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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마지막 무대
2013년에 이어 11년 만에 또 한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게 된 레드삭스는 바빠지고 있었다.
그들이 바빠진 이유는 단 한 선수로 인한 것이었다.
"대체 이런 옵션은 왜 넣은 거야?!"
낭패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는 사람은 레드삭스의 구단주인 패트릭 윌리스였다.
그는 이번 시즌의 MVP와 신인상 모두가 강호에게로 돌아가는 순간,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숨짓고 있었다.
팀의 4번 타자가 타격 부분의 모든 타이틀을 차지한 기쁜 상황에서 그를 분노하게 만드는 이유는 강호의 계약 내용에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내년 시즌 후에 미스터 백을 다른 팀에 뺏길 수도 있는 거잖아?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거야? 팬들의 반응을 좀 보란 말이야!"
윌리스 구단주는 그렇게 소리치며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허공으로 내던진다.
그가 내던진 종이 뭉치에는 분노한 팬들의 의견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백강호 같은 선수와 계약을 하면서 이 따위 옵션은 왜 넣은 거야? 구단주가 멍청이인 거야? 아니면 단장이 멍청한 거야?
-올 시즌 미스터 백이 신인상과 홈런왕을 모두 달성했으니 내년 시즌이 끝나고 보내줘야 하는 거잖아? 안 돼! 분명 양키스 놈들이 미스터 백을 영입할 거라고!
-헉! 그건 절대 안 돼!! 다른 팀도 아니고, 양키스 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야.
-벌써 양키스에서 8년에 3억 달러가 넘는 규모의 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야. 백강호를 양키스에 뺏겨 버리면 100년 전 베이브 루스를 넘겨줬던 밤비노의 저주가 다시 시작될 지도 모른다고!
레드삭스의 팬들은 강호가 양키스에 영입되어 다시금 밤비노의 저주가 부활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전설적인 타자인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에 보내면서 시작된 밤비노의 저주는 86년 간 레드삭스를 월드시리즈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시켰었다.
반면에 베이브 루스를 영입한 양키스는 2002년까지 무려 26회에 달하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 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레드삭스 팬들은 그 때의 악몽이 강호를 양키스에 내줌으로써 또 다시 반복되지 않을까 극심한 우려를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우려는 윌리스 구단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돼! 절대 안 돼! 당장 백을 붙잡아! 어서!"
윌리스 구단주의 외침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프 코너 단장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연다.
"그렇게 급하게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옵션이 발휘되기까지 아직 한 시즌이 더 남아있고요. 그리고..."
"멍청한 소리! 그렇게 넋놓고 있다가 결국 뺏기는 거야. 우리가 백강호 없이 내년 시즌도 지구 우승을 할 수 있을 거라 보나?"
"그건 아니지요."
"그럼 어서 백강호 선수와의 재계약 준비를 하란 말이야!"
윌리스 구단주의 독촉에 결국 코너 단장이 재계약 준비를 위해 걸음을 돌린다.
그러다가 미처 물어보지 못한 부분이 떠오른 것인지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윌리스 구단주를 돌아본다.
코너 단장이 걸음을 돌리자 그의 시선을 받은 윌리스 구단주가 묻게 된다.
"뭐야?"
"그런데 말입니다. 어디까지 제시해야 합니까?"
코너 단장의 물음에 윌리스 구단주도 멈칫하게 된다.
단장의 물음은 강호의 몸값 규모를 어디까지 줄 수 있냐는 물음이었고, 구단주인 자신은 그 돈을 지불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대체 얼마를 줘야하는 거지?'
윌리스 구단주는 강호의 가치에 대해 판단해 본다.
강호를 붙잡기 위해 양키스가 3억 달러가 넘는 돈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지 소문만이 아닐 것이다.
'최소가 3억이 되겠지. 양키스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10년에 3억 정도의 계약을 맺은 것을 생각했을 때 최소 그 이상은 되어야만 백강호 선수를 붙잡을 수 있을 거야.'
윌리스 구단주의 생각은 복잡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강호에게 역대 최고의 몸값을 안겨주고 싶었지만, 거대 구단의 자금 사정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역대 최고의 몸값이 아니라면 강호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시즌이긴 해도 백강호 선수는 4할 타율에 80홈런의 정점을 찍은 타자야. 게다가 포지션은 유격수이고. 80도루가 가능한 주력까지 갖추고 있어.'
재계약을 위해 생각하다보니 강호는 장점이 많아도 너무 많은 선수였다.
그래서인지 그를 붙잡기 위해서는 얼마를 제시해야 하는지 판단조차 되지 않는다.
'3억? 4억? 아니면 그 이상? 대체 4할에 80-80을 찍으면서 전성기에 들어간 타자에게 얼마를 줘야하는 거야?'
윌리스 구단주의 고민은 깊어진다.
하지만 강호를 양키스에게 빼앗겨, 또 다시 저주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계약서를 준비해서 가져와. 금액은 내가 직접 써넣을 테니까!"
윌리스 구단주의 지시에 코너 단장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이고, 얼마지나지 않아 메이저리그를 흥분하게 만드는 보도자료 하나가 발표된다.
[레드삭스, 팀의 4번 타자 백강호와 7년 총액 3억 2천만 달러로 재계약!]
레드삭스와 강호의 재계약 소식은 월드시리즈 종료 후 한동안 뜸하던 야구 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었다.
레드삭스의 팬들은 당연히 그 소식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렇지! 당연히 이랬어야지. 윌리스 구단주가 결정을 내려줘서 다행이야."
"4할에 80홈런이 가능한 타자를 7년 총액 3억 달러 규모면 나쁘지 않은 거지. 레드삭스가 옳은 결정을 한 거라고!"
레드삭스를 응원하는 팬들은 강호와의 재계약 소식에 찬사를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레드삭스의 빠른 행보와 강호와의 재계약 사실에 시샘을 느낀 다른 구단 팬들은 부정적인 주장을 펼치며 찬물을 끼얹는 모습이었다.
"7년에 3억 2천만 달러? 레드삭스가 제대로 미쳤구만."
"그 정도 총액이면 우리 팀 선수들 전부를 살 수도 있겠는데?"
"아무리 백강호가 좋은 타자라지만, 겨우 한 시즌을 뛴 백강호에게 지나친 몸값 아닌가?"
"두고 봐, 레드삭스가 백강호에게 거액을 안긴 결정이 결국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될 거라고."
수많은 팬들이 강호와의 재계약이 레드삭스의 발목을 붙잡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강호 1인에게 너무 많은 연봉을 지급하다보니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모두 놓치고 말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견에도 레드삭스와 강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강호는 다음 시즌에도, 그 다음 시즌에도 자신의 몸값 이상을 해보이며 레드삭스를 세 시즌 연속으로 지구 우승에 올려놓는데 성공한다.
특히 2026시즌에 또 한 번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레드삭스는 강호를 붙잡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백강호가 해냅니다! 그의 끝내기 홈런으로 이번 월드시리즈 우승은 레드삭스가 차지합니다!"
2026년 월드시리즈 우승 장면에서 캐스터인 월터 디킨스의 말이 레드삭스의 2026시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강호는 2024년부터 이어진 시즌 동안 정규 시즌에서 통산 3할 8푼 6리의 타율과 도합 224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왜 자신이 3억 달러의 사나이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레드삭스와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자신의 몸값을 톡톡히 해내며 8년 동안 무려 400개가 넘는 홈런을 때려내며 역대 최고의 홈런 페이스를 자랑하고 있었다.
레드삭스의 입장에서 또 다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백강호 선수도 이제 내년이면 서른일곱 살입니다. 거액의 몸값을 내주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게 아닐까요?"
레드삭스의 새로운 신임 단장인 테일러 단장의 물음이었다.
그는 구단이 강호와의 재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이고 있었다.
구단주인 윌리스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테일러 단장의 말이 이어진다.
"물론 백강호 선수가 우리 레드삭스에서 8년동안 450개의 홈런을 때리면서 활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거액의 재계약을 안기기에는 아무래도... 백강호를 붙잡으려고 그에게 거액을 내민다면 닉이나 존 펜을 잡을 수 없게 됩니다."
테일러 단장은 강호를 붙잡기 위해 치러야하는 부분을 피력하고 나섰다.
윌리스 구단주가 팀의 상징이 되어버린 강호를 붙잡으려 한다는 것은 알지만, 단장인 그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부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강호의 전성기는 아직 지나지 않았지만, 곧 그도 한풀 꺾이고 말 거야. 제 아무리 백강호라지만, 이미 30대 후반이 아닌가?'
이것이 강호를 바라보는 테일러 신임 단장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윌리스 구단주의 생각은 달라보였다.
"헛소리(bullshit)! 3선발 투수인 닉이나 외야 자원인 존 펜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어도 팀의 상징인 백은 대체불가야! 나머지를 버리더라도 백은 반드시 잡아야 해!"
결국 윌리스 구단주의 이 결정으로 강호는 다시 레드삭스와 7년에 이르는 재계약을 하게 된다.
강호의 한국 나이로 서른일곱, 미국 나이로 서른여섯 살에 접어든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고 강호는 테일러 단장과 일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음 시즌 역시 57홈런을 때려내며 자신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넘어갔습니다! 백강호의 투런 홈런! 그리고 이 홈런은 그의 통산 500호 홈런으로 기록됩니다! 아직 레드삭스의 백강호는 죽지 않았군요!"
월터 디킨스는 70대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강호의 500번째 홈런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비단 강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디킨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야구 선수에게는 황혼기라 할 수 있는 30대 후반이 된 강호의 활약상은 은퇴할 나이가 훌쩍 지난 디킨스에게도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 의미 있는 모습인 것이다.
"백강호의 홈런 기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 레드삭스는 계속해서 그의 홈런을 지켜보게 될 거예요."
강호의 500호 홈런 장면에서 나온 디킨스의 이 말은 강호의 남은 야구 인생을 마치 예언처럼 예견하고 있었다.
디킨스의 예견대로 강호는 500호 홈러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홈런 기록을 갱신해가며 아직 '백강호'라는 불꽃이 꺼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들은 늘어만 갔다.
"이제 백도 마흔이 되었어. 작년 시즌까지는 운 좋게 3할 타율을 유지했지만, 올해부터는 다를 거라고."
"맞아. 나도 40대 이후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게 느껴져. 제 아무리 레드삭스의 백이라도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는 거라고."
강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한지 10년이 넘었을 무렵까지 그에 대한 우려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호는 그 모든 우려들을 오직 결과로 증명해내며 자신을 향한 모든 우려들을 지워 나간다.
그러는 사이 강호의 홈런 기록은 어느새 통산 700호 홈런을 넘어서 있었고, 강호는 그쯤에서 매건 감독을 방문하게 된다.
"어서 오게, 백. 설마 은퇴하고 싶다는 얘길 하러 온 건 아니겠지? 백의 은퇴라면 아직은 안 돼."
농담 섞인 매건 감독의 인사에 강호는 피식 웃음지어 보인다.
매건 감독을 향해 웃음 짓는 강호의 얼굴에는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고 있었다.
강호가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매건 감독은 혹시라도 강호가 은퇴 얘기를 꺼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그 때마다 매건은 익숙한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백, 자네가 배리 본즈의 기록을 깰 때까지는 은퇴를 허락할 수 없어!"
매건 감독의 이 말은 벌써 수백 번은 넘게 들은 농담이었다.
그가 말하는 배리 본즈의 기록이란 본즈의 현역 생활 22년동안 기록한 762개의 통산 1위의 홈런 기록을 말하는 것이었다.
매건 감독은 강호가 본즈의 그 기록을 넘어설 때까지 은퇴를 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매번 전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 가지 말이 더 추가된 모습이었다.
"백, 자네 정도 되는 선수를 보유하고도 우리 레드삭스가 최근 12년 동안 기록한 월드시리즈 우승이 네 번밖에 되질 않아. 자네나 내가 은퇴하기 전에 레드삭스를 한 번 더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려놔야하지 않겠나?"
매건 감독의 말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이미 70대가 넘었으니 현역 지도자로 활동하기에는 많은 나이였던 것이다.
강호는 그런 매건 감독의 말에 살짝 미소 지어 보인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은퇴를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은퇴 얘기만 아니라면 백, 자네는 어떤 말을 해도 좋아. 할 얘기가 뭔가?"
"포지션 말입니다. 혹시라도 저 때문에 유격수 자리에 유망주를 기용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제 포지션을 다른 곳으로 옮겨도 좋습니다."
강호의 말에 매건 감독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매건 감독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강호에게 웃음 띤 얼굴로 묻게 된다.
"며칠 전에 실책을 한 것 때문에 그러나? 그 일 때문이라면 그런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돼. 레드삭스의 유격수는 여전히 백강호의 자리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레드삭스도 저 아닌 유격수를 키워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제 굳이 유격수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외야수나 1루수를 봐도 좋고요."
강호의 대답에 매건 감독은 잠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무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팀의 유격수를 도맡았던 강호의 활약은 레드삭스가 네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로 인한 반대급부로 레드삭스는 다른 유격수들이 자라날 수 없는 팀이 되고 말았다.
매건 감독도 그 부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백강호라는 전설을 보유하고 있는 팀의 사소한 문제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심인가?"
매건은 묻고 있었다.
강호의 커리어나 그의 몸값을 고려했을 때 함부로 그의 포지션을 변경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수 본인이 그것을 용납해 준다면 팀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임에 분명했다.
"네."
매건 감독의 질문에 대한 강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도 자신을 배려해준 팀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리고 싶었고, 이제 적지 않은 나이로 유격수를 본다는 것은 팀에게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동안 자신을 믿고 중책을 맡겨 준 레드삭스 구단에 대한 강호의 작은 배려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매건 감독의 대답에 강호의 표정없는 얼굴에 작은 변화가 생겨난다.
"백, 자네를 유격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으로 돌릴 생각은 없네."
"네?"
강호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강호 본인의 제안을 받는 것이 현명한 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다른 포지션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그의 발언은 팀의 이득과는 멀어 보이는 대답이었다.
'나 말고 유격수 자리에 올릴 루키들이 많을 텐데? 보가츠나 라미레즈도 있고, 백업 2루수인 몬테사도 유격수 수비가 가능해. 그런데 왜?'
강호는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신인 내야수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고는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매건 감독을 응시한다.
그런 강호의 시선과 마주한 매건 감독은 불현듯 활짝 웃어 보인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어. 팀을 위한 결정이라고 해도, 먼저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매건은 강호에게 한걸음 다가오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백강호, 자네를 유격수가 아닌 1루수나 외야수로 보게 되는 느낌은 분명 좋은 느낌이 아닐 거야. 레드삭스의 팬들도 바라지 않을 거고. 자네는 우리 레드삭스의 영원한 유격수로 남아주는 게 좋겠어. 대신."
매건은 강호의 배려에 고마워하면서도 팀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의 유격수 자리를 바꾸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팀에 백, 자네의 후임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다른 유격수를 경기에 올릴 때는 자네를 지명타자 자리에 올리도록 하지. 그 정도라면 자네와 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강호의 제안을 거절한 매건 감독의 대답이었다.
매건은 팀의 레전드로 남게 될 강호의 상징성을 지켜주기 위해 절충안을 내어놓고 있는 것이다.
강호는 결국 웃는 얼굴로 매건의 제안에 응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강호의 감사 인사로 결국 '유격수이자 팀의 4번 타자인 백강호'라는 상징성은 그가 은퇴를 결정할 때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이제 강호의 야구 인생에서 남아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강호는 단 하나,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남아 있는 혼을 불태운다.
여전히 그는 술은 물론이거니와 튀긴 음식이나 탄산음료조차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또한 결혼이나 연애까지 미뤄둔 채 마치 수도사처럼,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목표를 위해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강호의 숭고한 싸움은 결국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지금 담장을 넘긴 백강호의 홈런이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입니다! 백강호의 지금 홈런은 그의 통산 763번째 홈런으로 기록됩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홈런왕이 탄생합니다!"
월터 디킨스의 외침으로 강호가 야구 인생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꿈이 이루어진다.
강호는 그 현장의 환호를 느끼며 이제 자신의 야구 인생이 저물어 감을 직감한다.
'이제 됐어.'
763번째 홈런을 치고 홈으로 돌아온 강호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지난다.
강호는 자신의 마지막 타석을 눈에 담기 위해 펜웨이파크를 가득 채운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강호를 지켜보는 팬들은 어떠한 환호도, 어떠한 응원도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다만 자신들의 영웅이 맞이할 마지막 타석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쓰는 모습이었다.
강호는 그런 팬들의 중심에서 그들을 향한 마지막 선물을 날려 보낸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모든 팬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또한 강호의 이름을 외치는 그들의 환호가 뒤따른다.
그것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강호의 통산 774호 홈런은 그렇게 은퇴식을 앞둔 마지막 타석에서 완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에게 남은 것은 야구 인생의 마지막 무대, 은퇴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 시점은 강호의 마지막 무대를 앞에 두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에게로 넘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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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모두가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준 것에 감사한다.
내가 오늘 경기에서 안타를 때려낸 후 은퇴식을 진행한다는 윌리스 구단주의 약속이 지켜져 지금 이렇게 은퇴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미스터 백,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마이크를 건네 온다.
평소 종종 보곤 했던 구단 직원의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나는 그에게 감사의 눈짓을 보내고, 내 야구 인생의 마지막이 될 무대의 중심으로 걸음을 옮긴다.
시선이 뒤따른다.
그라운드에는 구단의 모든 직원들이 내게 박수를 보내오고 있었다.
또한 펜웨이파크를 가득 채운 레드삭스의 홈팬들도, 심지어는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찾아온 양키스의 원정 팬들마저도 박수를 보내오는 모습이었다.
은퇴식 경기를 메이저리그 첫 상대팀이었던 양키스로 결정한 것은 재밌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무대의 중앙에 선 채 천천히 누군가가 건네 준 마이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팬들을 위한 마지막 말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연다.
"레드삭스 팬들의 성원은 저로 하여금 보스톤이라는 도시를 사랑하게 해주었고, 또한 저를 14년 동안 레드삭스에 남게 해주었습니다."
이 첫 마디를 정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기억이 스쳐 지난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에서 걸어온 14년이라는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는 그 14년을 건너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 14년이라는 세월은 외롭고 고독한 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추억처럼 스쳐 지난다.
어쩌면 나를 이곳에 오르게 해준 이면에는 그런 고독함이 원동력이 되어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압니다. 저는 이제 모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하지만, 레드삭스에서 지내왔던 모든 기억들이 내일의 저를 살아가게 해 줄 겁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지금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 자리에 오른 지금, 나는 그 어떠한 거짓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팬들의 환호도 더는 없을 것이다.
내게는 메이저리그라는 꿈이 있었고, 또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염원했었다.
그 모든 것을 이뤘을 때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겠다는 마지막 꿈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꿈은 배리 본즈의 통산 홈런을 넘어서게 되었을 때 모두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많은 꿈들을 현실로 만들어낸 지금,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저를 메이저리거로 만들어준 출발점에는 행운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행운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이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을 겁니다."
오직 노력이나 열정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출발점에는 그녀가 내게 준 행운이 존재했었다.
그렇기에 내가 마지막 무대에서 남길 말은 그녀를 위한 말이 될 것이다.
"내게 행운이라는 기회를 주신 그분께."
이 말을 꺼냈을 때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이 말을 통해 떠오른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내 가슴을 뒤흔드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15년 전,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출국을 준비하던 그 때 당시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 본다.
이야기는 휴대폰을 통해 전해들은 형의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강호, 너도 챙겨갈 게 있으면 집 비어있을 때 들러서 가져가.
형의 이 말에 '알았어'라고 짧게 대답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때의 형은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더 좋은 환경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형은 이사를 가기 전에 혹시 사직동 집에 내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 가져가라는 말을 전해왔었다.
나는 그 말에 별다른 생각 없이 사직동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수많은 상패들, 트로피들, 그리고 자이언츠 시절 기록 달성 순간에 챙겨 둔 야구공과 배트들, 글러브까지.
그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 발견한 것은 그 전까지는 보지 못했었던 오래 된 편지 한 장이었다.
편지는 진열대의 반대편에 자리한 형의 책상 서랍 깊은 곳에 놓여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그 때 왜 갑자기 그 책상 서랍을 열게 되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운명의 이끌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 순간 나는, 편지 봉투에 쓰여진 열한 글자의 글씨에 사고가 멈추는 것을 느꼈다.
-강수, 강호, 진주에게. 엄마가.
빛 바란 편지 봉투 겉면에 쓰여진 글씨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동안 한 번도 본적 없었던 편지의 겉면에는 분명 그녀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때는 사랑했던 이름, 하지만 이제는 다시 부를 수 없게 된 이름, 엄마.
"왜?"
왜 형이 이 편지를 여기에 두었을까?
왜 형은 이 편지를 열어보지 않은 채 그저 보관하고만 있었을까.
수없이 떠오르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 편지 봉투 안에 들어있을 것이다.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봉인된 편지 봉투를 열 수 있었다.
[강수, 강호, 진주에게.]
편지지에 쓰인 글씨체 역시 그녀의 것이 분명했다.
손이 떨려오고, 호흡이 힘들어진다.
편지지 첫 면에는 별다른 내용이 적혀져 있지 않았지만, 편지를 읽어내려 갈수록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그녀의 편지가 나를 슬프게 했다.
그것은 그녀가 영면으로 떠나기 몇 달 전, 죽음이 다가오는 고통의 순간에 적어 내려간 기록들이었다.
결국 나를 무너지게 만든 것은 편지의 마지막 장에 담겨 있는 내용이었다.
[....장남 강수에게는 동생들을 지킬 수 있는 의지를.
항상 구속받고 살았던 막내 진주에게는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자유가 깃들기를.
그리고, 우리 둘째 강호.]
거기까지 읽었을 때 눈앞을 가리는 눈물로 인해 편지를 읽어 내리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녀가 죽음을 맞은 이후 누구에게도 눈물을 흘린 기억이 없었다.
비록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라 해도 결코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에야 다음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지독하게 불운했던 내 아들 강호에게는 인생에 단 한번이라도, 아니 본인이 꼭 필요한 만큼의 행운이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제 남은 숨결까지 모두 가져가도 좋으니.
제 마지막 소원만큼은 꼭 들어주시기를 빌고, 또 빕니다.
사랑하는 내 자식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단 하나 남은 소원은 꼭 들어주소서.
미안하고, 사랑하고, 또 미안하구나.
내 사랑하는 강수, 강호, 진주야.
2012년 2월 18일의 자정을 지나는 시점에서, 엄마가.]
편지를 끝까지 읽어 내린 나는 결국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은퇴식의 마지막 순간에 오른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내게 행운이라는 기회를 주신 그분께 진심으로."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목 안이 답답했고, 가슴은 지나칠 정도로 무거웠다.
눈가를 적시는 눈물이 나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지금 이 말만은 꼭 전해야 하리라.
"감사하다고."
결국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닦아내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눈물을 흘리더라도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 이 말을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의 진심만큼은 전달될 것임을 알기에.
"참...많이...사랑한다고."
이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그녀가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해줬더라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그 말을 꼭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생전에 해보지 못한 말을 마흔 살이 넘은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하게 된다.
"말하고....싶습니다."
비로소 나는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2019년 2월 18일의 자정이 지날 무렵, 나를 찾아온 행운이 이제 누가 보내준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보내준 행운이라는 기회로 나는 지금 이 마지막 무대에서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려도 더 이상 감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웃을 것이다.
이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에서 나는 그렇게 웃음 지었다.
나의 인생은 이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므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며 만나게 될 모두에게 웃으면서 말할 것이다.
나 백강호가 여기 있었노라고.
-끝-
============================ 작품 후기 ============================
이것으로 강호의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담고자 했던 모든 내용을 담았기에 후기나 에필로그는 남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한 가지, 본문에서 끝까지 밝히지 않은 내용은 강수와 강호는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강호의 아버지와 강수의 엄마가 재결합을 해서 새가족을 이루었고, 그렇게 해서 얻게 된 결실이 진주입니다.
원래는 본문에 담기 위해 썼었지만, 그 내용이 스포츠 장르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짧은 말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홈런왕 백강호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참 많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