쓸 거야. 닦달은···.
“석 달 후에 뵙겠습니다.”
-자네가 오지 말고, 그 젊은 친구 보네.
“젊은 친구요?”
-김아인인가 하는 막내 변호사.
‘무슨 일이 있었지? 처음 보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어르신인데···.’ 김아인 변호사가 꽤 좋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알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근데, ‘시즌 2’ 이야기는 진짜인 거야? 아니면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야?
“제가 언제 듣기 좋으라고 없는 말 한 적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지. 안 하지. 절대 안 하지. 크크큭. 알았어. 끊어. 크하하하.
딸깍.
애 같은 구석이 있는 노인네. 멘탈도 약해서 자기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댓글도 전혀 안 보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번 작품도 잘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서지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똑똑똑.
“네.”
“변호사님.”
이중기 작가와 통화가 끝난 후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윤정도 변호사가 들어왔다.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발목은 괜찮고?”
그날 산에서 다쳤다. 당일은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다음날 통증이 심해졌고 누적된 피로로 며칠 심하게 앓은 그였다.
“괜찮습니다.”
“병원에서는 뭐래?”
“인대가 늘어났대요. 며칠 약 먹고 쉬면 괜찮을 거랍니다.”
서지우는 한 소리 하려던 걸 그만뒀다. 정도가 최선을 다하려다가 그렇게 된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더 쉬지 왜?”
“아니에요. 인대 조금 늘어난 건데요, 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서지우의 물음에 정도는 신이 나서 그날 일어난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서지우가 듣기에는 시작부터 엉망진창인데, 정도는 그날 일을 무용담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처음에는 목소리도 작고 계집애처럼 생겨서 샌님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술이···아- 장난 아닙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남자입니다.”
“그게 다야?”
“네? 아아- 물론 AI급 기억력. 인정. 깜짝 놀랐어요. 정말 글자도 하나도 안 틀리고 한 시간도 안 돼서 200페이지가 넘는 대본을 써 내려가는데, 타입도 진짜 빨라. 와우! 어르신한테 사정을 설명해드리고 확인을 구했는데, 본인이 쓴 거랑 똑같다고 하시더라고요.”
특히나 같이 간 지원자의 능력에 꽤 놀란 모양이었다.
피식.
서지우는 흥미로웠다. 물론 그 역시 지원자의 능력에 관심이 있어 채용을 고려한 거지만, 이틀 만에 그가 좋아하는 두 사람의 호감을 얻어내다니···. 더욱 관심이 간다.
“그럼, 김아인 변호사 채용에 동의하는 거지?”
“넵! 이의 없습니다, 재판장님!”
---*---
[처제,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말어. 들어보니까, 처제 이력이 부담스러웠대. 솔직히 부담스러웠겠지. 그런 코딱지만 한 펌에서 처제 같은 인재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광현의 에이스인데. 그거 알았어? 거기는 유학도 안 보내줘. 뭐 엔터 업계 쪽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대형 로펌에 견줄 만하겠어? 그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털어버려. 알았지? 아-참, 이번 주말에 장인어른께 말씀드린 그 친구 데리고 집에 가니까, 집에 있을 거지?]
무슨 말을 해도 그녀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평생 거절이라는 걸 당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법무법인 해결은 여성을 뽑지 않는다는 것을.
비서조차도 여성을 뽑지 않는 로펌인데 오죽하겠냐마는 그래도 면접 기회 한번 주지 않고 자신을 깠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가서 따지고 싶다.
이유를 듣고 싶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한소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똑똑똑.
“어, 한 변호사. 무슨 일이야?”
“변호사님, YGP 표절 사건의 상대 변호사가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죠?”
“어, 그런데?”
“저도 그 사건 배당받을 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