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3)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파트너 변호사님이 두 분 다 출타하셨어요. 면접 스케줄을 변경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가 좋을까요? 아니면, 원하시면, 기다리셔도 되긴 합니다. 한 시간쯤 뒤며 윤정도 변호사님이 돌아오신다고 하기는 했거든요.”
“음······아······. 기다릴게요.”
“그러시겠어요?”
남자 비서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린 김아리는
“···네.”
라고 대답했다.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그녀 자신도 정확히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그 공간이 좋았다.
쫓기는 것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성역 같았고, 아무도 찾지 못하는 도피처 같았다.
들킬 때 들키더라도 지금은 그냥 이곳에 있고 싶다.
“저기, 저거 먹어도 되나요?”
그녀는 나가는 비서에게 회의실 한편에 구비된 음료와 다과를 가리키며 물었다.
---*---
“변호사님, 여기요. 녹취록.”
윤정도로부터 녹취록을 받은 서지우는 서연출판사 대표에게 양해를 구해 조용히 혼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방을 빌렸다. 그리고는 녹취록의 내용을 지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제작사와 미팅이 진행되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온 서지우는,
“녹음 파일을 다시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고, 상대방 변호사가 괜히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제작사 측 변호사는 ‘흥’ 소리가 들릴 정도로 콧방귀를 뀌고는 휴대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치이이익—
“뭐야? 왜 이래? 강 변호사님, 강 변호사님이 혹시 지우신 거 아니에요? 왜 아무 소리가 안 나오죠? 한 이사, 컴퓨터 파일에 사본 저장해 놓은 거 있지?”
“네.”
“그거 틀어봐.”
“네, 알겠습니다.”
미팅에 참석한 상대방 측 임원이 컴퓨터 파일에 저장된 사본 음성파일을 재생했지만, 결과는
치이이익-
똑같았다.
음성이 삭제되었다.
파일 속에서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럼, 합의를 다시 시작해볼까요?”
---*---
회의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산공원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의실에 홀로 남겨진 지 꽤 시간이 지났다.
분명 기다리라고 했던 한 시간은 이미 지난 것 같다.
하지만, 따로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음식도 있었고 오히려 이곳에서 밖으로 나가면 현실이 쫓아올까 봐 두려웠다.
그래, 그거였다.
그녀는 그저 잠시 쉬고 싶었을 뿐이고 이곳은 그녀에게 너무나 훌륭한 안식처였다.
앉아만 있던 그녀는 다리도 펼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섰을 뿐인데,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이 다르게 느껴진다.
높아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시선이 달라진다.
아리는 회의실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로펌이라는 곳이 원래 이렇게 모던하고 세련된 곳이었나?
오빠와 엄마의 교통사고 때문에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간 적은 있었는데, 그곳의 분위기와는 천지 차이가 났다.
자신의 오빠가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 그녀는 처음으로 부러웠다.
한참 동안 회의실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그녀는 아까부터 다과 테이블 한쪽 끝에 놓여 있던 서류에 눈이 갔다. 마치 각본처럼 사람들의 대화가 적혀있던 서류.
아리는 무심결에 서류를 집어 들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딱히 흥미가 가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술술 읽히는 대화체였기에 어느새 그녀는 끝까지 보게 되었다.
영상화 판권 거래 관련하여 계약을 맺는 내용.
10분 만에 문서를 다 읽은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기 위해 문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
그녀가 내려놓은 문서 위 프린트된 글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헉!”
---*---
음성파일을 지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영상처럼 원본 기록의 코드를 불러내 삭제하는 방법과 또 다른 하나는 녹취록을 만들어 삭제하는 방법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원본 기록을 받아내기는 힘들 것 같았기에, 후자를 택했다.
다만, 두 번째 방법을 이용할 시 조심해야 하는 점은 한 종류의 녹취록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 음성파일에 두 개의 다른 녹취록이 존재한다면, 해당 음성파일은 삭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같은 음성파일을 듣고 해당 파일 속 웃음소리를 ‘하하’라고 작성한 녹취록과 ‘호호’라고 작성한 녹취록 두 종류가 존재한다면, 녹취록 자체만 지워질 뿐 해당 음성파일은 지워지지 않는다.
서지우는 상대가 녹취록을 만들었을 거로 생각지 않았고, 그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아, 독한 사람들.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네요.”
음성파일이 지워졌다고 분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음성파일 존재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을 뿐, 음성파일의 내용이었던 이면계약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존재했다. 고로, 증인들은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
상대방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고, 결국 몇 시간간에 걸친 치열한 협의를 통해 합의를 도출해냈다.
사건을 해결하고 서연출판사 사무실을 나왔을 땐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다.
“어떻게? 사무실로 돌아갈 거야?”
서지우의 질문에 윤정도는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는 동기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그럼.”
“사무실에 들어가시게요?”
“응. 오늘 내로 보내야 할 이메일들이 있어.”
“혹시 제가 도와드려야 할···.”
“됐어. 어차피 내가 처리해야 할 것들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지우에게 꾸벅 인사를 한 윤정도는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변으로 걸어갔다. 그와의 면접을 기다리고 사람이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
아홉 시가 넘었다.
영원할 것 같은 편안함은 불안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쫓기는 삶에서 한두 시간의 휴식은 꿀맛이지만, 현실에 두고 온 망령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집에 두고 온 식물인간 오빠.
하루 뺀 아르바이트.
요양병원에 있는 엄마.
빚쟁이들.
정말 나가기가 싫다. 나가는 순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실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포마드를 발라 무작정 뒤로 넘긴 짧은 머리칼.
어색하게 걸쳐진 오빠의 양복.
‘나는 누굴까? 김아리? 김아인? 내가 오빠보다 공부도 더 잘했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여버린 거지?’
나갈 필요도 없었다. 현실은 창 너머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겁이 난 아리는 곧장 문으로 달렸다.
그 순간, 좀 전까지 아무도 없던 문 앞에 누가 나타났다.
쿵!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아니, 피부는 그것보다 훨씬 젊다.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이십 대로 보였을 것이다.
단지, 그가 짓고 있는 엄숙한 표정과 표정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절대 어린 남자의 것일 수가 없기에 든 추측이다.
보이기에는 마른 편인데 순간 벽하고 부딪힌 줄 알았다.
187? 188?
크다.
훤칠한 남자는 손을 내밀어 주지도 않는다.
“누구지?”
낮게 깔린 음성. 목욕탕 목소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이톤은 절대 아니다.
“네?”
“누구냐고?”
“아···. 저는···김아···인이요.”
“김아인? 지원자?”
“예···.”
서지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게···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려?”
“네.”
서지우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그는 곧장 윤정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건다.
황당한 시츄에이션이었다.
김아인을 회의실로 안내한 비서 유이헌은 윤정도에게 김아인이 기다리겠다고 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다만, 서연출판서의 일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정도는 당연히 김아인이 돌아갔을 거라 여겼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비서가 퇴근 직전, 한 번 더 확인해주는 것이 맞고, 변호사 역시 한 번 더 비서에게 확인하는 것이 맞지만, 그날은 둘 다 그 ‘한 번 더’를 잊고 말았다.
로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해도 보통 변호사들이 늦게까지 일하는 법률사무실 직원들은 퇴근 시 사무실에 아무도 없으면 문을 잠가놓고 퇴근한다.
그러면 외부 미팅이나 저녁 식사 후 돌아온 변호사가 열고 들어와 일을 마치고 밤늦게 혹은 새벽에 퇴근하며 다시 문을 잠근다.
운명이었을까?
그날은 김아리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딸깍.
통화를 끊은 서지우는 잠시간 김아리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끈기가 좋은 건가, 아니면 미련한 건가.”
“······.”
“그럼, 이왕 기다린 거 면접을 볼까?”
면접이라는 말에 아리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
“변호사가 된 이유가 뭐예요?”
“우리 로펌에 지원한 이유는?”
“지원서에 급여가 높아서 지원했다고 썼던 데,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요?”
신기했다.
압박 면접이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터질 것 같았던 심박수가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진짜 붙을 거라 기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거짓말 한 스푼 보태 말하면, 면접이 끝날 때쯤 그녀는 자기가 마치 국내 최고 엔터테인먼트 로펌에 지원하러 온 실력 있는 신입 변호사인 마냥 여유가 생겼다.
“그게 다인가요?”
“네.”
“더는 물어볼 게 없네요. 알겠습니다. 돌아가시면 내부회의해서 통보하도록 하죠.”
물론 그렇다고 자신 앞에 이 냉정하게 생긴 남자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아, 혹시 비서한테 면접비는 받았어요?”
면접비 같은 게 있다는 사실에 아리는 순간 놀랐다. 처음 들었다, 세상에 그런 게 있는 줄은.
“면접비요?”
“안 받았으면 내일 사무실에 연락해요. 비서가 송금해줄 겁니다.”
“아, 네···. 근데···.”
“?”
“얼마인가요?”
비록 짧은, 30분도 안 되는 만남이었지만, 처음이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황당한 표정을 짓는 얼굴은.
“면접으로 보러온 분들에게 십만 원씩 지원하고 있습니다.”
“와- 십만 원이요?”
“왜요? 적나요?”
“아니요, 아니요. 많아서요.”
서지우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지원자에게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딱히 좋은 방향은 아니었지만.
“됐나요?”
“네, 고맙습니다.”
“그럼, 조심히.”
그렇게 서지우가 회의실을 나서려는 순간,
“저기···.”
“뭐죠?”
“한 가지 궁금한 게 더 있어서···.”
“?”
“혹시 변호사들은 지워지는 잉크 같은 걸 쓰나요?”
순간 그것이 왜 궁금했을까? 그냥 궁금했다.
타이밍이 이상하기는 했어도, 몇 시간 전 눈앞에서 사라진 글자들을 보고 계속 의문이 들었던 아리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물어볼 기회가 없어서 그랬을까?
“?”
“아까 저기 문서를 보고 있었는데 순간 거기 있는 문자들이 다 지워지더라고요. 마치 누가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 것처럼. 로스쿨···어험···에험···교수님한테서도 그런 게 있다고 듣지 못했는데···궁금해서요. 새로 나온 기술인가 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든다. 말하는 도중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표정이 급격히 진지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문서를 봤지?”
“네? 아, 저기 테이블 위에 있던 문서를···.”
서지우는 다과가 놓였던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가 문서를 집어 들었다. 빈 용지. 30 페이지쯤 되는 A4 용지에는 아무런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여기 뭐가 적혀있었는데?”
“네? 아···그냥 사람들 대화들···.”
“녹취록?”
“아, 네. 그런 거 같았어요. 녹취록.”
더 심각해지는 그의 표정.
“그게 기억난다고?”
“네? ···네.”
“뭐가 적혀있었는데?”
질문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되물었다.
“어느 부분을 원하시나요?”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그는 지금 그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재능 중 하나를 물은 것이었다.
Eidetic memory. 완전기억능력.
“17페이지 적혀있었던 내용.”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그런데,
“‘장 대표님, 대표님이 하도 보안을 걱정하셔서 그냥 구두로 약정하기는 하는데, 정말이지 나중에 다르게 말씀하시면······.’ ‘걱정 마.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이 사장. 솔직히 이면계약서를 써서 그게 나돌아다녀도 이 사장한테 좋지 않잖아.’ ‘그렇기는 한데···.’”
내버려 두자, 그녀는 페이지 전체 내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읊었다. 그녀를 보고 있는 서지우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녀의 기억은 삭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