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부작용 그리고 원인 (2)
「7년 전, 뉴욕···.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너도 내 의견을 무시하고 가버렸잖아.”
“이게 그거랑 같아?”
“다를 것 없어.”
조금 전 여자는 남자에게 둘의 아기를 지웠다고 통보했다. 남자는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아기의 존재조차 말하지 않고 혼자 결정을 내린 여자에게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어떻게 두 개가 같지?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내 간을 떼어주러 간 것과 이게 어떻게 같은 거지?”
“같아.”
“도대체 뭐가 같아!”
“죽을 수도 있었어. 내가 분명히 말했지? 가지 말라고. 네 몸, 네 거 아니라고. 그런데도 내 말을 무시하고 간 건 너야.”
차분하게 말했지만, 여자의 목소리에도 억눌린 분노가 느껴진다.
“나는 사람을 살리러 간 건데, 너는 그사이에 우리의 생명을 죽였구나.”
“어차피 내 몸이고 내 결정이야.”
“그래서 나는 알 권리도 없었다?”
“지금 알려주잖아.”
“이건 사후통보일뿐이야.”
“너도 네 멋대로 한국에 갔잖아! 네가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한 달 반 만에 나타나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날 비난하겠다는 거야?”
참고 있던 여자는 소리를 쳤다. 진심이었다.
“내가 만약에 가지 않았더라도 네가 나한테 상의했을까?”
“이미 벌어진 일이야. 넌 내 말을 무시하고 갔고, 그리고 난 결정을 내렸어.”
“그래···. 알았어.”
남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을.
남자는 며칠 전 풀어놓았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서지우?”
남자는 그 아파트에 있던 자신의 모든 물건을 전부 집어넣을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1년 남짓 둘이 함께 살았던 그 작은 공간에서 그의 물건이 한 개도 남지 않을 때, 남자는 여자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지금 나가면, 진짜 끝이야.”
“잘 있어, 여혜린.”」
자기 인생 사느라 바빠 가족은 돌 볼 겨를도 없었던 아버지에게 간을 떼어주고 난 후, 여혜린은 내게 낙태 사실을 통보했다.
사뭇 충격이었다.
아이를 고대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긴 아이를 일말의 상의 없이 지웠다는 걸 아무일 아닌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무렵이었다.
나한테 삭제 능력이 생긴 시점.
아이를 잃은 충격 때문이었을까?
단정할 수는 없다.
그 무렵 나한테는 여러 일이 벌어졌으니까.
*
“잘 나간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내가 사는 집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
에스프레소머신에서 나는 소음이 들려오더니, 잠시 뒤 집주인의 와이셔츠를 입은 여혜린이 커피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삭제 능력의 부작용.
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몸 안의 섹슈얼리티가 증폭하고 24시간 안에 해결해주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정도 제어력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서지우는 여혜린을 집으로 데려왔다.
평소에 그가 결코 하지 않는 행동이다.
호텔로 데려가지 집으로 여자를 데려오지는 않는다.
이런 이상행동을 했다는 건은 자제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보통은 서로에게 호감도가 높을 때나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설마 내가 아직도 이 여자에게 감정이 남아있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서지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 잤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6년 전과 많이 변했다고 해도 하룻밤 잠자리를 가지고 협박(?) 따위 할 여자가 아니라는 건 서지우도 잘 알았다. 그런 협박에 당할 그도 아니고.
그래도 상대는 현재 소송 중인 사건 가해자의 딸.
플러스, 안 좋게 헤어진 전 부인.
어젯밤과 같은 일은 관계를 복잡하게 할 뿐이다.
“커피는 밖에서 마셔줄 수 있을까?”
“커피? 하하. 설마 깔끔 떠느라 여자도 제대로 못 만나는 그런 30대 남자가 된 거야? 우리 지우가 언제부터 그런 매력 없는 남자가 됐지?”
여혜린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서지우의 맨몸을 바라보며 마치 원하는 땅을 정복한 승리자의 표정을 지었다.
“욕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30대 아줌마도 별로 매력 없어.”
서지우가 그녀의 손에서 커피잔을 빼앗아 거실로 나가자, 그녀도 그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매력 없다는 사람치곤 어젯밤에는 그런 것 같지 않던데.”
제기랄, 졌다.
서른여덟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고 탄탄한 몸.
전부 ‘부작용’ 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고 한들 그녀와 하룻밤을 보냈을 것이다.
“원하는 게 뭐야?”
“커피.”
“어젯밤에 왜 거길 찾아온 건데?”
“우연이라고 하면 더 기분이 좋을 것 같아?”
“나이가 들더니 더 뻔뻔해졌네.”
“그게 내 매력 아니었던가?”
“젊은 시절의 무모함은 매력이 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무모하다면 그건 단점이야.”
“자꾸 늙었다고 하니까,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어젯밤은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여혜린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서지우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취했을 뿐이야.”
“우리 지우가 그렇게 술에 약했던가?”
“한번만 더 그렇게 부르며, 그 커피도 끝내지 못하고 이 집에서 쫓겨나게 될 거야.”
“뭐? 우리 지우?”
그녀는 이 순간이 즐거운 듯하다.
하지만, 서지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자 그 이상 선을 넘지 않는다. 비록 1년 남짓 함께 산 남편이지만,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 얼마나 무서운지 정도는 안다.
그녀는 소파에 놓아둔 그녀의 백에서 USB 메모리 하나를 꺼내와 서지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거.”
“뭐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고, 특히나 가해자 딸인 사람한테서 함부로 받고 싶지는 않은데. 특히나 그런 치졸한 방법으로 나를 이 사건에서 배제시켜고 한 사람한테.”
“우리 회장님 비자금 계좌들하고 MJ 미디어에서 돈세탁 목적으로 설립한 오프쇼어 페이퍼컴퍼니 목록이야.”
“그걸 왜 나한테···?”
“오빠하고 담판 졌어. 우리 아버지가 워낙 기업의 사고뭉치라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서지우 입장에서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성추행 이슈 하나만으로 이길 수 없는 소송이었으니까.
“대신 조건이 있어.”
서지우가 USB 메모리를 받으려는 순간, 여혜린이 손을 뒤로 빼며 말했다.
“조건?”
“MJ 미디어는 건드리지 마. 이건 아버지 혼자 한 짓이니까.”
“오케이.”
“그리고 또 하나.”
“?”
여혜린은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서지우에게 다가갔다.
“두 번째 조건은 곤란하겠는데.”
“조건이 뭔 줄 알고?”
“뭐든.”
“피식, 옷 좀 빌려달라고 하려 그랬더니.”
와이셔츠를 벗자, 팬티만 입은 그녀의 알몸이 드러난다. 그녀는 가슴을 한쪽 팔로 가린 채,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샤워실로 향했다.
---*---
며칠 뒤, 국내 한 방송사를 통해서 여정남 회장의 비자금 조성에 관한 기사가 터져나갔고.
검찰의 수사는 배임 및 횡령 혐의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MJ 미디어 그룹은 여정남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손 떼기로 했다는 발표를 내었다. 매일 같이 하락하는 주가를 인식하여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이었지만, 아는 사람들은 알았다.
여혜성과 여혜린이 손을 잡고 아버지 여정남을 밀어낸 것이란 걸.
“여혜린 씨가 서 변호사님의 전 부인이었다니···.”
핸드폰으로 관련 기사들을 읽고 있던 최신일이 중얼거리자,
“어디 가서 또 떠벌리지 말고.”
“에이- 저 그런 놈 아닙니다, 변호사님. 근데, MJ 미디어 이번에 쪼개진다고 하는데, 진짜일까요?”
“왕이 무너졌으니 이제 밑에서 나눠 먹기 하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역시···. 그때 사무실에 오셨을 때 보니까 포스가 장난 아니시던데.”
“누구? 형수···아니 혜린 씨?”
“네. 근데, 변호사님도 여혜린 씨를 잘 아셨어요?”
“응? 아니. 몇 번 못 뵀지. 결혼식 때랑 뉴욕에 있을 때, 두 번 봤나? 왜?”
잘 알지 못하는 것 치고는 “형수”라 호칭을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살짝 의아했지만, 최신일은 묻지 않는다.
“아니요. 그냥요.”
“그나저나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 다음 달인가?”
“예.”
“좋아?”
“네? 네헤. 헤헤.”
“좋단다. 아, 우리도 너 가면 빨리 충원해야 하는데···.”
“그러게요.”
“서 변호사님이 워낙 바쁘셔서 면접 일정을 잡지 못하네.”
“그러네요. 싱가포르 다녀오시면서 계속 바쁘셔서···. 가기 전에 제 환송회는 할 수 있을까요?”
“왜? 그것도 안 해줄까 봐 걱정돼?”
“아니, 걱정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사무실 분들하고 찐하게 한잔하고 싶어서요.”
“걱정하지 마, 인마. 그건 할 거야. 에이, 안 되겠다. 말 나온 김에 가서 물어봐야겠다.”
“지금 들어가시게요?”
“응.”
점심 식사 후 카페 같은 사내 휴게실에서 곧 퇴사하는 후배 최신일과 커피를 마시던 윤정도는 대화를 마치고, 로펌에서 가장 근사한 공간인 서지우 대표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
똑똑똑.
“네.”
“변호사님.”
“어, 들어와.”
서로 안 지도 10년이 넘었고 둘의 나이 차이도 고작 두 살 터울이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만큼은 깍듯한 윤정도였다.
“변호사님, 이달 말에 최 변호사 퇴사하는데, 조만간 회식 자리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벌써 그렇게 됐나? 서지우는 책상 위 달력을 확인했다. 최근 정신이 없었다.
“해야지.”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다음 주 목요일 어때?”
“목요일 좋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장소는 최 변호사하고 상의해서 좋을 때로 정해.”
“네, 그럴게요.”
하나의 토픽을 끝내고 다음 토픽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응.”
“최 변호사 후임···.”
아, 맞다! 후임. 중요한 사안이다.
법무법인 자격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세 명의 지분 변호사고 필요하고 그러면 빨리 후임을 뽑아야 했다.
“변호사님이 괜찮은 후보들을 추려보라고 해서, 제가 보기에 괜찮은 신임 이력서들 이메일로 보내드렸는데, 보셨나요?”
“아직 못 봤어. 오늘 내로 보고 의견 줄게.”
“네. 그거 주시면 그것도 다음 주 내로 스케줄 잡겠습니다.”
“오케이.”
말을 마친 윤정도는 방을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섰다.
“변호사님.”
“응?”
“기사 보셨어요?”
“무슨 기사?”
“MJ 그룹 분할할 것처럼 기사가 났던데···.”
“그런데?”
“아니요. 그 정도 규모면 꽤 케이스인데···. 혹시라도 우리 쪽에 일을 맡길···.”
“그럴 일 없어.”
“넵, 알겠습니다.”
여정남 비자금 비리에 관한 자료를 여혜린이 주었다는 걸 알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단호한 서지우의 답변에 윤정도는 더 묻지 않고 방을 나섰다.
서지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파인다.
여혜린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은데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서지우는 당분간 ‘삭제’ 능력을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똑똑똑.
“네.”
“변호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스케줄에 있는 손님인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최근 스케줄에 없는 손님들이 부쩍 는 거 같다.
“손님이···남수지 님입니다.”
---*---
Zoom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사장님, 수지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고 하는데요.”
“뭐? 그년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디야? 그년이 찾아간 변호사 사무실이?”
“법무법인 해결이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