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33)

해결사 (3)

흔히들 생각하기를, 변호사라 하면, 법률조항을 운운하며 법정에서 싸우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변호사 업무의 90%는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행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재판이 시작되면 절차법이라는 까다로운 룰이 적용되고 무엇보다도 판사라는 변수가 생긴다.

변호사는 판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로스쿨 성적이 (예전에는 연수원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막 법관이 된 자가 자기보다 많이 아는 것처럼 이래라저래라하는 걸 좋아하는 변호사가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경력이 많은 판사도 별반 차이 없다. 이미 머리가 굳어 몇십 년 전 내려진 판결 하나에 절절매는 판사 역시 호감형은 아니다.

아, 물론 간혹 판단력 좋고 예리한 판사들도 있다.

문제는 그런 판사가 많은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변호사님, 시간 다 됐습니다.”

“알았어. 아, 계약서 원본 챙겼지?”

“네, 챙겼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재판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문서가 되면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진다.

---*---

“카일, 훌륭한 변호사는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케이 엔터테인먼트 사무실로 향하는 차 안,

입이 심심했던 로레나의 인하우스 카운슬(사내 변호사) 에드워드 리는 동행한 클리포드 샌즈의 어쏘 변호사 카일 맥밀런에게 대뜸 능력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잠시 뒤 있을 미팅에 관한 상의는 이미 끝마친 상황이라, 딴에는 자신의 친구이자 카일의 상사인 해리 에반스를 띄워주려는 의도였다.

“글을 잘 쓰든, 말빨이 좋든, 아니면 순발력이 뛰어나든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아, 네.”

“여기 있는 네 상사, 해리의 특별한 능력은 뭔 줄 알아?”

“에디, 또 뭔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에드워드의 의도를 알아챈 해리 에반스는 저지하는 시늉을 했다.

“아니야. 이런 건 필요한 거라고, 해리. 카일, 클리포드 샌즈에 조인한 지 얼마나 됐지?”

“1년 반 정도 됐습니다.”

“일 년 반 된 어쏘에게 이런 어드바이스는 뼈와 살이 되는 거라고. 안 그래, 카일?”

“네, 그렇습니다.”

“그런 자세 좋아. 아, 근데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에반스 변호사님의 특별한 능력을 말씀해주시려고 했습니다.”

“아, 그래! 해리의 능력! 클리포드 샌즈의 가장 어린 지분 파트너이자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분야 파트장을 맡고 있는 해리 에반스의 능력은 말이지, 상대의 수를 읽을 수 있다는 거야.”

뭔가 진짜 특별한 걸 기대한 것일까, 카일 맥밀런의 얼굴에 순간 어색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뒷자리에 앉은 에드워드 리와 해리 에반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카일, 자네는 법정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방 변호사의 입을 틀어막고 판사와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변호사가 훌륭하다고 생각해?”

“아···훌륭한 거 아닌가요?”

“아, 뭐 그것도 훌륭한 거지. 맞아, 요새는 그런 변호사도 흔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진짜 훌륭한 변호사는 어떤 변호사인 줄 알아?”

“어떤 변호사인가요?”

“소송에 가지 않는 변호사, 소송할 필요 없이 그 전에 일을 해결하는 변호사.”

“아···.”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말이야. 길게 소송 가서 해결하는 변호사는 솔직히 별로야. 아, 물론 형사소송은 다른 이야기야. 그거야 소송을 피하기 어려운 거니까. 하지만 민사는 달라. 소송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해. 소송하겠다고 법률비용만 왕창 쓰고 이겨주는 변호사를 좋아하는 클라이언트는 아무도 없어. 그건 변호사한테만 좋은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여기 있는 자네 파트너 변호사 해리 에반스는 진짜 훌륭한 변호사라고 할 수 있지. 상대의 움직임을 몇 수 내다보고 소송 가기 전 분쟁을 종결시켜버리거든. 바로 오늘처럼 말이야.”

해리 에반스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말은 싫어하는 척했어도 에드워드의 칭찬에 내심 기분이 좋다.

그런데 카일 맥밀런은 소송 전문 변호사를 비하하는 듯한 에드워드의 발언이 조금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소송을 잘할 줄 아는 건 변호사의 기본 소양 아닌가요?”

영국법상 변호사라는 직업은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시터(solicitor)와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배리스터(barristor)로 나뉜다. 현대사회에서 어떤 부류가 더 실력이 좋은 변호사(lawyer)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배리스터 되기가 솔리시터 되기보다 까다롭고 배리스터 일이 좀 더 전통적인 변호사 업무에 가까워 일반적으로 배리스터를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파트너 변호사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카일 맥밀런의 어머니는 영국의 판사였고 아버지는 배리스터였기에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이었다.

하나, 솔리시터인 해리 에반스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일?”

“네.”

“자네 대학 때 펜싱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

“네, 했습니다.”

“어땠어? 내가 알기로는 펜싱도 논란 많은 판정이 꽤 많이 나오는 스포츠로 알고 있는데.”

“네?”

“펜싱 하면서 억울한 판정을 받은 적이 없었냐고? 심판이 공격권 인정을 안 해주었다든가, 결정적인 순간에 시간 계산을 불리하게 했다든가. 없었어?”

펜싱은 룰이 있고 심판이 있는 경기이다.

당연히 오심이 있다. 전 세계인이 지켜보고 최첨단 장비를 사용하는 올림픽에서도 오심이 나오는데, 하물며 대학 선수들 간의 경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있었습니다만···.”

“있었습니다만 뭐? 오심이 가끔 일어나지만, 스포츠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흔하지는 않다고 말할 생각이었나? 오심 역시 게임의 일부분이라고?”

“···예.”

“좋아. 만약에 자네가 정말 이길 줄 알았던 소송에서 판사의 그릇된 판단으로 졌다고 가정하자고, 그때도 클라이언트에게 같은 말을 할 건가? 억울하게 지기는 했지만 이런 오심으로 인해 법률 시스템에 갖는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고? 항소해보자고?”

“······.”

“만약 클라이언트가 항소할 시간이나 돈이 없다면? 그때는 어떡할 거지? 그때도 잘못된 판결이 ‘소송의 일부분’이라는 변명을 대고 책임을 회피할 건가?”

“······.”

2년 차 어쏘 변호사의 순진한 항변에 이제 해리 에반스의 말투는 살짝 공격적이기까지 해졌다.

“카일, 사람들 사이의 분쟁은 스포츠가 아니야. 지난 몇 년간 쌓아놓은 실력을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고. 진짜 싸움이야. 결투라고. 법이 막아두어서 못할 뿐이지, 그 사람들에게 칼을 잡아주면 아마 서로 죽일 때까지 싸울지도 몰라. 그런 사람들에게 판사의 오판까지도 받아들이라고 하면 ‘아, 네 그렇죠’하고 순순히 받아드릴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요?”

그의 반문에 해리 에반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넨 평생 훌륭한 변호사가 될 수 없어.”

“······.”

“결과를 판사에게 맡기는 능력 없는 변호사가 되는 거라고. 카일, 자네는 자네의 운명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무능력한 변호사가 되고 싶나?”

“···아니요.”

“그럼, 오늘 잘 보고 배워. 진짜 훌륭한 변호사는 카드를 열어보기도 전에 상대가 게임을 포기하게 만드는 변호사니까.”

해리 에반스의 연설이 끝날 때쯤 그들을 태운 차가 케이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아니었지만, 배리스터와 솔리시터를 비교하는 듯한 어쏘 변호사의 항변에 기분이 살짝 상한 그였다.

차에서 내린 해리 에반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건물 안으로 향했다.

‘내가 보여주지. 진짜 훌륭한 변호사라는 게 어떤 건지.’

이번 합의 협상에서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일도 하지 않은 그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서지우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평생 알 수 없었다.

---*---

케이 엔터테인먼트, 회의실 안으로 로레나의 인하우스 카운슬과 클리포드 샌즈 변호사들이 들어왔다. 국내에서 규모로 TOP3 안에 드는 케이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은 로레나 못지않게 근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리.”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클리포드 샌즈의 해리 에반스 변호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라고 합니다.”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영어를 못하는 이동주 대표를 위해 통역사가 대동했지만, 변호사들은 별도의 통역이 필요 없었다. 인사가 끝나자, 변호사들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가 보낸 계약 해지 통지서 받으셨지요?”

“네, 받았습니다.”

“한윤정 양의 계약 위반이 너무나도 명백하기에 이의가 없을 줄 예상합니다만, 혹시 반대 의견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렇다는 건 분쟁 없이 계약금과 모델료를 반환하고 위약금을 지급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안 그래도 그 부분에 관해서 설명을 듣고자 오늘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계약서 17조 4항을 위반한 사실은 맞지만, 계약서 어디에도 17조 4항을 위반했을 시, 계약금과 모델료를 반환하고 위약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분명 계약서 35조 2항에······.”

서지우의 대답에 해리 에반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여러 번 확인한 조항이었는데,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뭐였더라······.

해리 에반스는 들고 온 브리프 케이스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내 35조를 펼쳤다.

그런데···.

“어!”

없다! 있어야 할 문구가 없다! 근데, 더 이상한 건 기억이 나질 않는 거다.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가물가물하다.

“카일, 계약서 원본 챙겨왔어?”

“네.”

“꺼내 봐.”

그러나, 어쏘 변호사가 챙겨온 계약서 원본에도 없다. 35조 2항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조항이 진짜 있었는지까지 가물가물해진다.

“카일, 여기 분명히 35조 2항에 뭐라고 쓰여있지 않았어?”

“아, 저는 기억이 잘···.”

“에디, 이 계약서가 원본 맞아?”

“원본 맞아. 35조 2항은 없네. 그런데 왜 계약 해지 통지서에 35조 2항을 언급했지? 혹시 실수한 거야?”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어. 분명 35조 2항에···.”

이제는 정말 혼란스럽다. 처음부터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바보가 그렇게 계약서 초안을 잡는단 말인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한번 계약서를 짚고 넘어가실까요? 계약서상 한윤정 씨가 헤어스타일을 바꾸었을 경우 양측 협의 하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것은 저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없는 조항을 들먹이며 일방적으로 해지 통보를 하는 건 영국법상 부당한 계약 해지에 해당한다는 건 미스터 에반스가 더 잘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이미 로레나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도 했던데, 유감입니다. 사실 오늘은 그로 인해 입은 한윤정 명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논의하고자 요청한 미팅입니다.”

뒤죽박죽되어버린 기억과 예상치 못한 상대의 공격.

차 안에서 들은 ‘진짜 훌륭한 변호사’에 대해 일장 연설 뒤 멋진 카운터어택을 기대하는 어쏘 변호사의 선망 어린 눈길에 해리 에반스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카운터어택이 없다.

계약 해지와 위약금 청구의 근거였던 35조 2항이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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