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33)

완전기억능력 (1)

술이 과했나 보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윤정도는 그가 애정하는 여아이돌의 숙취해소제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숙취해소제와 이온 음료를 골라 계산하고 나오는 순간, 어젯밤 같이 술 마신 동기로부터 전화가 들어온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어제 잘 들어갔냐?

“아- 죽겠네. 어제 우리가 몇 병이나 마셨지?”

-1, 2차에 합쳐서 아홉 병쯤 먹었나? 마지막에 양주가 셌지.

“그니까 3차를 가는 게 아니었어.”

-크크큭. 니가 가자고 했잖아, 이 새끼야.

“니가 사는 거니까.”

-돈도 많이 버는 새끼가 술값 가지고···.

“남이 사주는 술이 원래 더 맛있는 법이다. 어제는 잘 먹었다.”

-그러다 너 대머리 된다.

“내가 말 안 했나? 우리 아버지가 대머리야, 할아버지는 아니고. 난 아냐, 내 아들이 걱정할 일이지.”

-크크큭. 잘났다, 이 새끼야. 태어나지도 않은 애한테 벌써부터 저주나 해대고.

“저주는 무슨, 유전이지. 하긴 어떤 유전자는 저주 같지. 너 그 어깨 좁은 거 같은 거.”

-이 새끼가 술 잘 얻어 처먹고 왜 갑자기 시비야. 취했냐?

“그니까 왜 전화했어? 어제 실컷 봤으면 됐지. 왜 오늘 또 한잔하자고?”

-됐다. 오늘 또 늦게 들어가면 나 정말 이혼당한다.

“좋겠다, 씹새야. 너는 집에 여우 같은 와이프도 있고. 아— 나도 결혼하고 싶다.”

-하지 마. 너 어제 내가 한 말 잊어버렸냐? 실컷 놀다가 마흔 넘어서 결혼해. 아니, 오십 넘어서 결혼해. 아니다, 내 생각에는 환갑도 늦지 않아. 그래, 너는 환갑에 결혼해라, 환갑잔치와 조인트로. 환갑 웨딩.

“이 새끼가,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해서 저주를 퍼붓네. 야, 계속 헛소리 해댈 거면 끊는다.”

-야야, 끊지 마. 하나만. 하나만 확인하고 끊어.

“뭐?”

-그래서? 니네 대표가 소희 면접 보기로 한 거는 확실한 거지?

“응?”

순간 어젯밤 술김에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윤정도가 보기에는 경쟁이 될만한 지원자도 없었고, 서지우도 김아인 지원자를 본 뒤, 만족스럽지 못하면 한소희 변호사 면접도 보자고 언급했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너 대답이 왜 그래? 너 설마 어제 술 먹고 헛소리한 거 아니지?

“아니야. 볼 거야.”

-너희 대표가 본다고 그랬어? 너희 대표 여자랑 일하는 거 싫어한다며?

“싫어하기는 무슨···. 내가 언제 그랬냐? 같은 실력이면 남자를 뽑는다고 했지.”

-소희 정도면 그 또래 변호사 중에서도 상위 1%야. 광현에서 내후년에 유학 보내주기로 이미 오퍼 확정했는데도, 너희 사무실에서 지원하겠다는 애야. 니네 펌을 까는 거는 아니지만, 남녀 통틀어서, 그 급의 변호사가 니네 펌 절대 지원 안 해.

“아, 근데 이 새끼가 아침부터 전화해서 남의 회사를 까고 지랄이야. 알아, 인마. 그러니까, 본다고.”

-너 본다고 했다. 나 방금 소희한테서 문자 받았는데, 면접 컨펌 됐다고 답장한다. 약속 지켜라. 안 그러면, 내가 너 어제 먹은 술 열 배로 토해내게 만든다.

“알았어, 알았어. 아, 이 새끼, 누가 지 처제 아니랄까 봐. 알았어, 오늘 중으로 내가 면접 날짜 박아서 통보할게.”

“오케이. 땡큐다. 그럼 그렇게 전할게.”

딸깍.

윤정도는 몰랐다. 어젯밤 서지우가 김아인의 면접을 보고 사실상 ‘막내’ 파트너로 영입했다는 사실을.

---*---

“오셨습니까?”

“어, 좋은 아침. 서 변호사님 출근하셨나?”

“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말 나온 김에 바로 확정하기 위해 윤정도는 서지우를 찾았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대표변호사 사무실로 향하려는 그의 발걸음을 비서가 잡았다.

“응? 죄송? 뭐가?”

“제가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뭘 확인해?”

퇴근 직전, 유이헌은 그날 당직이었던 (당직자는 평소보다 두 시간 늦게 퇴근함) 후배 이창현 비서에게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아인 지원자에 대해 언급하고 나갔다. 다만, 지시가 명확하지는 않았다.

후배는 윤정도 변호사로부터 따로 연락이 없으면 그가 별도로 해야 하는 일이 없는 줄 알고, 그대로 두고 퇴근해버렸다.

반면, 윤정도는 당연히 김아인을 돌려보냈을 거로 여겨 사무실에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홉 시 너머 복귀한 서지우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아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래서? 서 변호사님이 김아인 변호사 면접을 봤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윤정도는 어젯밤 상황을 잠시 추측해본다. 아무래도 정상 같지는 않다. 누가 면접 보러 와서 몇 시간씩, 그것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당연히 탈락이다.

“아, 알았어. 대표님이 잘 보셨겠지. 오히려 잘됐네, 내가 따로 볼 필요도 없고. 그럼, 그때 채용공고 다시 낼 준비하라고 한 거 있잖아. 그거 오늘 내자고 아무래도 다시 이력서를 받아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한소희 변호사님한테 연락해서 면접 스케줄 잡으려고 하니까 다음 주쯤 시간 편하실 때가 언제냐고 여쭤봐. 서 변호사님 스케줄 먼저 확인하고. 알았지?”

“아···그게···.”

“왜? 문제 있어?”

명확한 지시에 유이헌이 곤란한 표정을 지자, 윤정도는 궁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대표님이 출근하시면서 김아인 변호사가 오늘 면접 보러 다시 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으잉? 왜? 이미 보셨다며?”

“윤 변호사님이 보실 거라 하시면서···.”

이제 곤란한 표정이 된 건은 정도다.

“서 변호사님이?”

“네.”

“내가 왜?”

“그건 저도 잘···.”

비서가 답해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란 걸 인지한 윤정도는 곧바로 법무법인 해결에서 가장 큰 사무실로 향했다.

---*---

「“여기 적혀있던 내용이 기억난다고?”

“···네.”

“전부 다?”

“···네.”

“그럼 첫 구절부터 말해보라고 하면 할 수 있나?”

김아인은 정확하게 기억했다. 서지우는 중간쯤 그녀의 암송을 멈추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무리 지겨웠다고 해도 알지도 못하는 서류를 굳이 통째로 외웠을 리는 없을 거고. 혹시 포토그래픽 메모리 같은 건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본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아요.”

“···.”

삭제되어 있어야 할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당연히 놀라웠으나, 한번 본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지재법 3조.”

서지우는 그녀의 능력이 진짜인지 테스트해보고 싶어졌다.

“네?”

“지적재산기본법 3조 읊어봐요.”

“······.”

아까부터 유독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이제는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힌다.

“변호사가 된 지 1년도 안 돼서 벌써 다 까먹은 건가? 조금 전에 나한테 한번 본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뭐지?”

솔직히 그 조항을 암기하고 다니는 변호사가 몇이나 있을까? 설사 지적재산기본법을 잘 아는 변호사라고 하더라도 암기할 수 없는 조항이다. 암기할 필요도 없고.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기에 물은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 그가 정말 포토그래픽 메모리 갖고 있다면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거니까. 변호사 시험 준비하면서 한번은 봤을 테니까.

“기억 못 해요?”

“···네.”

둘만 있는 조용한 회의실 안에서마저도 겨우 들리는 작은 목소리. 김아인의 얼굴을 새빨개졌다.

뭔가 특별한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서지우는 살짝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한 번 더 테스트해보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법원 판례를 가져와 김아인에게 건네며 물었다.

“열 장. 읽는 데 얼마나 걸리죠?”

“···15분에서 20분···이요?”

폰트 사이즈 8, A4 용지 빡빡하게 적힌 문자들.

“20분 줄게요.”

읽으라는 지시. 그리고 20분 뒤에는 암기력을 테스트하겠다는 의미.

“···다 읽었습니다···.”

정확하게 11분 45초 걸렸다. 변호사치고도 빠른 편이다.

프린트를 돌려받은 서지우는 곧바로 요구했다.

“7쪽 하단에 적힌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인 공연성에 대한 판단’ 부분을 말해봐요.”

다시 한번 붉어지는 김아인의 얼굴에서 서지우는 그가 외우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입사 욕심에 면접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포장한 흔한 케이스라고.

하지만, 잠시 뒤, 그는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뭇거리던 김아인은 큰 숨을 들이마신 후 좀 전과는 다른 또박또박한 말투로 해당 부분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공연성은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으로서, 특정 소수에 대한 사실적시의 경우 공연성이 부정되는 유력한 사정이 될 수 있으므로, 전파될 가능성에 관하여는 검사의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다. 나아가 대법원은 ‘특정의 개인이나 소수인에게 개인적 또는 사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공연하다고 할 수 없고, 다만 특정의 개인 또는 소수인이라고 하더라도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 또는 유포될 개연성이 있는 경우라면 공연하다고 할 수 있다’고 판시하여 전파될 가능성에 대한 증명 정도로 단순히 ‘가능성’ 아닌 ‘개연성을 요구하였다.······.”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자, 그는 판결문 끝까지 암송해 내려갔고 그러는 동안 조사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전에 봤을 리가 없는 판례였다.

오늘 오전 대법원에서 전원 합의로 선고된 판결문이었다.

하나는 증명됐고, 이제 다른 능력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는 일만 남았다.」

*

똑똑똑.

“들어와.”

“변호사님, 어젯밤에 김아인 변호사 면접을 혼자 보셨다고···.”

윤정도는 다급한 나머지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응.”

“그래서 그 친구를 뽑으실 건가요?”

따지는 듯한 말투에 서지우는 윤정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윤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거 아니면 그럴 생각인데.”

“하아—.”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 다른 의견 있어? 보지도 않았잖아?”

“아···네, 그런 거는 아닌데···.”

“아닌데?”

“아니요. 보지도 않아서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그래서 내가 오늘 또 오라고 했어. 한번 봐 봐.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데, 특별한 능력이 있더라고.”

“아, 네···.”

윤정도는 이제 서지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서지우의 마음을 돌려 적어도 한소희의 면접이라도 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다.

“윤, 내 말 듣고 있어?”

“네? 아니요, 아니요. 근데요, 선배님. 그러지 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2차 지원자들 받아보고 김아인 변호사도 그때 면접을 다시 같이 보는 거는 어떨까요?”

윤정도의 입에서 ‘선배’라는 말이 나왔다는 건 간절한 상황이라는 것.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렇죠. 굳이 그럴 필요가···아! 있습니다.”

“?”

“제가 오늘 이중기 작가님을 뵈러 가야 해서 오늘은 스케줄 상 면접 보기가 좀······.”

“그래?”

“예.”

“그럼 내일 봐.”

“내일요? 내일은 중재가 있어서···.”

그다음은 다음 주로 넘어가고, 최신일 변호사가 더 이상 출근하지 않는다.

“그래?”

“예.”

“그럼, 데리고 가.”

“예?”

“이중기 작가님 원고 받으러 가는 거잖아?”

“예.”

“그러면 김아인 변호사를 데리고 가라고. 가면서 면접을 봐. 어차피 왔다갔다 차 안에서 딱히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서지우는 이미 마음을 결정한 듯했다.

“······네, 알겠습니다.”

선배의 지시에 윤정도는 자꾸만 찌그러지려는 표정을 겨우 숨기며 대표변호사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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