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쓰게 되는 능력 (3)
「“이윤성 이사 좀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
정현택의 호출에 이윤성은 허겁지겁 Zoom 엔터테인먼트 대표실로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원본 찾았어?”
“그게······.”
못 찾았다.
똥 마려운 강아지같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윤성의 모습에 정현택은 불같이 화를 냈다.
“야! 씨발 새끼야, 내가 잘 챙기라고 했어? 안 했어? 했어, 안 했어! 이제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 잘 찾아봤어?”
남수지를 협박할 수 있는 영상이 담긴 전화기가 사라졌다.
원래는 회사 기밀 등과 함께 대표실에 있던 소형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물건이었는데, 몇 주 전 국세청과 검찰이 압수 수색을 하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물건을 다른 사무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다른 것들은? 금고에 있던 다른 물건들은 다 있기는 한 거야?”
“다른 물건들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왜 그것만 없어? 잘 찾아봤어?”
“잘 찾아봤는데···.”
“아아악! 씨발!”
그게 있어야 남수지를 잡을 수 있었다.
정현택은 목까지 빨개졌다.
“그게요, 대표님.”
“뭐? 이 새끼야. 빨랑 말해.”
“그때 검찰청에서 나왔을 때, 대표님이 파일들 다 파쇄하고 기록 저장했던 기기들 다 복구 불가능하게 폐기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아마 그때 그 전화기도 폐기 처리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하- 진짜 이 븅신 새끼가. 누가 너한테 사라진 원인을 알아내라고 했어?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남수지가 송세연네 과수원에 있는 걸 알면 뭐 할 거냐고? 그 영상이 없으면 가서 무얼로 협박할 거야? ‘제발 돌아와 줘, 베이비’ 하면서 빌 거야? 그걸 왜 부셔, 이 새끼야! 차명계좌 리스트랑 코인들 거래한 기록들 없애라고 했지, 내가 언제 그 전화기까지 폐기하라고 했어!”
정확히 말하면, 이윤성은 잘못이 없다.
당시 해당 물건을 옮긴 거는 다른 직원이었고 파쇄 명령을 내린 건 정현택 본인이었으니까.
정현택은 그저 소리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저기 근데요.”
“‘근데요.’ ‘근데요.’ 근대는 쌈밥집에서 파는 게 근대고, 이 새끼야! 할 말 있으면, 그냥 빨랑빨랑 좀 말해. 하 참, 머리가 나쁘면 행동이라도 빨라야지. 굼벵이처럼 굼떠 가지고는, 쯧. 너는 진짜 외삼촌만 아니었으면 벌써 잘랐어. 하-.”
“죄송합니다. 근데요, 꼭 그 전화기가 필요하신가요?”
“그건 또 뭔 헛소리야아-. 전화기를 찾아야, 영상을 찾을 거 아니야.”
“아···근데 혹시 전화기도 없어도 영상 사본만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예상치 못한 대꾸.
정현택은 영상의 사본을 별도로 만든 기억이 없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배우의 그런 은밀한 영상이 유출되면, 매니지먼트 역시 곤란하게 되기에, 남수지의 전 남자친구에게서 빼앗은 휴대폰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나 해서 그날 대표실에서 옮긴 물건 중 노트북이 하나 있길래. 그걸 살펴봤거든요. 근데 거기 사진 폴더에 있더라고요, 동영상이.”
“뭐? 영상이 그 노트북에 있다고? 그게 왜 거기 있어?”
“모르겠는데요. 누가 그 전화기에 있는 동영상하고 사진들을 다 그 노트북으로 옮겨놓은 것 같던데요.”
“응?”
정현택은 이유를 추리해본다.
어쩌면 그날 그 전화기를 파쇄한 직원이 혹시나 해서 안의 내용을 노트북에 저장한 뒤에 부쉈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현택이 맨 처음 전화기를 회수해왔을 때, 컴퓨터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해당 노트북에 연결했다가 자동으로 동기화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넌 이 새끼야, 사본을 찾았으면 그거부터 보고를 해야지. 잡소리만 늘어놓고···. 됐고, 그 노트북은 누구 거야?”
“사장님이 전에 쓰시던 거 같다고 하던데요?”
“내가? 아, 알았어. 그 노트북 지금 어디 있어?”
“제 책상 위에 있습니다.”
후자일 확률이 높아졌다. 어찌 됐건 영상을 찾았다는 게 중요하다.
“당장 가지고 와.”
“네.”
“확인하고 곧바로 양평으로 가자.”
“양평이요? 양평은 왜?”
“해장국 먹으러 간다. 왜?”
“아- 양평해장국이 맛있기는 하죠.”
“야! 이 븅신아, 거기 송세연이 과수원이 있잖아! 아, 저 멍청이 새끼를 죽일 수도 없고.”
원본은 분실했지만, 사본이 남아있었다.
노트북에 저장된 영상을 확인한 정현택은 순간 식겁했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남수지가 숨어 있는 송세연네 과수원으로 향했다.」
---*---
그날 밤,
최신일 변호사 환송 회식 자리에 가려던 서지우는 갑작스레 걸려온 남수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만나서 상의드릴 것이 있다고 말했다.
서지우는 회식을 참석하지 못하고 그녀를 만났다.
“사귀던 남자가 있었어요. 진심으로 사랑했죠. 그때만 해도 결혼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허락한 건데······.”
그녀는 전 남친과 ‘은밀한 동영상’을 찍었다고 고백했다.
“제가 유명해지기 시작하고 얼마 뒤였어요. 그 사람이 정현택 대표에게 연락해서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협박했고, 정 대표가 저 대신 그 사람을 만나 합의를 하고 동영상을 회수했어요.”
“회수했다고요?”
“그렇게 들었어요, ‘사본은 없고 원본이 저장된 휴대폰은 회수해서 파기했다’라고.”
“그런데 회사를 나간다고 하니까 파기했다는 그 영상이 남아있는 거겠네요?”
“······.”
서지우의 질문에 그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택 대표가 과수원으로 찾아와서 정확하게 뭐라고 말했죠?”
“처음에는 제 명의를 도용한 것과 비용 항목을 조작해서 수익을 가로챈 거에 대해 사과하면서 다시 잘해보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미 그런 단계는 지난 것 같다’, ‘계약 해지를 번복할 마음이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니까······. 얼굴을 싹 바꾸면서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을 보여줬어요. 지웠다던 그 영상이었어요.”
“협박하던가요? 계약 해지를 철회하지 않으면 영상을 풀겠다고?”
“정확하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였어요. 자기가 그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이제 자기 배우도 아닌 사람 일인데 자기가 굳이 보관할 이유가 있냐면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누가 가져가서 영상을 유출해도 그때는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협박이네요.”
“어떡하죠, 변호사님?”
상황이 꼬여버렸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 업계에 간혹 있는 일이다.
“몇 가지만 확인할게요. 형사 고발할 생각하시는 없으시겠죠?”
“네? 고발이요? ···그럼 제 인생도 끝나는 건데요···.”
예상한 답변이었지만 그래도 확인했어야 했다. 가장 확실하고 합법적인 해결 방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동의하에 찍은 영상인가요?”
“···네.”
“전 남자친구의 휴대폰으로요?”
“···네.”
“수위는요?”
“······.”
대답이 없다는 건 수위가 높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유출되었을 때 타격이 크다는 의미.
유출된 뒤에 여론을 이용하는 방법도 불가능이다.
“알겠습니다. 유출되기 전에 삭제돼야 한다는 말이네요.”
“변호사님, 제가···정 대표한테서 정말 벗어날 수 있을까요? 흑흑흑.”
결국에는 굵은 물방울들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서지우의 표정은 처음과 다르지 않다.
“수지 씨, 며칠 전 처음 저를 찾아오셨을 때와 현재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 이제 어쩌죠?”
“아직 포기할 상황은 아닙니다. 다만, 저희 로펌을 계속 사용하실 생각이라면, 수임 계약 조건이 변경돼야 할 것 같습니다. 성공보수금액을 상향 조정하겠습니다. 동의하시니까?”
“해결만 해주신다면, Zoom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올 수 있게만 해주시면, 뭐든 동의할게요. 동의하겠습니다, 변호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수정된 계약 조건은 이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 부인과 이혼 후, 삭제 능력이 생겼다.
처음에는 문서류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디지털로 저장된 것은 문서 형태의 파일뿐만이 아니라 사진, 소리, 영상도 지울 수 있다.
“수지 씨,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전 남자친구의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시겠어요?”
---*---
다음 날, 아침.
출근 직후, 서지우는 환영 회식에 참석하지 못한 데에 대해 후배 최신일에게 양해를 구했다. 윤정도가 이유를 물어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은 꼭 알아야 하는 사람들만 아는 것이 현명하다.
서지우는 최성태 사무장을 찾았다.
“변호사님, 찾으셨습니까?”
“사무장님, 들어오세요.”
키 180cm, 몸무게 87kg의 다부진 몸을 가진 남자가 서지우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얼굴이 커 멀리서 보면 실제 키보다 작아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오면 덩치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 이상한 체형이다.
“급하게 찾아주실 사람이 있습니다.”
서지우는 남수지로부터 받은 전 남자친구 이름과 사진 그리고 간단한 이력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지성운? 이 사람입니까?”
“네, 전에 영화감독을 지망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적힌 학교를 통해 알아보면 쉽게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 추측되는데.”
“알겠습니다. 찾으면 어떻게 할까요?”
“확인해 주셔야 할 사항이 두 개 있습니다.”
서지우의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무엇입니까?”
“사무장님,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사무장님이 지성운에게 확인해야 할 내용은······.”
서지우는 최대한 간결하게 남수지의 상황과 동영상에 관해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최성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동영상의 최초 원본을 가지고 있는지. 없다면, 사본을 가지고 있는지, 그 둘을 확인하면 된다는 말씀이신 거죠?”
“최초 원본은 Zoom 엔터 정현택이 소유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100%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알겠습니다. 지성운이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좋을 텐데···.
“회수해주세요.”
“소프트하게 할까요? 아니면 하드하게 해도 될까요?”
서지우가 최성태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쓰는 암호 같은 거였다.
소프트는 의미 그대로 부드럽게 협의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라는 것이었고, 하드는 그 반대였다.
“필요하시면 후자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만약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사본이 있는지 꼭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없으면, 사본이라도 있으면 회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디지털 파일 내용을 이 세상의 기억에서 삭제하려면 최초 작성 혹은 최초 기록 파일이 필요하다.
만약 그게 없다면······.
최성태 사무장이 나가고, 서지우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오성전자입니다.
“호영아, 난데. 부탁할 일이 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