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33)

자꾸만 쓰게 되는 능력 (4)

처음 삭제 능력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여혜린과 이혼 후, 캘리포니아의 큰 로펌에서 시간당 50불을 받고 계약서 검토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계약서 내용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 체결 전 오타나 기계적인 실수를 집어내는 계약직이었다.

이혼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한테는 꽤 괜찮은 직업이었다. 거의 기계적으로 문서 검수만 하면 되었기에, 복잡했던 머릿속을 비우기에 최적이었다.

열심히 했다. 기계적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보면 떠오르는 잡생각을 쉬 떨쳐버릴 수 있었다. 당연히 능률이 올랐고, 로펌은 다른 계약직 변호사들보다 효율적인 내게 시간급을 올려주며 더 많은 검수 일을 맡겼다.

문제는 내가 아직 이혼의 충격을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오타 하나를 집어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중요한 계약서가 파기되고 말았다.

물론 오타 하나에 계약서가 파기된다는 건 근본적인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다들 그걸 이해했지만, 오타가 없었다면 의뢰인에게 유리했을 것이었으므로 로펌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결국 해당 계약서를 작성한 변호사는 사표를 쓰게 생겼고, 나 역시 계약직에서 해고될 상황에 놓였다. 어차피 임시직이었기에 나는 별 상관없었지만, 작성을 담당 2년 차 변호사에게는 미안했다.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던 그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체결 직전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건너뛰었던 게 원인이었기에.

‘NOT’이라는 한 단어 때문에 생긴 일.

정말 미안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왜 이걸 못 봤을까? 왜 이렇게 단순한 오타를 못 집어냈을까? ’

사무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서류를 검토하던 나는 무심결에 해당 실수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진짜 지워진 것이다.

문서에서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오성전자입니다.

“호영아, 난데. 부탁할 일이 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해서, 하나둘 능력을 시험해 보는 나는 ‘언어’로 된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순히 문서뿐만 아니라 디지털 파일처럼 기계어 혹은 프로그래밍 언어로 교환될 수 있는 기록들은 무엇이든 지울 수 있다는 것을.

즉, 동영상 같은 파일을 지우기 위해서는 해당 파일의 소스 코드 텍스트 파일을 불러내야 했다.

“그때 일반 컴퓨터에서 사진이나 동영상 파일의 소스 코드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그랬지?”

-코드요? 아, 네. 별로 어렵지 않아요. 혹시 앞에 컴퓨터 있으세요?

됐다.

이제 원본만 회수하면 된다.

그런데······.

---*---

“원본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요?”

남수지의 전 남친, 지성운을 만나고 온 최성태 사무장은 원본을 찾지 못했다.

“네. 휴대폰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당시, 정현택하고 합의하는 자리에서 빼앗겼다고 합니다.”

“빼앗겼다고요?”

“네, 합의하러 나온 자리에 정현택이 양아치들을 데리고 모양입니다. 지성운 말로는 약속한 합의금도 다 주지 않고 영상이 유출되면 죽인다는 협박을 한 뒤에 전화기를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그다운 행동이다. 납득이 간다.

문제는 그렇다면 최초 촬영한 영상을 정현택이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알겠습니다. 사본은요? 사본 존재 여부는 확인하셨나요?”

“네. 사본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확실한가요?”

“99% 확신합니다.”

최성태 사무장.

강력부 형사 출신으로 죄지은 사람들로부터 진실을 알아내는 데 기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의 수단이 백프로 합법적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딱히 처벌하기에도 모호하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당한(?) 사람들이 처벌을 원한 적이 없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넵.”

사본이 없다. 사본이 없는 건 환영할 일인데···.

만약 영상이 정현택 손에 있는 거라면, 사안이 살짝 복잡해진다.

잠시간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서지우는 수화기를 들었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입니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

몇 시간 뒤,

Zoom 엔터테인먼트 회의실.

똑똑똑.

“대표님, 서지우 변호사님이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그래?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가서 이윤성 이사도 불러와.”

“네.”

비서가 나가고, 잠시 뒤 법무법인 해결의 대표변호사가 들어왔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훤칠하니 참 잘났다.

양복 입은 태도 좋고 배우를 옆에 세워놔도 꿀리지 않겠다.

“변호사님 키가 어떻게 되세요?”

“184입니다.”

실없는 질문에 대답을 척척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오늘은 협상에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 쪽이라 불필요한 신경전은 피하려는 의도다.

“아, 역시 크시네. 배우를 하셨어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는······.”

똑똑똑.

이윤성 이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끊어졌다.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린 후, 하던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동영상 때문에 오신 거죠?”

정현택이 대신 말을 끝맺었다.

“네.”

“자, 뭐 서로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변호사님도 똑똑하신 분이고 저도 이 바닥에서 나름 머리 깨나 굴리는 사람입니다. 저번에 변호사님 사무실에 가서 잠깐 뵈니까, 변호사님도 시간 낭비 엄청나게 싫어하시는 것 같던데, 저도 마찬가지니까 툭 까놓고 얘기할게요. 향후 3년, 정산 비율은 7.5:2.5. 회계는 이제부터 외부 회계 맡길 거고, 원하면 6개월에 한 번씩 장부 검토 가능. 자, 이 정도면 변호사님 체면도 어느 정도 살려드렸죠? 그러니까, 가서 수지를 잘 설득해서 계약 해지 철회하게 하세요.”

대충 예상은 하고 있던 제안.

구체적인 건 몰랐지만, 결국 남은 계약 기간을 채우라는 말.

“그 이후에 동영상이 유출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죠?”

“계약 철회하면 동영상 바로 지우겠습니다.”

“그걸로 안 되겠는데요? 이미 유출되었을 수도 있고.”

“이미 유출? 노노. 그럴 일은 없지. 유출되었으면 벌써 카톡으로 돌아다니고 난리가 났겠지.”

“그렇다는 말은 동영상을 소유하고 있는 분은 대표님밖에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제 의뢰인의 전 남자친구가 복사본을 갖고 있을 확률은 없습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변호사님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이 바닥에서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었어요. 재 배우 일인데, 그런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죠. 그리고 그 새끼가 그런 걸 갖고 있었으면 진작에 풀지 않았겠습니까? 안 그래요, 변호사님?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조건이 있습니다.”

“뭐?”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동영상 유출될 경우, 그에 따르는 손해배상을 약속하는 계약서에 사인해주셔야겠습니다.”

“어떠한 이유? 내가 유출한 게 아니라도?”

“어차피 동영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대표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계약서 사인하고 곧바로 모든 영상을 삭제하시면, 유출될 가능성은 없겠죠. 안 그렇습니까, 대표님?”

정현택은 서지우의 조건을 잠시간 고민했다. 일리 있는 조건이지만, 그는 영상을 지울 마음이 없었기에 망설인 것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음···오케이. 당연하죠. 그런 계약서야 언제든지. 근데 괜찮겠어요? 그런 계약서를 만드는 거 자체가 동영상이 있었다는 또 다른 증명이 될 텐데?”

“동영상이 유출되었을 때 책임 소지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니까요.”

“좋아요. 계약서 쓰죠.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든지 할 수 있어~’ 그 노래 아세요, 변호사님? 너무 어렸을 때라서 모르시나?”

이미 이겼다는 생각에 정현택은 되지도 않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상대가 승리에 도취된 지금.

기다렸던 타이밍이 온 순간, 서지우는 진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성운으로부터 원본 영상이 담긴 휴대폰을 받으셨죠?”

“응? 아, 네.”

“그걸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아···그건 왜···?”

갑작스러운 요청에 정현택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게 대표님께 있어야, 제삼자를 통한 유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으니까요.”

제삼자를 통한 유출은 사본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서지우는 그저 원본 영상이 필요했고, 들뜬 나머지 가드를 내린 정현택에게 순간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를 던진 것뿐이었다.

“아···그게···.”

잠시 우물거린 정현택은 당당한 척 대답했다.

“폐기했어요.”

“폐기했다고요?”

“네. 사실 원래 내가 그런 영상을 들고 수지를 협박하려고 한 의도가 처음부터 있었던 거는 아니에요. 그 새끼한테 받아오자마자 확인하고 폐기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영상을 어떻게 갖고 계신 거죠?”

“확인했을 때, 우연히 자동으로 동기화가 되어서 사본이 남아있었던 거지.”

“우연히?”

“우연히. ······뭐 어쩌면 일이 이렇게 풀리려고 그렇게 된 것 아닐 가요, 변호사님?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헤헤.”

지성운의 휴대폰이 없다고?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휴대폰이 있는데 보여주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동영상이 중요한 거고, 사본을 만들어 놓았다면 지성운으로부터 빼앗은 휴대폰을 안 보여줄 이유가 없다.

사본은 안 만들었나? 그럴 리 없다. 수지 씨는 그날 정현택이 과수원에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사본을 만들어 놓았다는 건데···.

다른 건 몰라도 원 휴대폰이 폐기되었다는 건 사실일까?

이렇게 된 이상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좋습니다. 믿죠. 대신 영상을 봐야겠습니다.”

“네? 영상을요? 아, 아···. 흐흐흐. 영상을 보고 싶으시다? 못 보셨으니까? 흐흐흐. 아, 이해합니다. 변호사님도 남자시구나? 알았습니다. 이 이사, 가서 노트북 가지고 와.”

정현택의 지시에 이윤성을 노트북을 가지고 돌아왔다.

“혼자 볼 수 있을까요?”

“혼자?”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정현택과 이윤성은 저질스러운 농담까지 던지며 괜히 호들갑을 떤다.

“아, 아, 알겠습니다. 굳이 혼자···. 알겠습니다. 혹시 휴지 필요하세요? 흐흐흐.”

“···.”

“혹시나 해서 그러는 건데? 변호사님, 설마 영상을 지우시려고 그러는 거는 아니죠? 아시죠? 그 노트북에 있는 사본 말고 다른 사본도 있다는 거. 크크큭.”

정현택은 원본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계속 사본이라고 했다. 서지우는 내심 기대를 걸어본다.

정현택과 이윤성이 나가고 회의실에 혼자 남게 된 서지우는 남호영이 가르쳐준 대로 재빨리 동영상의 코드 텍스트 파일을 불러냈다.

그리고는 생소한 기계 언어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

5분 뒤.

“대표님, 영상이 없는데요.”

서지우의 말에 정현택과 이윤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영상이 없다니.”

“직접 확인해 보시죠.”

“이 이사, 확인해 봐.”

영상이 없다.

“어 왜 없지? 여기 있어야 하는데?”

“없어?”

“네.”

“저장을 안 했나 보지.”

“아닌데, 여기 있는 파일로 다른 것들 복사한 건데.”

“야, 됐고, 내 태블릿PC에도 저장해 놨잖아. 가지고 와봐.”

역시나 예상대로 사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

서지우는 제발 본인이 지운 영상의 원본이 그들이 말대로 폐기되었기를 염원해본다.

“여기도 없는데요.”

“뭐? 없다고?”

태블릿PC에 저장한 사본도 없는 걸 확인한 정현택과 이윤성은 이제 진짜 당황하기 시작한다.

“야, 내 책상에 USB 가져와 봐.”

다행이었다, 일반 사람들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자들이라서. 보통은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텐데, 만들어온 사본 영상이 모두 사라진 것을 인지한 그들은 서지우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야, 이 새끼야! 영상 어디 갔어? 어디 갔냐고!”

“모르겠는데요?”

“이 븅신 새끼야, 내가 사본 제대로 만들어 놓으라고 했지!”

“제가 안 만들었···. 근데, 무슨 사본이요?”

“응? 무슨 사본 이긴, 인마, 남수지가 지 남친이랑 찍은 동영상!”

“그거 폐기하지 않았나요?”

“뭐?”

기억이 바뀌고 있다.

---*---

삭제 능력에는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다.

첫째, 문서의 내용을 지우려면 원본이 필요하다.

둘째, 원본의 내용을 지우면 사본의 내용은 자동으로 지워진다.

셋째, 문서의 내용이 지워지면 그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들도 삭제된다. (변형된다.)

넷째, 디지털 파일을 지우려면 최초 기록의 코드를 삭제해야 한다.

다섯째, 만약 원본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사본을 지워도 마치 원본을 지운 것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

여섯째,······.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수지 씨, 해결됐습니다.”

-네? 정말요?

“영상 다 삭제되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Zoom 엔터의 사무실을 나온 서지우는 맘 졸이고 있는 의뢰인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논현동의 bar로 향했다.

삭제가 성공했다는 것은 능력이 통했다는 것이고, 능력이 통했다는 것은 곧 있으면 부작용이 발현한다는 의미.

될 수 있으면 능력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쓰게 된다.

이러다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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