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33)

해결사 (1)

“부장님, 방금 법무법인 해결이었는데요. 로레나랑 체결한 계약서 원본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통화를 마친 여직원의 질문에 케이 엔터테인먼트 총무팀 장민철 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딱히 법무법인 해결에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형 로펌에 견줄만한 비싼 해결의 비용이 괜히 못마땅한 그였다.

“사본 안 보내줬어? 원본이 왜 필요하대?”

“모르겠는데요.”

“하여간 유별나. 요새 누가 원본 계약서 보자고 한다고. 법원에도 사본 내는 판국에···.”

장민철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캐비닛에 들어있던 로레나 계약서 원본을 꺼내 여직원에 건넸다.

“중요한 거니까 퀵 시키지 말고 직접 가져다주고 꼭 영수증 챙겨와. 알았지?”

“네.”

의도치 않게 콧바람 쐴 기회가 생긴 여직원이 신이 나서 사무실을 나가자, 끼어들 눈치만 보고 있던 김정훈 과장이 부장에 묻는다.

“거기는 문서 원본을 종종 요구하더라고요. 원본하고 차이가 없다고 했는데도 꼭 원본을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말이야. 소송 중인 거도 아니고 원본이 왜 필요하냐고. 쓸데없이 가오 잡는 거지, 있어 보이려고.”

“저번에 청구서 들어온 것을 보니까 거기 피(fee)가 되게 비싸던데. 대표님은 은근 중요한 사건은 서 변호사님한테 맡기시는 것 같아요.”

“대표님이 좋아하셔. 아니 뭐, 실력이야 좋지. 실력 좋은 거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대형 로펌하고 똑같이 청구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비싸도 너무 비싸. 솔직히 그 비용 낼 거면 나 같으면 대형 로펌 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제깟 사무실이 대형 로펌만큼 하겠어? 당연히 대형이 낫지.”

장민철 부장은 괜히 심술이 났다. 얼마 전 대형 로펌에 들어간 사촌 동생을 은근슬쩍 대표에게 추천했다가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렇죠. 근데요, 부장님.”

“왜?”

“혹시 계약서 보셨어요?”

“무슨 계약서? 로레나?”

“네.”

“당연히 봤지. 대표님이랑 한 배우가 사인할 때 나도 있었는데.”

케이 엔터테인먼트에는 별도의 법무팀이 없다. 법대 출신 장민철 부장이 간단한 것들은 처리했고, 변호사의 자문이 필요한 사안은 그가 수장인 총무팀을 통해 진행되었다.

반면 최근 입사한 김정훈 과장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였다. 비록 하위 로스쿨 출신에 성적도 좋지 않은 그였지만, 회사의 법률적인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 고심해서 뽑은 인재였다.

“부장님 보시기에는 어떠신가요?”

“응? 뭐가?”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위약금 물어줘야 할 것 같던데. 계약서에 관련 조항들이 너무 명확하게 쓰여있어요.”

“그렇지? 그래! 나도 보니까 안 될 것 같애. 사전동의 없이 머리 자르면 안 된다고 명백하게 적혀있잖아?”

“네. 17조 4항에 ‘영화나 드라마 등 작품 등에서 요구될 때도 로레나의 사전동의 없이는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 된다’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작성되어 있어요.”

“그렇겠지. 생각을 해봐. 로레나가 얼마나 크고 오래된 회사인데 거기 변호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허술하게 썼겠냐고. 당연히 빈틈없이 초안을 잡았겠지. 그래서 이 문제는 대형 로펌을 써서 전략적으로 로레나와 합의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 말이.”

“빼박 계약 위반인데 합의가 될까요? 소송하면 저쪽이 무조건 이기는 건데. 그리고 제가 찾아보니까, 위약금 90억도 이런 계약에서는 큰 금액이 아니더라고요.”

“에휴. 그럼 한 배우가 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싹싹 빌어야지, 뭐 어쩌겠어.”

“한윤정 씨가 무릎을 꿇을까요?”

“안 꿇으면 어쩔 거야? 90억이 날아갈 지경인데. 그러길래 오밤중에 머리카락은 왜 잘라? 제 몸이 진짜 자기 건 줄 알아. 그 몸에 걸려있는 계약이랑 보험이 얼마인데. 쯧.”

---*---

변호사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다.

「계약은 사랑과도 같다. 애초에 깨어지라고 만들어진 약속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계약을 지키고 수행한다면 변호사가 할 일은 없어지니까.

띠리링- 띠리링-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미팅 들어가기 전, 케이 엔터테인먼트 이동주 대표와 통화를 한 서지우는 한국 사무실에 있는 윤정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변호사님. 세 시에 미팅 들어가시는 거 아니셨나요?

“들어갈 거야. 방금 이동주 대표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로레나 계약서 원본은 받았어?”

사실, 모든 것이 전자화된 세상에서 계약서 원본은 상대방이 계약의 존재 자체를 다투거나 원본과 사본에 내용 차이가 있지 않은 한 큰 의미가 없다.

게다가 요새같이 체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계약 과정을 전자문서로 남기고, 모두가 고성능 카메라가 장착된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현실에서 계약의 존재를 다투거나 원본과 사본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하기란 쉽지 않다.

-네, 받았습니다.

“내가 갈 때까지 잘 챙겨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지우가 원본에 집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찾아보라는 것은 찾아봤어?”

-네, 봤는데요. 웨스트로와 렉시스넥시스에도 비슷한 판례는 없었습니다.

“없겠지. 없을 거야.”

웨스트로(Westlaw)와 렉시스넥시스(LexisNexis)는 미국의 가장 큰 두 개의 법률 정보 데이터베이스로 미국 및 영미법 국가들의 법령과 판례, 공공기록 등을 보유하고 있는 사이트이다.

유료회원제로 운영되며, 구독등급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데이터베이스를 전부 이용하려면 대략 한 달에 미화 400~500불을 지불해야 한다. 전 세계 중대형 로펌들과 영미계 로스쿨 등이 주 이용객이다.

“로레나 매출 규모랑 한윤정 씨가 광고하는 제품들 판매현황은?”

-구했습니다. 광고 시작한 지가 이제 고작 3개월 조금 넘은 시점이라 큰 변화를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신제품들이라 비교군이 없고요. 동남아시아 지역 매출은 상승세이기는 한데, 그것이 한윤정 효과라고 확신하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준거법은?”

-영국법입니다.

“중재지는?”

-홍콩입니다.

어젯밤 이메일로 사본을 받아 이미 조항들을 확인한 서지우였다. 중요한 사항이라 후배가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준거법이 한국법이었다면 위약금 세 배를 청구할 수 있는 조항의 법적인 효력을 다퉈볼 여지도 있고 중재지가 한국이었다면 위약금을 조정해볼 수도 있겠지만, 영국법과 홍콩이라면 쉽지 않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알았어. 들어가서 바로 회의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아, 이 대표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리기는 했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강조를 확실히 못 했어. 윤 변이 다시 연락해서 확실하게 전해. 적절한 디펜스를 확립하기 전까지 당분간 한윤정 씨 외출을 자제하고 특히 머리카락 상태가 대중에 알려지지 않도록 보안에 신경을 써달라고.”

-예.

“제3자가 멋대로 잘랐거나 아니면, 껌이든 불이든 불가항력에 의해 부득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는 경우에는 영국법상 조항이 어떻게 적용될지 검토가 필요해. 퍼블릭에 노출되기 전까지 대중은 한윤정 씨가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길 테니까, 로레나 입장에서는 손해가 발생하지 않은 거고 모델의 헤어스타일 변화에 대해서 숨기면 안 된다는 조항도 없었으니까 당분간은 한윤정 씨 외출을 막고 디펜스 확립할 시간을 벌자고.”

-예.

“윤 변은 내가 돌아갈 동안 불가항력 쪽을 좀 더 조사해봐. 어린아이가 껌을 붙여서 부득불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 때는 어떻게 되는지. 잘 때 누가 멋대로 잘랐거나 누가 장난으로 머리카락에 불을 붙였거나. 아, 그리고 만약에 질병으로 인해 두개골을 절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 되는 건지 검토해 봐. 된다면, 오진으로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보고. 여러 상황을 두고 생각해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내일 돌아가서 봐.”

-바로 사무실로 오시나요?

“응.”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오십시오.

딸깍.

전화를 끊은 서지우는 자신이 던졌던 질문의 답을 잠시동안 예측한 뒤, 곧바로 다른 사건 관련해서 미팅이 열리고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

로레나 홍콩지사, 회의실.

지난 분기 매출 현황을 보고받은 로레나 홍콩지사장이자 아시아지부장인 웨슬리 웡은 인상을 찌푸렸다. 취임 후, 일 년째 하락 중인 매출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케어틴 라인 매출이 왜 이래?”

지사장이 새로 출시한 제품 브랜드를 가리키며 물었으나, 회의에 참석한 부서장들은 서로 눈치만 볼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했다.

“광고는? 광고는 잘하고 있는 거야?”

그의 화살이 마케팅부서로 향하자, 마케팅부서장 에밀리는 방어적인 말투로 재빨리 대답했다.

“광고는 정해진 예산안에서 스케줄대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TV와 잡지는 물론 SNS를 통한 바이럴 마케팅도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왜 입소문이 안 나?”

“네?”

“바이럴 마케팅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는데, 왜 입소문이 안 나고 있냐고?”

“그건······.”

‘제품의 성능이나 브랜딩에 있어서 특별하다고 할 만 것이 전혀 없어서요.’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지사장의 화만 돋울 것이 뻔했고, 무엇보다도 신제품 브랜딩을 주도한 부사장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웠다. 마케팅부서장 에밀리는 얼굴만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타겟팅이 좀 잘못된 거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침묵 속에서 부사장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타겟팅?”

“예. 케어틴 라인은 10~20대를 겨냥해서 출시한 제품군인데, 전면으로 내세운 모델부터 미스파이어(misfire)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왜? 아시아 전역에 인기가 많은 배우라며?”

“인기가 많기는 한데, 10년 전에 히트한 영화로 계속되는 인기라 주로 3~40대에 인지도가 높습니다. 오히려 요새 인기 급상승 중인 케이팝 걸그룹 을 내세웠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럼 왜 그러지 않았어?”

웨슬리 웡은 파이낸스 쪽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엔터테인먼트나 모델, 광고 관련은 잘 몰랐다.

“그게 6개월 전에 한윤정 배우와 계약할 때만 해도 부사장님이 말씀하시는 은 지금만큼 그렇게 인지도가 높은 스타가 아니었어서···.”

마케팅부서장 에밀리가 대답했다. 한윤정을 추천한 사람이 그였기에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신제품이 거지 같다고 대답할 걸 그랬다. 눈치를 봤더니 부사장이 마치 런칭 실패가 마케팅의 실패인 것처럼 말한다.

그나마 다행인 거는 웨슬리 사장이 책임을 물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래서 지금은 이라는 그 케이팝 걸그룹이 우리 제품에 더 잘 어울리는 모델이라는 거야?”

그 부분에 있어서는 현재 에밀리도 동의한다. 단지, 6개월 전에는 보다 한윤정이 나은 선택이었을 뿐.

“······네.”

“그럼 지금이라도 모델 교체하면 되잖아.”

“지금 파기하면 손해가···.”

“손해가 얼마인데?”

“이년 계약에 미화 삼백만 불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계약 후 육 개월이 지난 시점에 파기하면, 계약금 전액 지급하는 걸로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흠···.”

신제품 개발에 들어간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큰돈이 아니지만, 취임 후 계속 하락하고 있는 매출을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비용이다. 웨슬리 지사장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됐어. 삼백만 달러 아끼려다가 몇천만 달러 손해 보는 수가 있어. 모델 교체해. 그리고 에드워드는 혹시라도 계약금 전액 지급을 피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고작 삼 개월 썼는데 계약금액을 다 주기는 아깝잖아.”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웨슬리 지사장은 자리에 일어섰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려는 순간, 이 누군지 핸드폰으로 찾아보던 로레나 홍콩지부의 인하우스 카운슬(사내 변호사) 에드워드 리는 작은 신음을 냈다.

“아.”

“왜? 더 보고할 거 있어?”

“우리가 모델로 썼던 한국 배우가 한윤정이라는 여자인가요?”

“네.”

에드워드의 질문에 재빨리 에밀리가 대답하자,

“이 여자가 맞나요?”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에밀리에게 내밀었다.

“네, 맞아요. 근데···어!”

사진 속 한윤정은 쇼트커트를 하고 있다.

“잘하면 계약 해지하면서 돈을 받아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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