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33)

끊어지지 않은 인연 (2)

이 정도면 악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딱히 복수 같은 걸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하필이면 피해자가 박선후 변호사의 친척이었다니.

오랜만에 찾아온 후배 변호사의 부탁을 거절한 서지우는 딱히 맘이 편하지 않다. 게다가 그런 치졸한 수법까지 써가며 자신을 배제하려 한 여혜린에게도 짜증이 난다.

“수임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변호사협회에서도 윤리규정 위반이라고 안 하지 않을까요?”

후배 최신일이 묻자, 윤정도 변호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문료를 냈대.”

“그거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미 돌려줬지.”

“그럼 됐네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사실 처음부터 수임할 의사가 없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했고, 의뢰인이 제멋대로 풀어놓은 이야기라 변호사 비밀유지특권에 해당하는지도 모호하다.

마음먹으면 무시하고 피해자의 의뢰를 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MJ 미디어라는 것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MJ 미디어 회장이야.”

“아, 역시 그렇죠. 저희 주 분야가 엔터테인먼트인데 국내 최대 엔터 회사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1년밖에 안 됐어도 대표님을 그렇게 몰라?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형수···아니, 거기 딸이 서 변호사님 전 부인이라고. 둘이 좋게 안 헤어졌어. 내가 서 변호사님이라면 오히려 맡고 싶을걸.”

“아-.”

선배의 지적에 최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상대가 대한민국 최대 미디어 회사인데, 가만히 있겠냐는 말이었어. 아무리 변호사협회에서 윤리규정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해도, 서 변호사님이 사건을 맡으면 저쪽에서 시작부터 걸고 넘어갈 거야. 자기네가 먼저 연락한 변호사가 사건 배경 다 듣고 나서 피해자 쪽에 붙었다고. 사건의 포커스를 성추행이 아니라 비윤리적인 변호사에 맞춰 논점을 흐리려고 할 게 뻔해. 그래서 서 변호사님도 맡고 싶지만, 안 하겠다고 하신 거고.”

“아, 그런 거구나. 근데 그럼 어떻게 하기로 됐나요? 박선후 변호사님은 다른 로펌을 쓰시는 건가요?”

“박 변이 직접 변호할 거야.”

“아!”

“지금은 만화가이지만, 꽤 괜찮은 변호사였어. 그리고 대표님이 변호 방향을 잡아주신 거 같고.”

어쨌거나 증거가 있고 아직까지는 큰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기에, 피해자가 마음만 단단히 먹는다면 싸워볼 만하다.

물론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피해자는 배우 지망생이고 상대는 대한민국 미디어의 왕이다.

길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고, 이긴다고 해도 피해자가 만신창이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서지우는 그 어려운 싸움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절대 미디어 전(戰)을 하려 하지 마. 그리고 싸우기로 했으면 MJ와 어떠한 협상도 하지 말고 소송으로 가. 이정도 증거면 법정에서 해볼 만하니까.」

법원에 가기 전에 이길 수 있는 전략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그런 전략이 없다면, 법원이 마지막 희망이다.

---*---

MJ 미디어 본사, 전략기획 상무실.

여혜린은 들고 있던 태블릿PC를 책상 위에 던졌다. 막을 때로 막았지만, 언론 전체에 재갈을 물릴 수는 없었다.

피해자 측에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도, 성추행 소송을 걸었다는 하나만으로 소문이 나기에는 충분했다.

SNS로 스멀스멀 퍼져나간 소식은 결국 포털사이트까지 올라왔다.

띠리링- 띠리링-

-네, 상무님.

“황 변호사님 연결해줘.”

-네, 알겠습니다.

여혜린은 김앤강 황재수 변호사를 찾았다.

-네, 상무님.

“합의는 어떻게 되고 있죠?”

-그게···. 저쪽 변호사가 피해 여성 사촌 오빠로 바뀐 다음부터는 합의 협상에 일절 응하지를 않고 있어서요.

“사촌 오빠라는 사람이 법무법인 해결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제가 그때 만났던 그 사람 맞죠?”

“네, 맞습니다.”

여혜린은 순간 서지우가 떠올랐다. 뒤에서 코치라도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건가요?”

-아니요. 그래서 그쪽 아버지를 컨택해 보려고 합니다. 예전 변호사와 통화했을 때 얼핏 들기로는 그쪽 아버지가 합의에 관심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피해 여성의 아버지랑 사촌 오빠의 아버지랑, 그러니까 형제죠, 둘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걸 좀 파고들어서 이간질을 시키면 협상의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알겠어요. 합의금 액수는 문제가 아니니까, 저쪽이 상상하기 힘든 큰 금액으로 흔들어보세요.”

-알겠습니다.

“황 변호사님, 비밀 유지가 중요하고 그보다는 시간이 더 중요해요. 이렇게 계속 끌면 기업 이미지에도 좋지 않고 앞으로 저희가 구상하는 사업에도 좋지 않다는 사실 잘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딸깍.

변호사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직접 나설 수도 없는 노릇.

여혜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

MJ 미디어의 압력 속에서도 “연예인 스폰서”, “성상납” 등 자극적인 제목을 단 추측성 기사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자, 각종 커뮤니티와 댓글 창에는 근거 없는 허위사실들과 피해자에 대한 악플이 쏟아져나왔다.

「솔직히 그런 자리에 나간 여자가 정신 나간 거 아니야?」

「내가 업계에서 있어봐서 아는데, 저거 여자 백퍼 알고 나간 거임. 몸 팔아서 푸시 좀 받으려고 했는데, 술자리에서 실수해서 팽 당한 다음에 합의금 받아내서 인생 피려고 경로 수정한 거임.」

「나 피해자랑 같은 학교 출신이다. 그년 어렸을 때부터 남자 선생들한테 끼 부리고 꼬리치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알았든 몰랐든 졸라 더러워.」

상처 입은 스물세 살이 뚝심 있게 견디어내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변호사님, 선후입니다.

“소송 준비는 잘하고 있고?”

-그게 말입니다···.

휴대전화기 창에 ‘박선후’가 떴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이런 싸움은 변호사보다 피해자가 먼저 백기를 드는 경우가 많다.

상대도 상대지만 대중의 손가락질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MJ 미디어 측 합의 제안에 흔들려 하는 피해자였다.

“합의 제안이 나쁘지 않네.”

서지우는 변호사로서 이성적인 의견을 말했다.

MJ 미디어가 제시한 합의금은 상상 이상으로 컸고, 사건이 잠잠해질 때쯤 데뷔 기회를 주겠다는 이면계약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승소 확률 6~70%에 소송이 진행되는 앞으로 2~3년간 받아야 할 고통은 고려한다면, MJ 미디어의 제안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진짜···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보기에 그 정도 금액을 제시했다는 건 잘못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왜? 진정성 있는 사과라도 원했던 거야? 박선후, 변호사로 일하면서 가해자한테 그런 사과를 받아 본 적 있어?”

-······.

“만약 박 변호사 사촌 동생이 기대하는 게 그런 거라면 포기하라고 해. 합의를 하든지 아니면 국가의 처벌을 구하든지, 선택지는 둘 중의 하나야.”

-그렇지만 여기서 합의를 하면 대중은 은영이를 스폰서나 구하려는 술자리에 나간 싸구려로 기억할 텐데요.

“합의를 하든 하지 않든 박 변호사 사촌 동생은 이미 낙인이 찍혔어. 소송에 이긴다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겨도, 기사 하루 이틀 나고 끝일걸. 그리고 그런 허위사실을 뿌리고 다니는 악플러들은 진실에 애초에 관심도 없어. 그런 것에 휘둘려서 선택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마.”

냉철한 선배 변호사의 조언에 박선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도 서지우의 조언이 맞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 변호사님. 변호사님이 제 처지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합의.”

-진짜···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게 의뢰인이 원하는 거라면.”

-만약 원하는 게 아니라면요?

그렇다면 달라진다.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는데 합의가 싫다면,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의뢰인이 원하는 걸 한다는 의미.

법무법인 해결에 근무한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박선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서지우가 소송에 진 케이스를.

박선후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변호사님이 맡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힘으로는 도저히 끝까지 싸울 자신이 없습니다. 염치없지만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

“부탁드리겠습니다.”

간절함이 느껴진다.

“사촌 동생이 합의를 원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 거는 아닙니다. 작은아버지가 자꾸 저를 무시하고 저쪽 변호사하고 직접 얘기하면서 애를 많이 흔들어 놓아서 그렇지, 애초에 돈을 바라고 이 소송을 시작한 거는 진짜 아닙니다.

“그러면 소송을 끝까지 하겠다는 게 사촌 동생의 의지야?”

-네.

“확실해?”

-네.

서지우는 잠시 상황을 고려했다.

여기서 피해자 측 소송대리를 수임하면 MJ 미디어 측은 분명 변호사 윤리를 운운하며 사건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바꾸려고 할 것이고, 본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을 빼놓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사건을 수임하더라도, 피해자가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박 변 사촌이라고 청구 비용이 달라지지는 않아.”

-물론입니다.

“위임계약서 쓰기 전에 피해자를 직접 만나야겠어.”

-편한 시간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사무실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사촌 동생이랑 사촌 동생 아버지 사이가 많이 가까워?”

-그렇게 가깝지는 않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은영이 어렸을 때부터 사업을 자꾸 벌이셔서 집안에 힘든 일이 좀 많았거든요. 그것 때문에 저희 아버지하고도 틀어졌고요. 서로 얼굴을 안 보고 살 정도로 나쁜 부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친하다고 할 수 없어요. 다만, 이번 일 터지고, 그 집안에 남자가 작은아버지밖에 없다 보니까 초장기에 변호사 선임이랑 법률적인 일을 작은아버지가 주도해서 하는 바람에······.

“그래서 사촌 동생 처지에서는 작은아버지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건가?”

-네, 아무래도 아버지다 보니까···.

“알았어. 시간 괜찮으면 동생과 함께 모레 오전에 사무실로 올 테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모레 오전 열 시에 찾아뵙겠습니다. 아, 변호사님, 혹시 그 전에 제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있다.

“합의서 초안 하나 만들어서 가져와.”

-합의서요?

“MJ 미디어 측에서 제시한 조건을 명시하고 비밀 유지서약 조항도 포함해서 작성해. 저쪽에서는 변호사가 함께 서명하지 않으면 사인하려고 들지 않을 거니까, 양측 변호인 서명란도 추가하고.”

-아···변호사님? 제가 혹시 무엇을 잘못 설명해 드렸나요? 은영이는 합의를 하려는 게 아니라···.

“알아. 박 변 이야기는 잘 들었어. 모레 오면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합의서 초안 만들어와.”

이렇게 된 이상, 이번에도 필승법을 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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