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쓰게 되는 능력 (2)
Zoom 엔터와의 분쟁이 말끔히 해결되기 전까지 “칩거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케이 엔터 이동주 대표의 조언에 남수지는 옛 매니저를 찾았다.
“좋으세요?”
“좋아.”
“진짜루? 서울 안 그리우세요?”
남수지가 묻자,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배 열매들을 살피고 있던 송세연은 장갑을 벗고 다가와 그녀가 앉아있는 평상에 앉았다.
“기억나? ‘아리’라고, 옛날에 네가 다니던 샵에 잠깐 있었던 아이?”
“아리?”
“응. 키 크고 짧은 머리에 예쁘게 생겼던 아이. 중성미도 있고.”
“아! 기억나요. 팀장님이 연예인 만들어보려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송세연은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몇 달 전에 연락이 왔어. 혹시 지금이라도 계약할 수 있냐고, 계약하면 계약금은 얼마냐고.”
“네? 그때는 관심 없어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그때는 그랬지.”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신인이면 계약금이라고 해봤자, 명목뿐이지 비용처리 하느라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없는데.”
“그렇게 얘기해줬어. 그리고 이제 매니저 일 안 한다고도 얘기해줬고.”
그제야 남수지는 송세연이 왜 갑자기 다른 사람 이야기를 꺼내는지 눈치챘다.
남수지가 그녀의 과수원을 찾은 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매니저 일을 다시 봐줄 수 있냐고 부탁하러 온 이유도 있었다.
‘아리’라는 여자는 수지가 다니던 헤어샵에서 일하던 알바생이었다.
송세연은 그녀의 “마스크가 매력적”이라며 그녀와 계약하기 위해 몇 개월 동안 공들여 설득했었다. 하나,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녀는 이내 세연의 제안을 거절했고.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세연은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연락하라며 그녀에게 개인 전화번호까지 건네주었었다.
그런 사람이 계약하겠다고 다시 연락이 왔는데, 더는 매니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건 자신의 부탁도 거절하겠다는 의미였다.
“나 서울 안 그리워. 사람들도 안 그립고. 왜 그렇게 바쁘게 치이면서 살았는지 몰라. 여기가 좋아.”
“알았어요, 언니. 더 안 조를게요.”
“역시 수지는 눈치가 빨라서 좋아.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너는 진짜 큰 배우가 될 거야.”
“고마워요. 그나저나 나는 이제 누가 케어해주나.”
“이동주 대표 괜찮은 사람이야. 성깔도 더럽고 소속 연예인이라도 인기가 있냐 없냐에 따라 대우가 천지 차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맺고 끊는 건 확실한 사람이야.”
“그래 보이더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연기하고 싶어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겉으로는 강한척해도 속으로는 걱정이 많은 그녀. 송세연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 근데,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 아- 아리?”
“네.”
“진짜 관심이 있으면 내가 괜찮은 매니지먼트를 소개해 줄 수는 있다고 했는데, 자꾸 계약금에 대해서만 묻길래, 신인배우는 계약금을 줘도 많지 않을 거라고 얘기해줬더니 실망하는 눈치더라고. 아마도, 돈이 급해서 연락했던 모양이야.”
“아-.”
“사연이 뭔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뒀어. 내가 매니지해줄 것도 아닌데, 미주알고주알 캐묻는 것도 그래서.”
“그랬구나.”
“눈빛도 좋고 참 매력 있게 생긴 아이였는데···. 그거 알아? 걔 머리도 엄청 좋았다. 한번은 샵에서 내가 오카다 상하고 통화하면서 지연이 일본 스케줄 수정된 거를 쪽지에 적어놨었거든. 근데 그걸 어디다 떨어뜨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야. 나는 가게 어디에 떨어뜨린 줄 알고 거기서 샵을 뒤집듯이 찾고 있는데, 글쎄 아리 걔가 옆에서 쓰는 걸 봤다면서 쪽지 내용을 다시 써주는 거야. 나는 반신반의했는데, 나중에 차에 떨어져 있었던 쪽지랑 맞춰보니까 완전 똑같더라고.”
송세연의 말투에 살짝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만큼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언니가 좋아했구나?”
“어떻게 알았어? 나 똑똑한 애들 좋아하잖아.”
“그래서 나도 좋아하고?”
“어머! 요 요물!”
하하하.
깔깔깔.
잠시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좋아졌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한다.
“여기 숨어있었네.”
불청객이 나타났다.
“정 대표님···.”
“송 팀장, 오랜만이야. 공기 좋은 시골에 살아서 그런가, 얼굴이 좋아 보이네.”
“···.”
“수지야, 우리가 좀 할 얘기가 있지 않나?”
---*---
목요일, 퇴근 시각.
보통은 별도의 퇴근 시각이 없는 사무실이었지만, 오늘은 최신일 변호사를 위한 송별회가 있는 날.
오랜만에 회식이라 찐하게 한잔할 생각에 윤정도 변호사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했다.
“자, 다들 대충 마무리하고 갑시다. 최 변, 뭐해? 주인공이 제일 먼저 움직여야지.”
“넵, 알겠습니다.”
“오늘 제대로 놀 준비됐지?”
“넵.”
“끝나고 2차는 이 형이 준비했으니까, 기대해.”
“2차요?”
“요새 강남에서 제일 핫하다는 클럽에 VIP룸 잡아놨어.”
“어, 저 그런 데 가면 안 되는데.”
“왜 안돼?”
“여자친구한테 혼나서···.”
“하, 안 되겠구만, 결혼도 하기 전에 이렇게 꽉 잡혀서리. 그러니까, 이 형이 오늘 좋은 핑계를 대주겠다는 거야. 클럽을 친구랑 간다고 해 봐? 여친이 좋아하겠어? 싫어하겠지. 그런데 회사 회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다고 하면? 여친도 어쩔 수 없지. 기회야, 최 변. 클럽도 결혼 전에 가봐야지, 결혼 후에 다니면 범죄야.”
“아···네. 그럼, 서 변호사님도 가시나요?”
“서 변호사님? 안 갈걸. 시끄러운 데 싫어하셔.”
“아···.”
“자, 가자고.”
“서 변호사님은요.”
“왜 자꾸 서 변호사님을 찾아? 월요일 회의 때 말씀하셨잖아, <영화사 청아>랑 미팅하고 거기서 바로 <마코토>로 오신다고.”
“사무실에 계시던데요.”
“어, 진짜?”
“네, 30분 전에 들어오셨어요.”
몰랐던 윤정도는 곧바로 대표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
똑똑똑.
“네.”
노크한 윤정도는 최신일과 함께 들어왔다.
“계셨네요.”
“응, 미팅이 일찍 끝났어.”
“그럼, 저희랑 가시는 건가요?”
“아, 먼저 가 있어. 쓸 이메일이 생겨서 쓰고 바로 따라갈게.”
“네, 알겠습니다.”
“아, 윤.”
돌아나가는 윤정도를 서지우가 불러세웠다.
“이거 뭐야?”
서지우는 책상 위에 이력서를 가리켰다. 부재중, 윤정도가 들어와 놓고 나간 것이었다.
“아, 한소희라고 후배가 추천해준 친구인데, 영어도 네이티브 수준이고 연수원 성적도 탑급입니다. 이쪽 분야에서 관심도 많아서 나름 공부도 한 모양이고요.”
대답하는 윤정도의 목소리가 몇 음 올라간 게 살짝 긴장한 모양이다.
“됐어. 그냥 보기로 한 지원자들만 보자고.”
“이 친구가 변호사님을 한번 뵌 적이 있는데···.”
서지우가 윤정도를 쳐다본다. 말은 안 했지만, ‘그래서 뭐?’라는 표정이다.
“아···넵, 알겠습니다.”
멋쩍은 목소리로 대답한 윤정도는 이력서를 들고 방을 나왔다.
---*---
“되게 예쁘시다.”
방을 나오자, 어깨너머로 이력서에 붙은 지원자의 증명사진을 본 최신일이 말했다.
“엄청 예뻐. 근데 솔직히 그것 때문에 추천한 게 아니야.”
“에이, 아닌 건 같은데요.”
“아니야, 인마. 야, 봐봐. 이 이력을 봐. 솔직히 이번에 우리 펌에 지원한 변호사 중에 스펙이 제일 좋아.”
사실이었다.
연수원 성적 상위 5% 안에 드는 성적에 토플 스코어 110.
현재 대형 로펌에 3년 차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국제중재 경험까지 갖추고 있었다.
법무법인 해결의 대우가 나쁘지는 않은 곳이었어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런 작은 부티크 로펌에 지원할 이유가 하등 없는 친구다.
“그렇네요. 이 정도면 판사가 될 수 있을 스펙인데.”
“들어보니까, 처음부터 해외 쪽 일을 많이 하고 싶어서 판사, 검사 지원도 하지 않았대. 그리고 김앤강에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광현에서 사이닝보너스로 큰 거 한 장 줬다는 소문도 있고.”
사이닝보너스(signing bonus)는 회사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입사 때 주는 인센티브로 주로 경력직을 스카우트해올 때 제시하지만, 로펌의 경우, 연수원 성적 최상위권 인재를 영입할 때 제안하기도 한다.
“그래요?”
“대학 때부터 대단했다고 하더라고, 국제 모의재판 대회에 나가서 수상도 하고.”
“와- 그런 영재가 우리 펌에 왜···?”
“뭐야? 너 지금 우리 펌 무시하는 거야?”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우리 펌 좋죠. 진짜 좋죠.”
“그런데 넌 퇴사하냐?”
“저는 사정이 있으니까···. 솔직히 저는 김앤강에서 오라고 해도 해결에 있을 겁니다.”
“이 친구가 서 변호사님을 싱가포르 중재에서 한번 본 적이 있대.”
“아! 그래서 빠졌구나?”
“그랬나 봐.”
“서 변호사님 국제중재 사건 하실 때 멋있으시죠. 영어도 겁나 잘하시고.”
“아무튼 그래서 특별히 부탁받고 추천 드린 건데···.”
“그런데 왜 면접도 안 보세요? 면접은 볼만한 거 아닌가?”
“내 말이.”
답답한 심정에 윤정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헉! 혹시 그 말이 사실인가요?”
“무슨 말?”
“그게···.”
“서 변호사님이 여자를 싫어한다는 소문?”
“네.”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지.”
“그런데 왜···?”
“같이 일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지.”
“역시 그렇구나!”
“너는 근데 그걸 이제 알았냐? 1년씩이나 같이 일했는데? 우리 사무실을 봐.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냐? 이 카페같이 우아하게 생긴 빌딩에 전부 남자야. 하다못해 비서들까지 남자야. 어느 로펌에서 남자 비서를 뽑냐.”
“저도 사실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는데, 워낙 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들을 잘하셔서···.”
“딱히 입으로 여자를 안 뽑겠다고 말 한 적은 없어. 그냥 오늘처럼 이력서를 올려도 컷 하시는 거지.”
“왜 그러시는 건가요?”
“뭐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는 해. 결혼을 세 번씩이나 실패해서 트라우마 같은 게 있으실 수 있으니까. 근데 또 보면, 그렇다고 여자 클라이언트를 상대할 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러니까요.”
모를 일이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아무튼 아까워. 이런 인재를 면접도 안 보고 까는 회사는 우리 로펌밖에 없을 거야.”
“그러게요.”
“내가 그냥 확 멋대로 한번 봐 버릴까?”
“그러세요.”
“됐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가자, 술이나 빨러.”
몹시 아쉬운 듯, 윤정도는 한숨을 내쉬며 회식 장소로 걷기 시작했다.
---*---
이메일을 다 쓴 서지우는 컴퓨터를 끄고 코트를 챙겼다.
나가기 전, 혹시 빠뜨린 것이 있나 책상 위를 살피던 그는 윤정도가 놓고 간 이력서가 있던 자리에서 눈이 멈췄다.
그도 안다.
한소희 지원자의 이력이 출중하다는 걸.
솔직히 여자만 아니었으면 제일 먼저 면접을 봤을 재목이다.
하지만, 여자는 곤란하다.
여성의 능력을 폄하거나 근거 없는 혐오심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다.
단지, ‘부작용’으로 인한 곤란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을 뿐.
전에 있던 로펌에서 나온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삭제 능력에 따르는 부작용.
성욕 증폭과 함께 따라오는 폐왕색 발산.
냉철한 그가 능력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이유다.
징징- 징징-
“네, 서지우입니다.”
“변호사님, 저 수지인데요······. 잠시 만나 뵙고 의논 드릴 게 있는데요. 지금 사무실이신가요?”
그런데, 자꾸만 쓰게 되는 상황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