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기억능력 (3)
“돌아가.”
“네? 아니, 그게 무슨···.”
“돌아가라고. 준비가 아직 덜 됐어?”
“4회차분 각본 집필 완성하셨다고 당장 달려오라고 하신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는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내가 안 됐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돌아가라고!”
잿빛 털이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노인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 정도와 아리를 암자 밖으로 내쫓았다.
“아이, 또 왜 저러시나···.”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떠밀려 내쫓긴 정도는 물러서지 않고 암자밖에서 원고를 구걸했다.
“어르신, 오늘은 꼭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약속한 날짜가 벌써 삼 개월이나 지났어요.”
그러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암자 안에서 울려 퍼졌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데.”
“에이, 왜 그러세요. 공국현 대표님 만나서 그렇게 약속하셨잖아요.”
“계약서 썼어? 난 그런 계약서에 사인한 적 없어!”
“어르신, 꼭 계약서에 사인해야지만 계약한 성립되는 건 아니에요. 구두계약도 법적으로 효력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르신. 그때 그 자리에 저랑 서 변호사님도 계셨고 <영화사 청아> 공 대표님이랑 윤 이사님도 계셨잖아요. 증인이 몇 명인데,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시면 어떡해요.”
“흥,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선금 1억 받으셨잖아요. 계좌 기록 가지고 와야 기억이 나시겠어요? 오늘도 원고 못 가지고 가면 공 대표님이 선금 돌려달랍니다.”
“으흠! 험!”
민망하니까 괜히 헛기침만 해댄다.
재미있는 노인네. 상황을 모면하겠다고 1초면 들킬 거짓말을 한다.
어쩌면 그래서 그가 대한민국에서 최고 이야기꾼 중 한 명인지 모르겠다.
“작가님, 그러지 말고 한번만 보여주세요. 원고 다 쓰신 거 알고 있어요. 지금 들어가니까, 한번만 보여주세요. 알았죠?”
“들어오지 마!”
“들어갑니다.”
“나 발가벗었어.”
“제가 작가님 발가벗은 거 한두 번 봤나요. 술만 자시면 수시로 벗으시면서···.”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다 태워버릴 거야. 나 성냥 들었다.”
아하! 원고가 있기는 있다.
다만, 무슨 변덕에서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들어갈게요.”
“들어오지 마! 들어오기만 해봐, 그러면 이 원고 진짜 다 태워버린다.”
“알았다니까요.”
문을 열려던 정도는 고리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문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큰소리로 몇 마디 한 그는 어정쩡히 옆에 서 있는 아리에게 혼잣말처럼 설명했다.
“저 어르신이 원래 저래. 오다가 내가 말했지? 괴짜 같은 구석이 있다고.”
“네···.”
“하아- 오늘은 가지고 내려갔으면 좋겠는데···. 벌써 몇 번째냐? 분명 대사 몇 문장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시는 건데···.”
징징- 징징-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하고 있는 찰나, 정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서지우다.
“네, 변호사님.”
-어떻게 됐어? 원고 받았어?
“아뇨, 아직이요.”
-왜? 또 땡강이셔?
“네.”
-원고는?
“원고는 있는 거 확실해요.”
-그래?
“네, 방에 들어갔을 때, 살짝 본 거 같기도 하고, 좀 전에 실랑이했을 때도 원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셨어요.”
-그래, 그럼 오늘 무조건 가지고 와.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조금 힘들 수도···.”
-안돼. 방금 <청아> 공국현 대표님이랑 통화했는데, 내일 넷플릭스 아시아 콘텐츠 담당자랑 만나기로 했대. 원고 보여주기로 했다니까, 무조건 가져와야 해.
“설득은 해보겠는데···.”
-공 대표님 화가 많이 났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손해배상 청구까지 불사하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고 내려와.
“그런 걸로 설득되는 양반이 아니라는 거 변호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김아인 변호사 같이 갔잖아. 작가님 손발 묶고 갈취해서 오든, 술에 약을 타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가지고 와. 이번에는 좀 심각해. <청아> 쪽에서도 더는 기다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 같아.
“하— 알겠습니다. 뭐라도 가지고 내려가겠습니다.”
딸깍.
선택권이 사라졌다. 이제는 무조건 원고를 들고 하산해야 한다.
그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다.
윤정도는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김아인 변호사, 술 좀 마시나?”
“네? 술이요?”
“오늘 좀 많이 마셔야 할 거야.”
멀뚱히 서 있는 아리에게 경고한 정도는 기사에게 술과 안줏거리를 부탁했다.
“차장님, 내려가셔서 보쌈하고 족발 6인분하고 소주 한 짝.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두 짝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퇴근하세요. 아무래도 밤새워 마시게 될 것 같으니까···.”
---*---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다음 날 아침, 결과가 궁금한 서지우는 정도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열 시가 넘었는데도 계속 소리샘으로 연결되었다.
“유 과장, 혹시 윤 변호사로부터 전화 없었어?”
“네, 없었는데요.”
느낌이 불길하다.
“혹시 차장님 출근하셨어?”
“남 차장님이요?”
“어제 윤 변호사하고 춘천 내려가셨지?”
“네. 출근하셨어요.”
남성진 차장이 출근했다는 것은 정도가 암자에 남았다는 말인데···.
“잠깐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호출을 받은 남성진이 대표변호사 방을 노크했다.
똑똑똑.
“부르셨나요, 변호사님?”
“들어오세요. 어제 윤 변호사랑 이중기 작가님 만나러 춘천에 갔죠? 어떻게 됐어요? 혼자 돌아오신 건가요?”
“아, 그게······.”
남성진 차장은 어제 오후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술?”
“네. 그래서 소주 두 짝하고 안줏거리하고 사다 드리고 저는 서울로 복귀했습니다.”
보고를 들은 서지우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정도가 술에 약하지는 않았지만, 절대 이중기 작가를 이길 수 없다. 아무리 머리와 턱에 흰털이 나고 시력이 나빠졌어도 결코 술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제아무리 큰 상어라고 해도 고래를 이길 수 없는 법.
무조건 가지고 오라는 말에 다급해진 나머지 이중기 작가가 좋아하는 술로 어떻게 해보려고 한 것 같은데, 수가 좋지 않다.
“알았어요.”
“넵.”
“아, 혹시 김아인 변호사도 같이 있었나요?”
“네, 같이 암자에 남으셨습니다.”
“알았어요. 수고했어요.”
남성진 차장을 돌려보낸 서지우는 곧바로 이중기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같은 메시지. 평소에 전화기를 켜 놓는 분이 아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걸어본 것.
서지우는 곧바로 핸드폰에서 김아인의 연락처를 찾았다.
없다.
유선전화기를 집어 들어 비서에게 김아인의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려는 순간,
징징- 징징-
좀 전까지 연락이 닿지 않던 정도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여보세요?”
1초간의 침묵. 서지우는 직감했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선배님, 어떡하죠?
“무슨 일인데?”
-제가 그만······.
이 작가의 원고를 잃어버렸다.
술 마시며 어르고 달랜 결과, 이중기 작가는 자신의 쓴 원고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사에 가져가게 허락해 준 거는 아니었다. 자신과 사 온 술을 끝까지 마시면 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며칠째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머리가 아파 진통제까지 복용한 상태. 정도는 이중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솔직히 풀 컨디션이었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
다행히···.
“김 변이 술 좀 하더라고요. 한 짝에 들어있는 소주를 다 마셨을 때쯤 이 작가님이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길래, 제가 원고를 들고 달렸는데···.”
깜깜한 밤에, 그것도 취중에 산길을 달렸으니···.
큰 사고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정도는 넘어진 채 의식을 잃고 말았고,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는 이중기 작가의 원고가 반은 바람에 날아가 버렸고 나머지 반은 웅덩이 물에 젖어 해독할 수 없는 상태였다.
“타이레놀만 먹지 않았어도···.”
-그래서 지금은 어디야?
“산 밑에 편의점입니다. 어떡하죠, 변호사님?”
이중기 작가는 모든 원고를 육필로 쓴다. 즉, 직접 손으로 쓰기에 복사해놓지 않는 한, 세상에 한 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펜으로 직접 쓰는 마당에 자신이 쓴 글을 복사해 둘 인물은 당연히 아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건 육필로 쓰는 이중기 작가의 머릿속에 글의 상당 부분이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뿐···잠깐.
-김아인 변호사는 어디 있어?
“네? 김 변이요? 아, 암자에 뻗어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제가 원고 들고 튀면서 이 작가님 좀 잡아두라고···.”
-혹시 김 변이 읽었어?
“네?”
이중기 작가의 이상한 버릇 중 또 하나는 자신의 원고를 누군가에 읽혀보고 자꾸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자신 밑에 문하생하고 출판사 사장, 직원들에 초고들을 읽혀보게 했지만,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긴 아픈 기억이 있어, 지금은 서지우와 법무법인 해결 변호사들만 믿었다.
-이 작가님 원고를 김 변이 읽었냐고?
“아···훑어보는 것 같기는 한데, 저희가 어제 워낙 술을 많이 마셔서···.”
-확인해봐.
“뭘?”
-김아인 변호사하고 확인해보고 연락 줘. 어쩌면 그 친구가 윤 변의 구세주가 될지도 모르니까.”
아리의 능력을 본 적이 없는 윤정도는 서지우의 말귀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럴 수밖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받지 않는다.
얼굴과 옷이 흙으로 지저분해져 있고,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정도는 암자가 있는 곳을 향해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춘천시 근처,
이름 모를 산속의 한 암자.
이중기는 자신의 술잔과 자신 앞에 있는 젊은이의 술잔에 마지막 술을 따랐다.
초저녁부터 마셨는데, 어느덧 해가 중천이다.
“자네, 술 좀 하는구만.”
“네엡.”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둘 다 얼굴이 벌건 것이 얼큰하게 달아올라 있다. 자그마치 소주 60병이다.
윤정도가 열 병가량 마셨으니, 둘이서 스물다섯 병씩 마신 꼴이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거만 마시면 원고 주시는 겁니다. 할아버지.”
“뭐? 할아버지? 떽! 결혼도 안 해본 사람한테 할아버지라니.”
“딸꾹. 그럼 오빠라고 불러드릴까요?”
“오빠? 흐흐흐, 그것도 좋네.”
아리는 마지막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자, 이제 오빠 차례······.”
드르렁- 드르르헝-
이중기는 마지막 잔을 끝내지 못하고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이겼다. 히히히.”
아리는 옆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한잔 가득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무 살 이후로 이렇게 마신 적은 처음이다.
혀가 꼬이고 머리가 살짝 어지럽지만, 걷는 데는 문제 없다.
그녀는 눈을 뜬 챈 잠이 든 이중기 작가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고 암자를 나왔다.
바로 그때,
“김 변호사!”
“아- 윤 변호사니임~.”
“괜찮아?”
“네, 괜찮아요. 헤헤.”
“작가님은?”
“주무세요. 제가 이겼어요. 헤헤. 근데 변호사님 몰골이···딸꾹···왜 그러세요?”
대한민국 상위 0.1% 주당과 싸워 이긴 신입 변호사의 썰도 궁금했고, 자신의 몰골이 왜 그 지경이 됐는지 하소연하고 싶은 맘도 굴뚝 같았지만,
가장 급한 건 따로 있었다.
“혹시 어제 이 작가님 원고 읽었어?”
“할아버지 원고요?”
“뭐?”
“진짜 재미있던데. 그거 드라마 만들어지면, 대박칠 것 같던데요.”
“읽었어?”
“네. 어제 초장에 두 분이서 얘기 나누실 때 옆에서 할 게 없어서 읽고 있었잖아요. 모르셨어요? 딸꾹.”
읽었다. 자, 이제 뭐?
잠깐. 혹시 한번 읽었다고 그걸 다 기억한다고?
설마 기억력이 좋다는 의미가······.
“김 변, 그럼 혹시 원고 내용 다 기억해?”
“그럼요. 어제 읽었는데.”
“아니, 줄거리 말고. 글자 하나, 하나 다 외웠냐고?”
질문에 씨익 웃는 김아리.
볼이 발그스레한 게 예쁘다.
하지만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윤정도는 알아채지 못한다.
“물론이죵. 외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