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324화 (324/335)

0324 / 0335 ----------------------------------------------

아름다운 이별

강호와 태호의 운명같은 맞대결이 있은 후 또 다시 시간은 흘러간다.

어느새 계절이 지나 겨울에 접어든 것이다.

2023시즌은 이미 끝나 있었고, 자이언츠는 또 한 번의 통합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 야구사에는 없었던 다섯 시즌 연속 통합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통합 우승 5연패.

그 기록이 2019년도부터 이어진 연속 기록이라는 사실이 더욱 그 가치를 빛나게 한다.

스포츠 언론과 대중들, 그리고 수많은 야구팬들은 자이언츠의 통합 5연패를 가능하게 만든 원인을 분석하고 나섰고, 그 해답으로 지명되는 것은 몇몇 인물들이었다.

"제 1주역은 아무래도 백강호 선수지. 백강호가 없었으면 자이언츠 통합 5연패는 애초부터 불가능 해."

"맞는 말이긴 한데, 팀이 통합 5연패를 한 게 선수 한 명의 공로로 보기는 힘들지. 나는 손성조 감독의 공이 제일 크다고 봐."

"당연히 손성조 감독의 공이 크지! 팀의 감독이니까. 총사령탑인 손성조 감독을 제외하면 여민석 투수 코치도 공로가 큰 거잖아. 수십 년 동안 답도 안 나오던 자이언츠 불펜을 리그 최정상급으로 만들었으니, 여 코치한테도 상을 줘야하는 거라고!"

"그게 어디 여민석 코치가 잘해서 그런 건가? 지금 자이언츠 투수진들 손성조 감독이 2군 감독 시절에 직접 발굴한 투수들이라고. 물론 여민석 코치가 잘한 것도 있겠지만, 투수들을 직접 발굴한 손 감독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봐야 해."

자이언츠의 통합 5연패 달성의 주역을 꼽는 대중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대다수는 손성조 감독의 공로를 내세우면서도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숨은 주역들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다.

"권대우도 잘 해줬지. 내가 자이언츠 응원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권대우 같은 마무리 투수는 처음이야. 안정감 있는 마무리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권대우를 보고 알았다니까."

"투수 쪽에서 따질 거면 박세준이나 박진웅을 빼면 섭섭해."

"선발 라인업에서는 주민한이 최고야! 앞으로 우리 자이언츠를 10년 동안 먹여 살릴 에이스 투수라고."

"주민한은 인정한다! 자이언츠에서 몇 년 만에 나온 20승 투수야? 84년도 최동원 선수 이후 처음일 걸?"

"강민수 선수도 잘해줬지. 강민수 선수 덕분에 10년 넘게 포수 걱정은 안하고 살았잖아?"

"최문표 선수는 어때요? 2년 전부터 주장을 맡고 있으니까 최문표 선수도 공로가 있는 거잖아요."

"우리 인간적으로 최문표는 뺍시다. 그 선수는 정이 안 가."

많은 선수들이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은 팬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선수는 올 시즌을 끝으로 메이저리그 진출이 확정된 바로 이 선수였다.

"나는 아무리 봐도 백강호 선수 없었으면 통합 5연패는커녕 정규 시즌 우승도 힘들다고 봐요. 올해도 백강호 선수가 타율 4할을 찍으면서 활약해 줬으니까 우승한 거지, 백강호 선수 없었으면 트윈스한테 정규 시즌 우승 뺏겼을 거 아닙니까?"

"올 시즌 백강호는 정말 인정한다! 타율 4할 7리에 64홈런이면 혼자 야구 다 한 거지!"

"윗님 야구를 올해만 보셨나? 올 시즌 백강호만 인정한다고요? 백강호 선수 다섯 시즌 통산 타율이 3할 9푼이 넘습니다! 거의 4할대 통산 타율이라고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모두 살펴봐도 백강호 선수 없었으면 자이언츠는 우승 못했어요. 올 시즌 한국시리즈도 백강호 선수 덕분에 이긴 거지 않습니까?"

"인정, 인정. 우리 자이언츠 팬이면 백강호 선수는 건들지 맙시다."

"그 백강호 선수도 이제 자이언츠 선수로는 못 보게 됐네요. 흑흑흑. 강호 형, 메이저 안 가면 안 돼요? 자이언츠의 전설로 영원히 남아주세요~~"

강호에 대한 팬들의 찬사는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온라인상을 가득 채워나가고 있었다.

최근 5년 동안 야구인들 중에서 검색어 1위 자리를 독보적으로 지키고 있는 강호의 위엄은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모든 야구팬들을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보니 그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을 때 수많은 스포츠 기자들과 팬들, 강호의 마지막 떠나는 얼굴을 보기 위해 인천공항을 찾은 수많은 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오늘 공항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한류 아이돌이 출국하기라도 하는 거야?"

"그러게.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이 많은 사람들 죄다 출국하는 건 아닐 텐데? 응? 아~ 오늘이 그 날인가 보다. 저기 플래카드에 백강호 선수 이름 써져 있잖아. 백강호 선수가 메이저리그 간다고 하더니 오늘 가나봐!"

"뭐?! 그럼 우리도 백강호 선수 얼굴이나 보고 출국하자."

"그러다 늦으면 어쩌려고?"

"아직 출국까지 시간 많이 남았어. 오늘 아니면 백강호 선수 얼굴을 또 언제 볼 수 있겠어? 나 백강호 선수 팬이란 말이야!"

강호의 출국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한 인파들은 점점 더 늘어만 간다.

그런 대중들의 관심 속에 강호가 국제선 공항으로 들어서고, 수많은 시선과 관심, 플래시 세례가 그를 향하는 모습이었다.

강호는 자신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와 비명 소리, 그리고 시야를 모두 가릴 정도로 터져 나오는 플래시 세례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다른 선수들 출국할 때는 조용히 지나가던데, 내 때는 왜 이런 거야? 이건 무슨 기자회견장도 아니고.'

강호는 잠시 멈춰 선 채 자신을 향한 뜨거운 관심을 마주하고 있었다.

많은 수의 기자들이 자신의 출국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르고 있었고, 스포츠 매체에서는 인터뷰용 마이크를 내밀기도 한다.

이미 며칠 전, 메이저리그 진출에 앞서 오썬 스포츠의 허일수 기자나 평가가 좋은 몇몇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끝낸 강호였다.

그래서인지 다시 인터뷰할 내용은 크게 없었고, 메이저리그 진출 각오나 첫 해에 세운 목표 등을 밝힌 후 출국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런 강호의 곁에는 몇몇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친 형인 강수를 포함해서 강호의 지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강호를 배웅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강호는 그 중 한 사람을 향해 당부의 의미를 담아 묻고 있었다.

"태호, 너는 이제 가보는 게 좋지 않겠어? 내가 출국하는 자리에 트윈스 소속인 네가 따라나온 걸 트윈스 선배들이 보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강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올 시즌 데뷔해 트윈스의 신성으로 떠오른 태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호는 올 시즌 불펜 투수로 데뷔해 스무 살 답지 않은 다부진 투구로 선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트윈스의 최고 기대주였다.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때는 시리즈 1차전의 선발 투수로 낙점받기도 했을 정도로 구단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는 차세대 최고의 유망주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그런 태호가 강호의 출국 배웅을 따라나선 것이다.

태호와 자신과의 접점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강호의 입장으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호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강호는 그동안의 일정이 바쁘다보니 형인 강수와 태호가 4년 전에 했었던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요. 이제 강호 선배님은 자이언츠 소속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선배님을 배웅한다고 해서 저희 팀 선배들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희 팀 선배들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아요."

겉보기에는 퉁명스러워 보이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강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온 친 형, 강수는 그런 태호의 모습을 통해 그의 진심을 짐작하고 있었다.

강수는 후원자인 강호를 대신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태호를 보살펴준 당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태호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 감정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태호 녀석, 쑥스러워 하는구나.'

강수가 태호의 진심을 짐작하고 미소 짓는다.

하지만 태호를 마주하고 있는 당사자인 강호는 그렇지 못했다.

'이 자식이, 그럼 그런 말을 꺼낸 나는 쪼잔하다는 말이야?'

강호는 순간 드는 감정에 헛웃음을 삼킨다.

태호와 간혹 대화를 나눌 때면 강호 본인도 모르게 발끈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태호의 성격이 강호를 지나치게 닮아 있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강호가 그런 생각들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태호의 말은 계속된다.

"덕분에 한국시리즈 준우승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강호 선배님이 자이언츠에 안 계시니까 저희 팀이 우승할 겁니다."

태호의 이어진 말에 강호는 그만 저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만다.

올 시즌 자이언츠와 트윈스는 정규 시즌 막판까지 우승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었다.

사상 첫 5연속 통합 우승을 노리는 자이언츠와 30년 만에 정규 시즌 우승 자리를 놓고 뜨거운 경쟁을 펼쳤던 트윈스.

양 팀 중 왕좌를 차지한 것은 결국 자이언츠였고, 4년 만에 4할 타율을 각성한 강호의 대활약에 힘입은 자이언츠는 정규 시즌 우승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트윈스를 4대 2로 완파하며 통합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호가 말한 '덕분에'라는 뜻은 결국 강호와 자이언츠로 인해 날아가 버린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태호의 말에서 그 부분을 감지한 강호는 반박을 위해 입을 연다.

하지만 이어진 태호의 말이 그의 입을 잠시 다물게 만든다.

"그러니까 메이저리그에서 레전드 되기 전까지는 돌아올 생각 마십시오. 후원자님."

태호의 마지막 말에 강호가 멈칫하게 된다.

이미 태호는 자신을 후원한 사람이 강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태호 너, 언제 안 거야?"

강호는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태호에게 묻고 있었다.

그러자 태호는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모르셨던 겁니까?"

"뭘?"

"제가 강수 아저씨랑 약속한 조건이요. 한국시리즈에 선발로 등판하면 후원자의 정체를 알려주기로 아저씨랑 약속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한국시리즈에서 선배님한테 시원하게 피 홈런을 얻어맞기도 했죠."

태호의 말을 끝까지 들은 강호의 시선이 강수에게로 향한다.

동생과 시선이 마주한 강수는 눈빛으로 '맞아,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4년 전 강수가 강호에게 딱 한 번 얘기해 준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딱히 거론한 적이 없어 잊고 있었던 것이다.

4년 전에는 아직 중학생이던 태호가 한국시리즈 무대에 오르기가 무척이나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잊고 있던 것인데, 이렇게 되면 태호에게 남은 비밀은 존재하지 않게 된 셈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강호는 문득 드는 참신한 생각에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에서 불안감을 느낀 태호가 본능적으로 묻고 있었다.

"왜, 왜요?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형에게 들었던 내용에는 네가 성인이 되면 후원받은 돈을 갚기로 했다면서?"

"그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그럼 갚아야지. 이 채무자 놈아."

"채..채무자라뇨? 지금 채권추심 하시는 겁니까? 후원받은 돈을 갚겠다고 한 거지 그게 빚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올해가 데뷔 시즌이라 거의 최저 연봉 받았다고요. 내년부터 착실히 갚도록 하겠습니다."

"채권추심이라니? 채무독촉이라고 해두자."

자신의 채무독촉 발언에 당황스러워 하는 태호의 대답에 강호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의 채무독촉은 이어진다.

"태호, 너 트윈스에 입단할 때 받은 계약금이 얼마였더라? 내가 기억하기로는 7억 원이었던 것 같은데."

"그...그 돈은 할머니 모시고 살 집이랑 할머니 병원비, 그리고 동생들 학비로 벌써.... 좀 봐주십시오. 서울 집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아십니까?"

태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잠실을 연고지로 하는 트윈스에 입단하다보니 태호는 계약금으로 받은 돈으로 서울 외곽의 작은 아파트를 구입했던 것이다.

병환이 깊은 할머니의 병수발과 이제 중, 고교생인 동생들을 제대로 뒷바라지 하고 싶은 마음에 거액의 계약금 대부분을 집을 사기 위해 써버린 상태였다.

그러니 돈이 없다는 태호의 항변이 거짓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강호에게도 반박할 말은 많았다.

"태호, 너 올 시즌에 15승 넘겼으니까 내년 연봉이 1억은 가뿐히 넘겠지?"

"그, 그건."

"그러니까 갚아. 내가 4년 동안 후원해 준 돈을 어서 갚으라고. 이 채무자야."

강호의 말에 태호는 자신이 괜한 말을 시작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내 삶을 구원해준 후원자님이 악독한 채권자로 변해버릴 줄이야.'

태호는 스스로의 발언으로 바뀌어 버린 상황에 탄식하며 한숨을 내짓는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한 태호의 말이 이어진다.

"내년 시즌부터 갚겠습니다. 어디로 갚을까요? 계좌번호라도 알려주세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항복 선언을 하는 태호의 모습에 강호의 배웅을 위해 공항을 찾은 모든 이들이 웃음 짓는다.

강호 역시 미소 지으며 심중에 담고 있던 계획을 입 밖으로 꺼낸다.

"재단을 만들 거야."

"네?"

"태호 너처럼 재능이 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야구를 포기해야하는 학생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 거라고. 내년이 되서 재단이 만들어지면 그곳으로 돈을 갚도록 해."

강호의 대답에 태호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팀의 통합 5연패와 메이저리그 진출 준비로 바쁜 상황에서도 재단 설립을 계획하고 있는 강호의 모습에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마저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강호의 이런 계획은 친 형인 강수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강호와 강수, 두 형제만이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강호의 말을 직접 듣게 된 당사자, 태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묘한 열기를 느낀다.

'나 같은 애들을 돕는 재단이라고?'

가슴이 설레는 말이었다.

불과 4년 전의 기억이었다. 그 때의 태호는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도 병든 할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로 인해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야구를 계속하는 것이 사치라고 느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만약 강호 선배님과 강수 아저씨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수십 번, 수백 번을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단언 컨데 지금보다 좋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어쩌면 상상하기도 힘든 최악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태호는 밝은 표정으로 강호의 제안을 수락한다.

"좋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원금에 이자까지 계산해서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래, 약속했다."

"네!"

강호는 태호의 성장이 대견하게 느껴져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태호는 그런 강호의 행동에 쑥쓰러움을 느꼈는지 오른손으로 콧잔등을 문지르는 모습이었다.

그런 흐뭇한 광경이 익숙하지 않았던 문표가 한 걸음 나선다.

"보기 좋구만. 강호 후배는 좋겠다."

자신과 태호 사이에 끼어 든 문표의 말에 강호는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뭐가요?"

"아니, 뭐 그렇잖아. 한국 야구에서 정점을 찍고, 재단 이사장에 메이저리그 진출까지. 야구 선수로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있잖아. 이것 참, 나같이 평범한 선수는 부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문표의 고백에 강호는 진지한 표정을 연기하며 묻고 있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강호 후배, 나 놀리는 거지? 내 나이가 올해 몇 살인 줄 알아? 서른여덟이야.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당키나 한 나이야?

"그건 모르는 일이죠. 문표 선배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실력으로는 뽑아줄 지도요."

따져 묻는 문표의 물음에 대꾸하는 강호의 대답이었다.

평소 문표의 수다가 심한 점을 거론하며 대답한 내용이었는데 문표 본인은 다른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내 실력은 인정한다는 소리야? 말이라도 고맙네. 그래도 나는 됐어. 나는 그냥 백강호가 사라진 자이언츠의 4번 타자 자리나 노려보련다."

문표의 너스레에 다시 주변은 웃음바다가 된다.

그 때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뚫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문표를 나무라고 나선다.

"헛소리 마라, 문표. 내가 감독으로 있는 한 너를 4번 타자 자리에 세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짐짓 엄한 말투로 문표를 타박하고 나선 사람은 손성조 감독이었다.

그가 한 걸음 나서자 문표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싱긋 웃음 지으며 뒤로 물러선다.

손 감독과 강호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이별을 앞둔 두 사람이 할 말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강호를 보내는 손 감독의 말은 길지 않았다.

"응원하겠다."

손 감독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국 진출을 앞둔 강호에게 손 감독이 해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어떤 조언도, 그 어떤 간섭도 필요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강호 같은 선수에게 조언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강호라면 이곳에서 했던 것처럼 잘 이겨나갈 것이다!'

그것이 강호와의 이별을 앞둔 손 감독의 진심이었다.

그런 손 감독의 진심이 온전히 느껴지고 있었기에 강호 역시 짧은 대답으로 자신의 진심을 모두 전한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강호의 얼굴은 다부진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의 은사이자 은인인 손 감독에게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지금은 참기로 한다.

'아직은 일러.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기쁜 마음으로 감독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도록 하자.'

그것이 손 감독과의 이별을 앞둔 강호의 각오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뚜렷한 결과를 만들고 돌아왔을 때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지금은 이쯤에서 작별을 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손 감독과의 작별도 그렇게 끝이 나고, 출국을 위해 걸음을 옮길 차례였다.

이제 한국을 떠날 강호의 곁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은 형인 강수였다.

"잘 다녀와라."

형의 나직한 작별 인사에 강호는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과의 작별은 담담한 자세로 맞이했던 강호이지만, 형과의 이별 앞에서는 그럴 수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애잔한 마음을 수습하고, 웃는 얼굴로 형에게 대답한다.

"응, 잘 다녀올게."

강호의 담담한 대답에 강수는 대견하다는 듯이 미소 짓는다.

그런 강수의 품에는 조막만한 아이 하나가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강수의 얼굴을 꼭 빼닮은 모습이었다.

강수는 조심스레 안고 있던 아이의 얼굴을 강호를 향해 내밀어 보이며 이렇게 속삭인다.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잘 다녀오세요~~해 봐."

강수의 속삭임에도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아직 말을 하기에는 아기의 나이가 어렸던 것이다.

대신 '우웡, 우왕'이라고 옹알이를 하는 아기의 모습에 웃음 짓게 된다.

강호는 어느새 가족을 이룬 형의 모습을 바라보며 떠나는 순간에 큰 걱정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형한테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까. 진주와 내가 멀리 떠나 있다고 해도 형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강호는 단란한 가정을 이룬 형의 모습에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진출이 결정되며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호가 가장 염려하던 것은 한국에 홀로 남게 될 형이었다.

강호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가장 큰 걱정거리가 사라짐을 느끼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조카가 형을 닮아서 과묵하네. 삼촌이 먼 길 떠나는데 작별 인사도 없고."

강호는 농담을 내뱉으며 강수의 곁에 선 형수를 바라본다.

몇 년 동안 지나치게 바빴던 까닭에 형의 결혼식 이후에 크게 볼 기회가 없었던 형수에게 부탁과 당부의 말을 전한다.

"형수님, 못난 우리 형과 잘난 우리 조카를 부탁드립니다."

강호의 농담 섞인 작별 인사에 형수는 편안한 웃음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을 떠나는 강호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그 작별 인사를 끝으로 강호를 태운 비행기는 미국을 향해 이륙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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