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333화 (333/335)

0333 / 0335 ----------------------------------------------

메이저리그에 융화되다

친분관계가 전혀 없는 칸토의 접근에 강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무슨 일이야?"

"그게."

강호의 물음에 대꾸하려던 칸토는 주변을 지나다니던 동료 선수들을 둘러보더니 제안을 해보인다.

"여긴 눈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길 수 있을까?"

칸토의 제안이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여긴 강호는 그와 함께 선수 휴게실로 자리를 옮긴다.

칸토는 휴게실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먼저 강호에게 자리를 권한 후,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의 묵직한 침묵이 흐르고, 칸토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오늘 통보를 받았어. 나는 곧 포터킷으로 가게 될 거야."

무겁게 입을 연 칸토의 말에 강호는 그의 상황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칸토가 말한 포터킷이란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의 트리플A 팀으로 포터킷 레드삭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마이너 행 통보를 받았다는 말이구나.'

강호는 칸토의 말뜻을 이해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은 크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칸토의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자신과의 연결 고리는 딱히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강호는 이어진 칸토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

"그리고 말이야..."

칸토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두 말한다.

"사실 몇 주 전에 한국의 이글스라는 곳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어. 그 때는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은 상황이어서 승낙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다시 마이너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까 아무래도..."

칸토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인다.

강호가 건네받은 사진에는 칸토와 그의 부인, 그리고 두 사람을 닮은 어여쁜 아이들의 화목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칸토의 현재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이 필요한 거겠지. 칸토가 메이저리그에 무사히 정착을 했더라면 앞으로 돈 걱정할 일은 크게 없었겠지만, 7월인 지금 다시 마이너로 내려간다는 의미는 올 시즌 빅 리그에 그의 자리는 없다는 뜻이 되니까.'

강호는 칸토의 가족사진을 돌려주며, 칸토가 처한 상황을 공감하려 애쓴다.

비록 자신과 큰 접점이 없는 칸토이지만, 그가 내민 가족사진 한 장이 강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칸토의 말은 계속된다.

"나는 이제 마이너로 내려가면 올 시즌은 빅 리그로 다시 올라오지 못할 거야. 그런 점을 생각하면 한국의 이글스가 내민 조건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규모가 얼마지?"

칸토의 말에 강호는 짧게 물어본다.

많은 부분을 생략한 강호의 물음에도 칸토는 용케 알아듣고, 대답을 해오고 있었다.

"10만 달러, 고작 두 달 남짓한 경기를 치루는 대가로는 많은 돈이야. 아무래도 내년 시즌 계약을 위한 계약금이 더해진 게 아닐까 하는데. 올 시즌에 이글스로 가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내년에 더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을 해주겠다는 생각인가 봐. 그래서 말인데."

거기까지 설명한 칸토는 강호의 눈을 응시하며 잠시 입을 다문다.

이제 본인이 처한 모든 상황을 설명했으니 본론을 밝힐 시간이었다.

"백은 한국에서 온 선수잖아? 한국 리그는 어떤 곳이야? 내가 이글스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칸토가 던진 질문에서 그가 강호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된다.

하지만 강호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소한 조언 한 마디가 한 선수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거가 되는 건 결국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과도 같은 일이야. 칸토는 지금 가족을 위해 그 꿈을 잠시 내려놓으려고 하는 거고.'

강호는 조금 더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칸토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자니 한 마디 말이라도 조언해주고 싶었지만, 그 어떤 말도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한 가정의 가장인 칸토가 느낄 무게감과 중압감은 아직 강호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칸토는 꿈과 현실의 접점에서 절충안을 고민하고 있어. 만약 내게 프리마켓의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칸토보다 더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겠지. 이렇게 책임감 있는 결정을 내린 사람에게 내가 조언을 해줄 자격이 있을까.'

강호는 더 깊은 고민 속에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강호는 한국 프로야구 2군에서도 생존이 힘들었던 볼품없는 선수였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것은 과연 강호 본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했을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어진 강호는 냉정히 고개를 내젓게 된다.

'아니, 불가능해. 나는 칸토에게 조언할 자격이 없어.'

결론을 내린 강호는 다시 칸토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해 본다.

그가 원하는 조언을 해줄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결정을 앞둔 그에게 최소한 도움이 되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활동했을 때."

강호는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혹시라도 자신의 사소한 말실수로 칸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히어로즈라는 팀에 메이저리그 출신인 맥도날드라는 투수가 있었어."

강호가 꺼낸 이름에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칸토가 관심을 보인다.

"맥도날드? 혹시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그 맥도날드를 말하는 거야?"

"맞아. 맥도날드가 휴스턴에서 다시 화이트삭스로 가기 전에 한국 무대에서 뛴 적이 있었어. 그 때 데뷔 시즌의 나와 종종 상대했던 적이 있어. 아마 맥도날드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강호는 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한국의 히어로즈에서 뛰며 강호와 맞상대를 했던 맥도날드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조차 4할 대 맹타를 뿜어내는 강호를 일컬어 주변 동료들을 향해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백강호! 저 악몽 같은 타자가 언젠가는 메이저리그로 올 줄 알았다고! 제길, 왜 하필이면 아메리칸 리그로 온 거야? 나 그만 은퇴해야겠어."

맥도날드는 친분이 있는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강호와의 기억을 떠들어대곤 했다.

은퇴를 거론할 정도로 강호와의 승부를 악몽 같다 말하고 다니는 그였지만, 사실은 메이저리그의 다른 투수들에 앞서 자신이 먼저 강호와 맞상대를 했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어이~ 빌리. 다음 주에 있을 레드삭스 전 준비는 잘 되가는 거야? 백강호가 4번 타자인데, 손쉽게 승부 보려고 하면 틀림없이 홈런을 얻어맞고 말 걸? 백강호는 그런 타자니까 말이야. 흐흐흐."

음흉하게 웃으며 말해오는 맥도날드의 태도에 그의 화이트삭스 동료 투수들은 죄다 낚여들고 만다.

"그러고 보니 맥도날드는 한국에서 레드삭스의 백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다고 하셨죠? 혹시 백강호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겁니까?"

"백강호의 약점?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 따위 게 있는 타자였으면 메이저리그로 와서 4할에 50홈런이 가능하겠어? 백은 약점이 없는 완성형 타자라고. 5년 전부터 이미 그랬다고. 하지만 말이야..."

"뭡니까? 뭐가 더 있는 겁니까? 백강호를 공략할 방법이 있는 거죠?"

"아냐. 그냥 넌 몰라도 돼."

"맥도날드 씨! 도와주세요. 백강호를 상대할 방법을 알려주시면 크게 한 턱 쏘겠습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해서 알려주는 건 아니고...네가 가능성 있어 보이는 투수라서 알려주는 거야. 물론 한 턱은 쏘도록 해. 자, 이제부터 내 애길 잘 들어봐."

맥도날드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강호의 약점을 팔고 다니며 화이트삭스의 투수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한국무대에서 강호와의 맞상대 경험이 그에게는 좋은 밑천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다시 시점은 강호와 칸토의 대화로 옮겨온다.

강호는 자신이 맥도날드 투수의 이름을 입에 올린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알기로 한국행을 결정하기 전, 맥도날드 투수의 구종은 포심과 투심,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그리고 슬로 커브 정도였어."

강호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맥도날드의 구종을 설명한다.

데뷔 시즌, 그토록 치열하게 상대 투수들과 야수들을 분석했기에 그 때의 기억은 여전히 강호의 뇌리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와의 맞대결에서 맥도날드가 갑자기 포크볼은 던진 적이 있어. 분명 선수분석 자료에도 없었던 포크볼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꺼내든 거야."

강호의 말이 무엇을 설명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칸토이지만, 한 가지 야구 선수로서 순수한 호기심이 들어 묻게 된다.

"백에게 포크볼을 던졌다고? 그래서 백은 어떻게 했어? 홈런을 때려준 거야?"

잠시 가장의 무게감을 내려놓고 물어오는 칸토의 표정은 해맑아 보였다.

그런 칸토의 태도에서 그가 야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강호는 피식 웃음 지으며 칸토의 질문에 답한다.

"아니, 헛스윙 해버렸어. 그리고 맥도날드와의 그 때 승부는 결국 삼진을 당해버렸지."

강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괜히 웃음짓게 된다.

"근데 말이야. 그 때 나는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 타자였거든. 그 때가 60홈런을 넘겼을 때인데 맥도날드에게 당한 삼진이 스물여섯 번째 삼진이었어."

강호는 보기 드물게 자신을 내세우고 있었다.

괜한 자랑이 아니라 데뷔 시즌 강호가 기록한 삼진은 서른 개밖에 되지 않았다.

무려 75홈런을 때려낸 홈런 수와 131개의 볼넷 수를 기록하며 신기록을 갱신한 것을 생각했을 때 티끌처럼 여겨지는 삼진 수였다.

만약 다른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면 과장이라 여겼을 테지만, 저마일 칸토는 강호의 말을 온전히 믿고 있었다.

올 시즌 그가 레드삭스 4번 타자로 보여준 모습은 결코 그보다 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이 올 시즌에 50홈런을 넘길 동안 기록한 삼진 수가 스무 개가 되지 않으니까. 백이 괜히 완성형 타자라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겠지.'

그것이 강호를 생각하는 칸토의 진심이었다.

칸토의 그런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강호의 말은 계속 된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거야. 맥도날드가 자신의 주 무기로 포크볼을 사용한 게 말이야. 맥도날드는 잘 연마한 포크볼로 한국리그에서 한 시즌 더 좋은 성적을 낸 후에 다시 메이저로 돌아온 거고. 그 후는 칸토 네가 알다시피 지금과 같아."

강호의 말은 거기에서 끝을 맺는다.

칸토가 원하는 조언을 해준 것은 아니지만, 과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칸토가 필요한 해답을 얻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칸토는 강호의 말을 통해 다시 메이저로 돌아온 맥도날드 투수의 활약상을 떠올려 본다.

'백의 말대로라면 맥도날드 투수는 한국에서 포크볼을 장착해서 메이저리그로 돌아온 셈이야. 그를 시카고 컵스의 핵심 불펜으로 만들어준 스플리터의 출발점은 결국 그 포크볼이었고 말이야.'

칸토의 생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강호가 자신을 잔잔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스스로의 생각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한 시즌이긴 하지만, 시카고 컵스의 클로저로까지 활약했던 맥도날드의 주 무기인 스플리터가 결국 한국에서 배운 포크볼로부터 시작된 셈이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린 칸토는 강호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강호가 실질적인 조언이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도전을 멈추고 현실을 받아들인 칸토에게 오히려 강호의 경험담이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행을 고민하는 칸토에게 또 다른 도전으로 다가온다.

칸토는 결국 한층 더 밝아진 표정으로 말할 수 있었다.

"10만 달러는 내게 큰돈이야. 내 가족의 미래를 위해 사용될 돈이니까."

그렇게 말한 후 칸토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를 따라서 강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설 때, 불현 듯 칸토가 오른손을 내밀어 온다.

칸토가 손을 내민 모습은 마치 악수를 청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큰 도움이 되었어, 미스터 백. 언젠가 감사를 표할 날이 오겠지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해.

내밀어진 그의 손과 이어진 말을 통해 강호는 칸토의 고민이 어떤 식으로 결론을 맺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칸토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그의 손을 맞잡는다.

그러면서 강호는 무의식 속에 자리한 한 마디의 말을 그에게 전하고 있었다.

"행운을 빈다."

그것이 강호가 칸토에게 해준 마지막 당부였다.

지금의 대화가 차후에 어떤 긍정적인 파장을 만들어갈지 알지 못한 채 강호는 그렇게 메이저리그라는 꿈의 무대에 융화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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