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3)

한계, 부작용 그리고 원인 (1)

다음날, 서지우는 기자회견을 열고,

“여정남 회장 측에서 보내온 합의서 초안입니다. 합의할 의사가 없음을 여러 차례 전달했음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저희 의뢰인과 의뢰인의 가족을 압박하고 회유하려고 하기에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명백히 밝히려고 합니다. 저희 의뢰인은 합의할 생각이 없으며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법의 합당한 처벌만을 원할 뿐입니다.”

MJ 미디어 회장과 김앤강 황재수 변호사만 서명날인한 합의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그러자, 여론은 순식간에 뒤바뀌었고, 해당 사건은 곧바로 추악한 권력형 성폭행으로 인식되었으며,

여론의 압박을 느낀 검찰은 성역 없이 조사하겠다고 발표와 함께 MJ 미디어 회장을 구속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이게 뭐야! 너는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여정남 회장이 태블릿PC를 집어 던지자, 집안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여혜린의 얼굴은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자업자득이죠.”

“뭐? 뭐가 어쩌고저째?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일 좀 한다고 예뻐했더니 어디서 감히···. 됐어. 너는 이제 이 일에서 손 떼. 이깟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고, 쯧. 내가 직접 들을 거야. 윤 비서.”

“네, 회장님.”

“황재수, 그 새끼 들어오라고 해. 당장 들어오라고 해!”

얼굴이 시뻘게진 여정남이 황재수 변호사를 호출한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게임이었다. 전에 유사한 사건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빠져나가기 힘든 판국이 되었다.

계산이 빠른 여혜린은 이번 사태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순간 생각이 들었다. 노욕만 남은 여정남은 자신의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

“변호사님,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이야. 목줄 채웠다고 끝난 게임 아니야, 게임 플랜을 잘 짜야 해.”

“예.”

“일단 비슷한 사례를 당한 증인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

“예.”

“그리고 지난 10년간 MJ 그룹 간의 거래들도 체크해. 이 싸움은 처음부터 성추행 이슈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주도면밀한 선배 변호사의 명령에 박선후는 마음이 편해졌다. 조조의 100만 대군을 앞에 두고 제갈량이 옆에 서 있는 느낌이다.

“변호사님, 합의서 초안을 우리가 작성했는데 그 이슈는 괜찮을까요?”

“어차피 초안 작성을 누가 했느냐는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저쪽이 먼저 사인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네. 그런데, 변호사님은 어떻게 예측하셨나요?”

“뭘?”

“황재수 변호사가 우리가 보낸 합의서 초안에 먼저 서명날인 해서 보낼 거라는 걸. 실무에서 그러기 쉽지 않지 않은데···.”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선후가 대리 서명날인 해서 보냈다.

하지만, 어젯밤 내가 대리 서명날인한 부분을 지운 순간, 세상의 기억이 바뀌었다.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연필, 펜, 먹 등 어떠한 매체로 썼어도 지울 수 있다.

하다못해 인주로 찍은 도장, 물감으로 그린 그림도 지울 수 있고, 컴퓨터로 작성된 문서도 원본, 즉 첫 번째 파일이라면 지울 수 있다.

그리고 원본에서 해당 문구를 지우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본에서도 사라진다. 똑같은 문구의 원본이 같은 자리에서 여러 부 만들어진 경우에는 하나의 원본만 지워도 다른 원본 및 사본 모두가 지워진다.

단, 내가 직접 한 기록만은 지울 수가 없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렇다.

어쩌면 내 기억은 바꿀 수 없기 때문 아닐까 하는 추측만 할 뿐.

며칠 전, 박선후는 내 지시하에 합의서 초안에 나 대신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일부러 간인과 계인은 피했다.

부동산 계약 같이 꼼꼼하게 체결할 필요가 없는 서류였기에 저쪽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거로 예상했고, 한시라도 빨리 합의하고 하고 싶어 하는 걸 알았기에 문제 삼지 않을 거로 추측했다.

내 예상대로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일어났다.

이틀 전만 해도 영문을 몰라 살짝 불안해했던 박선후였지만, 이제는 그런 기억조차 없다. 그가 기억하는 사실은 내 지시대로 ‘서명날인 하지 않은’ 합의서 초안을 황재수에게 보낸 것이었다.

황재수, 여혜린, 여정남 역시 피해자 측 서명날인을 본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럴 거 같았어. 덜렁대게 생겼잖아, 황재수 변호사.”

“하하하. 네, 그런 거 같기도···. 아, 변호사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으신가요? ”

“오늘 저녁?”

“네, 윤 변호사님하고 최 변하고 같이 한잔하기로 했는데, 괜찮으시면 변호사님도 같이 가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걸 어쩌지. 오늘은 조금 곤란하겠는데.”

오늘은 곤란하다.

빨리 풀어주지 않으면 부작용이 심해진다.

---*---

MJ 미디어 그룹은 신문사로 시작하여 현재 종합편성채널 1개와 케이블 채널 5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국내 다수의 드라마·영화 제작업체와 음반 제작사에 투자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든든한 자본력으로 IT 사업 쪽으로도 확장을 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구속되자, 여혜린은 곧바로 큰오빠 여혜성을 찾았다.

“기사 봤어요?”

“원하는 게 뭐야?”

MJ 그룹의 지주회사, MJ 미디어 네트워크의 사장 여혜성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주가가 35%나 떨어졌던데.”

“어쩌라고?”

“투자자들이 뭐라고 안 해요?”

“네 일이나 신경 써. 네가 네 일을 똑바로 안 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잖아.”

“그게 왜 내 잘못이에요?”

아버지 여정남이 여혜린에게 뒤치다꺼리를 시킨 것은 맞지만, 엄격히 말하면 여정남 본인의 잘못이었다.

여혜성도 잘 알고 있었고,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 대해 누구보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은 그였다.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그런 추잡한 모습을 전혀 닮지 않은 아들.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조용히 참고 있는 그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똑똑하고 잘난 줄 아는 남자, 여혜성은 아버지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막내 여동생을 특별히 아끼는 것도 아니었다.

“에이스 인베스트먼트 차 대표님이랑 얼마나 친해요?”

에이스 인베스트먼트, MJ 미디어 네트워크 지분을 여정남, 여혜성, 여혜린 다음으로 많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

“그걸 왜 묻는데?”

“오빠가 진짜 내 의도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거고. 솔직하게 말할게요. 나머지 주주들은 제가 책임지고 설득할게요, 오빠가 차 대표님 맡아요.”

여혜성은 놀란 눈으로 열두 살이나 차이 나는 여동생을 쳐다봤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형제 중에서 제일 배짱이 두둑한 아이이다.

자신은 한 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자식 중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반항한 유일한 놈.

아버지 몰래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어떤 변호사 놈이랑 제멋대로 혼인신고를 올려버린 놈.

아버지는 그런 막내를 유독 좋아했다.

흥, 결국 그런데 제일 믿었던 자식한테 칼을 맞게 생겼다.

“아버지가 가만히 안 있을걸.”

“겁나요?”

“건방진 새끼.”

“지금 아니면 앞으로 10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 몰라요.”

일리 있는 말이다. 최근 몇 년간 성질이 더 고약해진 회장 때문에 이미 세대교체가 된 투자자들이 ‘여정남 리스크’를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이번 사건이 터졌다. 그녀 말대로 타이밍은 좋다.

다만,

“모르면 가만히 있어. 에이스인베스트먼트하고 네가 나머지 끌어모아도, 아버지 우호 지분을 상대하기 어려워.”

“아버지 감옥에서 못 나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 감옥에서 못 나올 거라고요.”

그녀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여혜성은 순간 움찔했다. 열두 살이나 어린 여동생이 이렇게나 악랄했던가? 아버지가 왜 그녀를 유독 좋아했는지 알겠다. 아버지를 닮았다.

“원하는 게 뭐야?”

“언론사랑 종합편성채널, IT 사업 부분은 오빠가 가져요. 대신 엔터테인먼트 쪽은 나 줘요.”

어차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도 전부 자기 차지가 될 건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여혜성은 큰 숨을 들이마셨다.

---*---

번잡한 대로에서 조금 벗어난 논현동의 골목.

골목이라 해도 땅값이 비싼 곳이라 제법 높은 빌딩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그중 하나에 서지우가 자주 찾는 바(bar)가 위치했다.

“오셨어요?”

“응.”

“뭐로 드릴까요?”

“같은 거로.”

서지우가 이곳에 마시는 술은 둘 중 하나였다. 더워지기 시작하면 제임스 본드가 좋아하는 ‘베스퍼’였고, 그렇지 않으면 위스키였다.

잠시 후, 바텐더는 초콜릿 몇 조각이 담긴 접시와 함께 피트향이 강하게 올라오는 위스키 한잔을 내왔다. 그리고는 서빙한 술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위스키병을 가져와 옆에 놓았다.

“맛있네.”

“네. 좋아하시는 아일라 계열이에요. 브룩라디 증류소에서 오크통 통째로 구매해 원액 그대로 병입한 위스키입니다. 입에 맞으시나요?”

취향에 맞는 위스키는 집에도 많다. 물론 분위기도 좋고 사장도 잘 알아, 머리 식힐 겸 혼자 자주 찾는 곳인 거는 맞지만, 그가 이곳을 찾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술 관련해서 몇 마디 나눈 바텐더가 그를 혼자 두고 자리로 돌아가자, 잠시 뒤 매력적인 여성 한 명이 그의 옆에 앉았다.

누가 봐도 서지우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는 모습이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그가 말없이 술잔만 만지고 있자, 급해진 여자는 먼저 말을 걸었다.

“그건 무슨 위스키예요? 처음 보는 병인데.”

당연히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다.

질문을 던진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 서지우는 병을 들어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마셔보겠냐는 의미.

여자는 기회다 싶어 그의 곁에 가까이 앉았다.

“여기 자주 오세요?”

이상하다. 원래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그러는 여자는 아닌데. 오히려 그 반대인데.

그런데 이 남자에게 자꾸 끌린다.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잘생기기는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좋은 향기가 느껴진다. 이게 페로몬인가? 페로몬이라는 게 이렇게 냄새가 좋은 거였나?

가까워질수록 더 참기 힘들어진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여자는 갑자기 남자의 입술을 탐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여자는 온 힘을 다해 이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남자가 따라준 쓴 술에도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이성을 잃고 먼저 말해버렸다.

“여기 덥지 않나요? 혹시 둘만 있는 조용한 데 가지 않을래요?”

내가 말했던가?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고? 그럼, 부작용이 있다는 말은?

내 능력에는 부작용도 있다.

문서를 지우고 나면 섹슈얼리티 수치가 올라간다.

비단 성욕이 높아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이성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발산되고, 그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지 않으면 섹슈얼리티 수치가 폭주해 결국···.

상황을 심각하게 만든다.

그게 서른여섯인 내가 세 번이나 결혼한 원인이다.

서지우가 그녀의 제안에 대답 대신 미소를 짓자, 그녀의 윗가슴골이 풍선처럼 부푼다.

‘헉, 저 미소 어떡할 거야? X나 매력적이다.’

여자는 그의 미소를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미안하지만, 조용한 데는 너 혼자 가.”

“어맛, 뭐예요?”

“열은 너 혼자 가서 식히라고.”

“그쪽이 누군데 이래라저래라···?”

“나? 나, 이 남자 부인.”

여혜린이 나타났다.

젠장, 좋지 않은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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