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33)

데스티니 (1)

오전 10시, 법무법인 해결.

이제 막 출근해서 ‘최고의 각성제’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기 위해 휴게실로 향한 윤정도는 휴게실 앞에서 생식을 챙겨 나가는 최성태 사무장과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변호사님.”

언제나처럼 간결하지만 깍듯하게 인사를 한 그는 동료들끼리 흔히들 주고받는 시시콜콜한 잡담 하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무뚝뚝한 최성태를 지나쳐 마침내 휴게실 안에 들어서니, 먼저 출근한 최신일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오셨어요?”

“나도 한 잔, 플리즈.”

“변호사님은 그냥 에스프레소 드시죠?”

“응.”

최신일은 이제 막 내린 추출한 커피를 선배에게 건네고, 그는 다시 그라인더를 돌렸다.

씨이이잉—

“어제 한잔하셨어요?”

“아니. 왜 그래 보여?”

“약간 피곤해 보이셔서요.”

“피곤해. 삼십 대 중반이란 게 이런 건가? 예전에는 밤새워 놀고 출근해도 다음 날 멀쩡했는데, 요새는 한두 시에 자도 피곤하단 말이야. 최 변은? 갈 준비 다 했고?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잖아?”

“준비는 여자친구가 다 해서 저는 별로 할 게 없어요.”

“그래도 고마워. 바쁠 텐데, 사무실 일손 부족하다고 마지막까지 출근해줘서.”

“아닙니다. 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직 후임자도 못 구하시고···. 죄송합니다.”

“아니야. 인생이란 게 원래 다 그렇지 뭐. 늘 변수가 있지.”

징이이잉- 쪼르륵-

진동 소리와 함께 검은 액체가 얼음이 담긴 머그잔 안으로 떨어졌다. 정수기 물을 부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만든 최신일은 음료를 들고 윤정도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변호사님, 최성태 사무장님이요. 전직 형사라고 하시던데 맞나요?”

“응. 우리 로펌 들어오기 전에 강력부 형사이셨지. 왜?”

“아니요. 되게 포스 있어 보이셔서요.”

“포스 있지. 근데 또 말해보면 의외로 섬세하신 분이야.”

“아, 그래요? 저는 사실 여기 1년 근무했지만, 사무장님하고 대화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랬던가?”

“네, 부탁할 게 있으면 저는 주로 송무팀 충오 대리한테 부탁을 해서···.”

“그랬구나. 말수가 없으셔서 그렇지, 사무장님 나이스 하셔.”

“아, 네···. 어제저녁에 충오 대리랑 밥 먹었는데, 이번에 그 남수지 배우 계약 해지 건 때문에, 대표님이 사무장님에게 뭘 부탁하신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네. 근데 들어왔는데 주먹에 상처가 있으셨다고···.”

“너무 깊게 알려고 하지 마.”

“왜요?”

“알면 다쳐.”

농담인 줄 눈치채지 못하고 순간 당황한 최신일.

윤정도는 그런 그를 보고 낄낄거렸다.

“크크큭. 농담이야, 농담. 은근 잘 속는단 말이야. 뭔 일이 있었겠지. 아무튼 어제 대표님하고 잠깐 통화했는데, 남수지 씨 계약 해지 건은 잘 해결됐대.”

“그래요?”

“응. 저쪽에서 무슨 있지도 않은 동영상으로 협박하려고 했다나 봐.”

“아아···.”

“나 참, 요새도 아직 그런 쓰레기가 있어. 아, 맞다. 서 변호사님하고 셋이 한잔해야지. 남수지 씨 일 때문에 저번에 회식도 참석 못 하셨잖아.”

“안 그래도 혹시나 이번 주에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때 그냥 치킨에 맥주라도 하실 수 있을까 해서 여쭤보려고 갔는데, 아직 출근하지 않으셨더라고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평소 아홉 시 반까지 출근하는 서지우였다.

“그래? 오늘 오전에 미팅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제 한잔하셨나 보네. 논현동에 늘 가시는 바가 있거든, 일이 많거나 그러면 가끔 혼자 가서 한잔 씩 하시더라고.”

“대표님은 혼자 마시는 거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I잖아.”

“어, 대표님도 MBTI 하셨어요?”

“아니.”

“근데 어떻게···?”

“그 양반 딱 봐도 I야. 똥인지 된장인지 찍먹해봐야 아나. 그냥 알지. 어찌 됐건, 이따 오후에 신입 변호사 면접 있거든. 그때 내가 한번 여쭤볼게. 없어도 시간 내실 거야. 이제 진짜 마지막인데.”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느라 벌써 삼십 분가량 지났다.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최신일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저렇게···. 변호사님은 더 계실 건가요?”

“아니야. 일해야지. 아우- 진짜 일하기 싫다. 어디는 벌써 벚꽃도 폈던데, 최 변,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 째고 벚꽃 구경이나 갈까?”

“네에?”

“아, 나 봄 타나 봐.”

“소개팅하실래요? 여자친구 주변에 변호사 소개해달라는 동창이랑 친구들 엄청 많은데.”

“최 변, 나는 말이지. 나는 그런 인위적인 만남을 좋아하지 않아. 그 뭐랄까? 운명적인 만남. 그런 게 좋아.”

“그래서 클럽을 좋아하시는군요?”

“그곳에는 온 세상이 둘을 연결해주시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듯한 그런 날 것의 사랑이 있지.”

“아···예.”

“그걸 세상은 ‘데스티니’라고 하지. 너는 내 데스티니~ 떠날 수 없어 난~”

“어험, 콜록콜록.”

“왜 그래?”

“갑자기 사레가···. 변호사님, 그럼 전 먼저···.”

“야, 어디가! 너 내가 부끄러운 거야? 그런 거야? 최 변!”

---*---

조선 팰리스 호텔, 32F.

침대 시트를 몸에 두르고 침대 한쪽에 걸터앉은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저를 그런 쉬운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몇 살쯤 됐을까? 스물다섯? 설마 스물넷?

어젯밤 바에서 봤을 때는 이렇게까지 어려 보이지는 않았는데.

“몇 살이야?”

“···스물둘이요.”

골치 아프게 됐다.

세 번째 아내와의 첫 만남이 이랬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그녀는 나와의 하룻밤을 운명처럼 여겼고, 결국 하룻밤 인연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다.

관계를 먼저 가져 오래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황에서 하룻밤의 환상으로 시작된 결혼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작용’을 안일하게 여겼던 것이 근원이었다.

그후로 나는 몇 가지 룰을 만들었다.

첫째, 앞으로 연애는 없다.

둘째, 삭제 능력 사용 후, 웬만하면 24시간 안에 부작용을 해소하고 적어도 72시간 안에는 꼭 해결한다.

셋째, 스물다섯 미만의 여성과는 관계를 갖지 않는다.

넷째, 한번 관계를 맺었던 여성과는 절대 두 번 관계를 맺지 않는다.

다섯째, 라스베가스에서는 삭제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섯째, 정조 관념이 강한 여성을 피한다.

일곱째, 끊어야 할 때는 확실하게 끊어내야 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성욕이 강해지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지속적인 관계가 가능한 파트너를 찾았다.

그런데 성욕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성에 대한 모든 것, 즉 감정, 매력, 성력 등 섹슈얼리티가 증폭하는 것이었다.

관계가 지속될수록 서로에 대한 감정 역시 고조되어,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결국 결혼을 고려하게 된다.

그게 하룻밤의 사랑을 고수하는 이유이고, 위와 같은 규칙을 만들게 된 이유였다.

“이름이 현주라고 했나?”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이래서 규칙 No. 3가 생겼다.

경험상, 스물다섯 미만의 여성은 그렇게 보낸 하룻밤을 운명적으로 느끼는 경향이 높았기에.

그녀들의 잘못은 없다. 그렇다고 착각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쉬운 여자는 몸을 쉽게 주는 여자가 아니라 마음을 쉽게 주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스물두 살의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이해했을 땐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젠장, 저 반응은 이미 자기감정에 70%쯤 빠졌다는 의미다.

신기하게도 이 부작용의 효과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하룻밤 만에 70%는 오랜만이다.

사랑에 굶주렸거나 아니면 금사빠이거나 둘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그럼 당신은 나와 보낸 어젯밤이 아무 의미 없었나 보군요?”

‘당신?’ ‘보군요?’ 문어체다. 감정이 격해졌다는 의미다.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나?”

“어리다고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방금 한 말, 지금 나더러 연락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다행히 울지는 않는다. 대신 표독스러운 표정. 차라리 이게 낫다.

“연락하면 곤란할 거야.”

“왜죠?”

규칙 No. 7, 끊어야 할 때 확실하게 끊어내야 한다.

나이스 가이는 우유부단한 남자를 에둘러 칭하는 표현일 뿐. 우유부단함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어젯밤은 그저···.”

술에 취해 본능대로 행동한 하룻밤이었을 뿐이라고.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명확하게 하려는 순간.

“혹시, 유부남이에요?”

어라?

살다 보면 진실보다 착각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운명과 우연이 그렇다. 원인 없이 멋대로 일어난 일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들의 만남이 필연적이었다고 믿는 것처럼.

“좋을 대로 생각해.”

---*---

“아인아, 우리 아인이 왔구나.”

지독하다, 진짜.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엄마는 기억이 그 모양이 됐는데도 오빠만 찾는다.

“김아리 씨, 병원비가 벌써 3개월 치 밀렸어요. 이러면 저희도 정말 곤란해요. 다음 달까지 밀린 병원비 완납하지 못하면, 저희도 더는 어머니를 맡을 수가 없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요양병원 사무장은 빚쟁이처럼 독촉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떡해서든 돈을 꼭 마련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아리 씨, 사정이 딱한 건 알겠는데요. 여기 딱한 사정 있는 사람들 많아요. 아리 씨뿐만이 아니라고요.”

“···죄송합니다.”

“남에 인생에 미주알고주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저번에 통화하는 거 보니까, 사방에 돈 꾸고 다니는 것 같은데, 맞죠?”

“······.”

“그렇게 해서는 얼마 못 버텨. 돈 꿔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직장을 구해야지. 혹시 뭐 자격증 같은 거 없어요? 없으면 호스피스 보조 같은 거는 자격증 없이도 할 수 있는데, 관심 있어요? 원하면 내가 알아봐 줄게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요. 죄송해요.”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게 어디 있어. 사람은 다 일을 해야지. 평생 돈 꿔서 어머니 병원비 낼 거야? 아가씨, 정신 차려. 일을 해야, 이 상황을 깨쳐나갈 수 있는 거야.”

말투는 사나웠지만, 의도는 따뜻했다.

하지만, 사무장님은 몰랐다. 우리 집에 환자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김아인,

나의 쌍둥이 오빠.

---*---

법무법인 해결, 회의실.

지원자들 면접을 끝내고 나온 서지우의 표정은 썩 그리 좋지 않다. 급하게 공고를 내서 그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

“몇 명 더 남았지?”

“이제 내일 볼 사람 두 명 남았습니다.”

윤정도가 이름을 언급했지만, 서지우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비록 서류상이었지만, 애초에 가장 마음에 드는 지원자들 순으로 면접 날짜를 정한 것이었기에, 내일도 크게 기대할 수가 없었다.

“저기···괜찮으시면, 그때 말씀드린 한소희 지원자를 한번 보는 것도···.”

“그러지 말고, 몇 개월 전에 우리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이력서 보낸 친구 있잖아?”

“누구···?”

“왜 그 우리 회사 연봉이 제일 세서 지원한다고 했던 지원자.”

“아···네···. 그···그···이름이 뭐였더라···배우 이름하고 똑같았었는데···.”

“그래, 그 지원자. 이왕 보는 거 그 친구도 한번 보는 게 어때?”

“거기는 근데 너무 대놓고 돈이라고 하는 게···.”

“어차피 대부분은 아닌 척하지만, 돈이 제일 중요한 건 사실이잖아. 나는 솔직해서 좋았는데. 자리가 없어서 거절한 것뿐이지. 이렇게 된 이상 새로운 스타일의 지원자도 한번 보자고.”

“이왕 새로운 스타일의 지원자를 볼 거면, 여성 지원자들도···.”

“그럼, 그 사람한테도 연락해 봐.”

“네, 알겠습니다.”

윤정도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서지우의 등을 보며 입을 빼죽거렸다.

“쩝. 왜 저렇게 여자랑 일하는 걸 싫어하실까? ···결혼 트라우마는 극복할 때 안 됐나? 그나저나 그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머리를 긁적이며 비서에게 물으러 가는 순간, 지원자의 이름이 기억났다.

“아, 맞다! 김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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