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4 / 0335 ----------------------------------------------
[완결]마지막 무대
훗날 강호가 칸토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그를 찾아온 한국의 기자들로 부터였다.
강호의 한국 시절부터 친분을 쌓았던 오썬 스포츠의 허일수 기자가 지나가는 말을 통해 칸토의 근황을 전한 것이다.
"백강호 선수, 그거 알고 있습니까?"
"뭘 말입니까?"
"트레이드 마감 시한 전에 이글스가 영입한 저마일 칸토가 벌써 5승째를 따냈습니다. 덕분에 이글스는 포스트 시즌 진출이 유력해졌어요."
허일수 기자가 전한 말에 강호는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 시절부터 포커페이스로 유명했던 강호의 표정 관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그렇습니까? 저마일 칸토 투수와는 친분이 깊은 편은 아니지만, 한 때 같은 팀 동료로서 기분이 좋은 일이네요."
강호의 대답은 그러했다.
딱히 자신이 칸토에게 조언을 해준 것이 아니었기에 괜한 공치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강호의 대답을 들은 허 기자의 표정이 묘해진다.
"친분이 깊은 편이 아니라고요? 칸토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던데요."
허 기자는 웃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스마트 폰을 열어 이글스에 안착한 칸토의 인터뷰 기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강호로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기자: 한국에 정착하는 문제는 어렵지 않습니까?
-저마일 칸토: 쉽지는 않았지만, 한국으로 오기 전 팀의 4번 타자인 백강호 선수가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그가 해준 말이 한국에 정착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기자: 백강호 선수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나 보죠?
-저마일 칸토: 레드삭스의 모든 선수들은 미스터 백을 좋아하고, 또 존경한다. 그는 경기장에서만 완벽한 선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훌륭한 인격자다. 나 역시 그를 매우 좋아한다.
-기자: 백강호 선수의 레드 삭스 생활은 어떤가요?
-저마일 칸토: 클럽하우스 장인 호세 존스를 더불어 빅 리그 경험이 많은 선수들 모두 그를 좋아한다. 또, 백과 함께 올 시즌에 데뷔한 루키 선수들은 그를 자신들의 행동 대장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그만큼 레드삭스 선수들 사이에서 백의 영향력이 막강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은 강호는 인터뷰 기사에서 시선을 뗀다.
그 후로도 계속된 인터뷰 기사는 칸토의 내용보다는 강호 자신의 레드삭스 생활에 관한 내용이 더욱 많았기 때문이다.
"왜 칸토의 인터뷰에서 제 얘기만 하는 겁니까?"
강호가 칸토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가장 궁금한 내용이었다.
그의 물음에 허 기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당연한 거 아닐까요? 국내 리그에서 메이저로 직행한 선수가 메이저를 점령하다 못해 씹어 삼키고 있는데 어떻게 관심을 안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요즘 백강호 선수의 레드삭스 경기를 보는 국내 팬들이 많아졌어요. 종종 KBO경기 시청률보다 백강호 선수의 레드삭스 경기 시청률이 높을 때도 있을 정도라고요."
허 기자는 싱긋 웃는 얼굴로 강호에 대한 국내 반응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강호가 자이언츠에 소속되어 한국리그에 있을 때보다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지금의 인기가 훨씬 더 대단하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도 한국 시절에는 자이언츠 팬들만이 강호를 응원했지만, 지금은 모든 국내 야구팬들이 강호를 응원하게 된 것인줄도 몰랐다.
'뭐, 나를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니까.'
강호는 그렇게 여기기로 하고, 허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강호의 행동을 멈추게 만든다.
"미스터 백, 인터뷰 중에 죄송한데 브루어 코치님이 훈련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경기도 얼마 안 남았고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근 들어 강호와 친해지게 된 루키들 중 한 명인 저스틴 데이비슨이었다.
그는 22살의 젊은 내야수로 루키들의 신고식 때 강호를 트집 잡고 나섰던 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강호와 친해지기 위해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애쓰고 있는 상황이다.
"브루어 코치님께 금방 가겠다고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강호의 대답에 데이비슨은 정중하게 대답하며 물러난다.
그러자 허 기자가 웃음 띤 얼굴로 작별의 말을 건네오고 있었다.
"그만 백강호 선수를 놓아드려야겠네요. 그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요즘들어 한국리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많이 좋아졌다는 겁니다. 예전만 해도 KBO리그를 더블 A수준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것보다는 격상이 된 것 같아요. 아마도 강호 선수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허 기자의 말에 강호는 괜스레 뿌듯해진다.
레드삭스의 4번 타자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자신을 통해 자국리그의 수준이 재평가 되고 있다니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크게 내색하지 않으며 입을 연다.
"그럼 오늘 경기도 분발해야겠네요."
강호의 짧은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허 기자는 과연 강호답다는 생각을 가지며 작별의 말을 덧붙인다.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70호 홈런도 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국 팬들에게 좋은 기사를 쓸 수 있게 말이에요."
허 기자의 응원에 강호는 웃음 띤 얼굴로 '노력해보죠'라고 답한 후, 훈련을 위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반쯤은 농담으로 말했던 허 기자의 바람이 그날의 경기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따악!!
펜웨이 파크를 강타하는 타격음에 관중석이 환호로 가득 차오른다.
그리고 중계석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바로 저 공입니다! 저기 저 경기장 밖으로 날아가는 공이 백강호 선수의 시즌 70번째 홈런이라고요! 여러분은 지금 메이저리그의 야구 역사가 다시 쓰여 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강호의 홈런 상황을 알리는 월터 디킨스의 목소리는 잔뜩 고조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 경기에서 완성된 강호의 70홈런, 70도루에 전율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디킨스의 곁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해설자, 개리 스캇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70홈런, 70도루가 가능한 선수가 있다니요?!"
스캇의 놀란 탄성에 다시 디킨스가 마이크를 잡는다.
"있습니다! 바로 우리 레드삭스에 말입니다. 바로 저 타자가 우리 레드삭스의 4번 타자인 백.강.호입니다!"
디킨스는 미국인으로서는 발음하기 힘든 강호의 이름을 한 글자 씩 완벽하게 발음해내며 강호의 기록 달성 순간을 축하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감상평을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백강호 선수가 기록한 이 기록이 과연 다시 달성되는 순간이 있을까요? 여러분, 이 순간은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일 겁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에요!"
월터 디킨스의 말이었다.
그는 강호의 70홈런 장면을 가리켜 '다시 오지 않을,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킨스의 그런 선언은 불과 몇 주 후에 묻혀 버리고 만다.
몇 주 후, 다시 맞이하게 된 펜웨이 파크의 홈경기에서 월터 디킨스는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감탄사는 몇 주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Unbelievable)! 여러분은 믿어지십니까? 80번째 홈런입니다! 레드삭스의 4번 타자가 메이저리그 최초의 80호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백강호가 때려낸 쓰리런 홈런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메이저리그의 홈런 역사를 다시 씁니다!"
디킨스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레드삭스가 2024년 정규 시즌 종료를 고작 한 경기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강호는 다음 경기인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또 하나의 홈런포를 추가하며 결국 자신의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 기록을 홈런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4할 2푼 3리.
강호가 기록한 이번 시즌의 타율은 1941년 테드 윌리엄스가 적성한 0.406의 타율 이후 명맥을 상실한 메이저리그 4할 타자의 계보를 계승하는 중요한 발자취로 각인된다.
무려 84년 만에 달성된 4할 타율이었고, 또한 21세기 들어 처음 기록되는 4할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강호의 기록이 단지 타율에만 그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시즌 여든한 개의 홈런.
2001년 배리 본즈의 73홈런 이후 깨지지 않을 것 같던 홈런 기록은 80이라는 숫자를 넘어서며 새로운 홈런왕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시즌 85개의 도루까지 더해지며, 시즌 4할 2푼 3리의 타율과 80홈런, 80도루, 200타점, 200득점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모든 이들은 '백강호'라는 이름이 주는 파급력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고, 메이저리그는 새로운 전설의 탄생에 전율한다.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타자.
그것이 강호의 이름을 수식하는 설명이었고, 그렇게 강호는 자신의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을 다시없을 기록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강호는 지금, 월드시리즈 무대에 서있었다.
"우와아아아!!!"
"끝내자!!"
"백강호, 날려라!!"
펜웨이 파크가 강호의 이름을 부르짖는 팬들의 목소리로 요동치고 있었다.
강호는 그런 팬들의 바람을 가슴에 안은 채 올 시즌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타석에 올라선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이 타석에 오르기를 간절해 바래왔었어. 월드시리즈는 모든 야구선수들의 꿈이자 나의 최종 목표였으니까.'
강호는 머리를 가득 채우는 생각의 파편을 걷어내며 자신이 지금 해야만 하는 일 한 가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그것은 모든 이들이 바라는 단 하나의 모습이었다.
'홈런이여야만 해! 오직 이 순간 하나를 위해 달려온 거니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두를, 그리고 나 자신을 실망시킬 수는 없는 거야. 꿈의 무대에 오른 지금, 내가 만들어 내야할 결과는 오직 그거 하나야!'
결론을 내린 강호는 천천히 배트를 들어올린다.
그의 시야에 루상을 가득 채운 주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자신을 향해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난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흘러가는 지금의 순간에서 강호는 타석에 홀로된 것 같은 고독감을 느낀다.
'나는 이 무대에 오를 자격이 있는가?'
강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모든 야구 선수들이 바라는 꿈의 무대에 서서, 어쩌면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타석에 자리 잡은 채,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꿈에 다가설 만큼 최선을 다했는가?'
그 질문을 통해 강호는 조금씩 답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스스로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힘겹고 고독한 길이었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기에, 그에 답하는 강호의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의 승부를 이겨냄으로써 내가 간직해왔던 꿈을 완성하는 것일지도 몰라.'
강호의 생각 속에 상대 투수의 초구가 던져지고, 강호는 그 공을 걸러낸다.
주심은 볼을 선언했고, 상대 투수는 다시금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 투구를 준비한다.
강호는 그런 투수의 눈을 매서운 눈빛으로 응시하며, 스스로를 향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던진 강호의 마지막 질문은 그저 단순한 질문이 아닌 앞으로의 삶이 되리라.
그렇기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신중히 내어놓는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 단지 반드시 해야 할 일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야!'
강호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상대 투수의 2구가 뿌려지고, 강호는 그 공을 향해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두른다.
하지만 생각이 복잡했던 이유인지 가라앉는 체인지업에 크게 헛치는 헛스윙이 되고 만다.
주심은 그 모습에 스윙 스트라이크를 선언하고 있었다.
강호는 이제 결론을 내릴 때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타석은 결코 끝이 아니야. 길게 이어지는 삶의 장면들에서 평생토록 기억될 찰나의 순간일 뿐, 그러니까 나는.'
강호는 마지막 생각을 끝내며 몸을 움직인다.
이미 상대 투수의 손을 떠난 3구 째 공이 포수의 미트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뿌드득!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발끝은 마치 타석과 일체된 듯이 지면을 꽉 붙들고 있었고, 상체를 지지하는 허벅지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이미 회전을 시작한 허리는 날아드는 공을 향해 휘둘러지는 배트에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배트를 휘두르는 강호의 스윙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다!'
확신이 담긴 강호의 스윙은 상대 투수의 공을 정확히 강타하고 있었다.
배트 끝에서 느껴지는 공의 감각을 통해 강호는 이 승부의 결과를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강호의 그런 직감은 펜웨이파크를 가득 채우는 홈팬들의 함성을 통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와아아!!"
팬들의 함성과 함께 레드삭스의 모든 선수들이 일제히 그라운드를 향해 뛰쳐나오고 있었다.
강호는 모든 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의 중심에서 걸음을 떼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올린다.
그 모습에 펜웨이파크를 가득 채우는 목소리가 더욱 뜨거워진다.
"와아아아아!!!"
팬들의 함성 속에 강호는 들고 있던 배트를 손에서 내려놓는다.
강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을 향한 팬들의 함성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마추어 시절부터 연결된 자신의 야구 인생의 종착점이 이곳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발걸음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앞을 향해 뻗어져 나간다.
그런 강호를 향해 다시 한 번 팬들의 뜨거운 함성 소리가 전달된다.
"와아아아아아!!!"
뜨거운 함성을 통해 강호가 품어왔던 꿈이 완성되고 있었다.
강호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나갈 새로운 인생을 위해 그렇게 다음을 향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이제 세월은 빠르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