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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
또 다시 시계바늘은 빠르게 움직인다.
2022년 한ㆍ미 선수계약협정이 개정된 시점으로부터 다시 1년이 흘러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8개월의 시간이 흘러 있었고, 2023시즌의 올스타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호는 올해에도 올스타에 선정된 것은 물론이고, 홈런왕 레이스 역시 참가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런 강호의 꾸준함에 팬들은 감탄하게 된다.
"백강호 선수는 올해에도 홈런왕 레이스에 나오는 건가?"
"당연하지! 백강호 선수 아니면 누가 홈런왕 자격이 있겠어? 4년 연속 50홈런을 찍은 타자인데!"
팬들의 대화 속에서 강호의 지나간 시즌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된다.
야구팬들, 특히나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팬들의 지지 속에 강호는 데뷔 시즌인 2019년 이후 5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고 있는 것이다.
강호를 향한 팬들의 사랑과 인식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또한 강호를 향한 호감어린 시선은 단지 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신인 선수들이 제 2의 백강호를 꿈꾸며 프로 무대에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2019시즌, 한국 야구 무대에 폭격을 가하듯이 등장한 강호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은 어린 선수들이 선택한 포지션은 하나였다.
"올해도 또 유격수야? 요즘 유격수 루키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다 백강호 때문이지. 백강호 같은 유격수가 되려고 유격수로 포지션 변경한 아마추어 선수들이 부지기수라더라."
"덕분에 각 팀마다 좋은 유격수들을 충원해서 좋은 거지, 뭐. 요즘은 잘 치는 신인 타자들이 많아서 야구 보는 재미가 좋더라고."
"에휴~ 덕분에 올해도 타고투저야. 투수 쪽에서는 쓸만한 신인이 없어."
팬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2023년 시즌 역시 기록적인 타고투저의 해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마운드 위를 빛나게 하는 신인 투수는 존재했다.
"신인 투수가 없긴 왜 없어? 걔 있잖아. 트윈스에 걔!"
"트윈스? 누구 말하는 거야? 나는 트윈스 경기는 잘 안 봐서 모르겠는데."
"그 있잖아! 트윈스에 계약금 7억 받고 입단한 주태호 말이야."
"아~ 주태호! 그래, 주태호는 내가 인정한다."
팬들의 대화를 통해 거론된 이름은 올 시즌 들어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신인 선수였다.
작년과 다를 바 없이 기록적인 타고투저에도 올 시즌에 가장 돋보이는 신인 선수는 타석이 아닌 마운드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주태호였다.
4년 전, 강호가 구단 행사를 위해 모교를 찾았을 때 만났었던 치기 어린 아이가 어느새 올 시즌을 대표하는 신인 투수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태호는 강호의 후원을 받은 후부터 오직 야구에만 전념한 결과 무려 7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트윈스에 1차 지명을 받게 된다.
모든 고졸 루키들 중에서 1순위 1차 지명이니 태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후우."
태호는 등판을 앞두고 길게 날숨을 내쉬고 있었다.
올 시즌을 2군으로 시작한 태호가 1군 마운드에 오른 것은 불과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이었다.
그만큼 트윈스의 마운드가 불안하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태호가 1군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거라는 트윈스 코칭스태프의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태호는 그런 코칭스태프의 믿음 속에 단기간이긴 하지만 5승 무패에 5홀드, 방어율 0.83의 엄청난 기록으로 상대하는 타자들을 압살하고 있는 중이었다.
'프로 무대도 특별히 어려울 건 없구나.'
그런 압도적인 시즌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태호는 더 이상 프로 무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태호도 오늘 등판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태호는 긴장된 표정으로 거울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를 앞두고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마저 부족하다는 생각에 거울 속에 비친 얼굴과 유니폼의 매무새, 심지어 야구 모자의 챙이 구부러진 각도까지 다시 점검하며 오늘 경기에 대한 각오를 불태운다.
동료 선수들에게는 그런 태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태호, 쟤 왜 저러는 거야? 설마 긴장한 건 아니겠지?"
"긴장은 무슨. 태호 저 놈이 긴장하는 모습 본 적 있어? 엄마 뱃속부터 배짱 하나는 타고 난 놈이라고. 외모에 신경 쓰는 걸로 봐서는 오늘 경기에 여친이라도 오기로 했나 보지, 뭐."
선배 선수들은 매무새를 점검하는 태호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나서서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스무 살 루키인 태호에게 선배 선수들이 선뜻 나서서 물어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오늘 경기의 선발 투수가 태호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올 시즌 태호의 1군 선발 등판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늘 홈에서 맞상대할 상대 팀을 생각했을 때 경기에 앞서 선발 투수인 태호의 멘탈을 흔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 경기에서 백강호가 또 홈런 날리면 다시 신기록 갱신 아냐?"
누군가의 물음에 거울을 보며 최후 점검에 들어간 태호의 행동이 멈춰지게 된다.
말을 꺼낸 선배 선수는 그런 태호의 모습을 확인한지 못했고, 곁에 있던 다른 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연속 경기 홈런 기록 말입니까?"
"엉, 그 기록 맞아."
"에이~ 아닙니다. 오늘 경기에서 백강호가 홈런 치면 아홉 경기 연속 홈런이니까 아직 몇 경기 남은 거죠. 연속 경기 홈런 기록은 열 경기입니다."
"그래? 나는 요즘 백강호가 하도 홈런을 많이 때려서 벌써 갱신한 줄 알았지. 여하튼 대단한 타자야. 나는 투수도 아닌데 백강호가 올 시즌 끝나고 메이저리그 간다는 게 왜 이렇게 기쁜 줄 모르겠어."
"하하하, 선배님. 작년에 백강호 때문에 타격왕 놓친 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잖아요."
"아냐, 나 그렇게 쪼잔한 놈 아냐. 그래도 백강호가 메이저로 좀 갔으면 좋겠네."
트윈스의 고참 선수들은 강호의 이름을 놓고, 잡담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정비하던 태호는 선배 선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 차리자! 그리고 지금 내가 거울이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지!'
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글러브를 집어 든 후 연습 불펜으로 걸음을 옮긴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태호의 생각은 이어진다.
'백강호 선수, 당신은 모를 겁니다. 오늘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이 애썼는지를.'
태호는 다부진 각오를 되새기다 피식 웃음 짓는다.
이미 그의 발걸음은 연습 피칭을 위한 불펜에 도착해 있었고, 그를 마주한 불펜 포수는 좀처럼 보기 드문 태호의 미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태호는 그런 불펜 포수를 향해 입을 연다.
"시작하시죠."
"어, 그래."
불펜 포수의 대답과 동시에 태호의 연습 피칭이 시작된다.
이미 준비 운동과 스트레칭은 모두 끝난 상태여서 태호의 몸은 연습 피칭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달궈진 상태였다.
퍼엉!
포수의 미트를 때리는 소리가 묵직했다.
불펜 포수는 그 감각이 평소에 비해 무겁다는 느낌을 가지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태호는 경기 전에 오버 트레이닝 하는 타입이 아닐 텐데.'
불펜 포수는 오늘 따라 태호의 구위가 유독 무겁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런 포수의 의문에도 태호의 연습 피칭은 계속되었고, 시간이 지나 오늘의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평소보다 더욱 강력한 구위로 자이언츠 타선을 압도하는 태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의 삼진 선언에 태호의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이 마운드를 내려선다.
두 개의 삼진과 범타 하나로 자이언츠의 선두 타선을 솎아 낸 완벽한 삼자범퇴에 그의 곁으로 다가온 유광남 포수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오오~ 오늘 우리 태호 컨디션 최곤데?!"
광남의 칭찬에도 태호의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늘 그렇듯이 겸손하면서도 변화 없는 태호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어진 광남의 말에 그의 포커페이스가 깨지고 만다.
"이 정도 구위면 백강호도 삼진 잡을 수 있겠어."
광남의 말에 태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다.
그리고는 우연히 돌아보게 된 방향에서 1회 말 수비를 위해 자신의 유격수 자리로 이동하고 있는 강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문득 유격수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강호의 시선이 트윈스 덕아웃 근처에 머물러 있던 태호의 두 눈과 마주치게 된다.
'태호, 오랜만이구나.'
마치 강호의 두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가운 감정을 담은 강호의 눈빛에 태호는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백강호 선수, 제가 프로에 데뷔하기 전까지 가장 두려웠던 게 뭔지 아십니까?'
태호는 그런 심정을 눈빛에 담아 강호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무심하게도 강호는 그 눈빛을 지나쳐 유격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호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내가 데뷔하기도 전에 당신이 메이저리그로 가버리는 거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승부가 성사되지 않은 채 당신이 메이저리그에 가버렸다면 얼마나 원통했을까요?'
강호는 불펜 피칭에 앞서 스스로를 웃게 만든 생각을 또 한 번 떠올린다.
아직 태호가 아마추어였던 고교 시절, 프로 데뷔를 앞둔 그를 가장 두렵게 한 사실은 포스팅 제도가 개정된다는 소문이었다.
태호 본인이 아직 프로 무대에 데뷔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팅 제도가 개정되어 버리면 최대 수혜자가 될 강호와의 승부는 어쩌면 영원히 성사되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저씨와의 약속도 지킬 수 없어. 결국 나를 후원해준 후원자의 정체도 알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런 생각이 태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태호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았고, 결국 오늘 경기를 통해 두 사람의 맞대결이 성사되고 있는 것이다.
1회 말 트윈스의 공격은 태호의 짧은 기다림 속에 빠르게 지나가고, 2회 초가 되어 다시금 태호의 발걸음이 마운드를 향해 옮겨진다.
그런 태호의 시선은 배트를 든 채 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타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드디어! 당신과 맞붙는 날이 오네요.'
태호는 강호가 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호흡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마운드를 향해 걸어 나간다.
그리고 마운드 위에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섰을 때 자신을 응시하는 강호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하게 된다.
TV로 볼 때도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마운드 위에서 마주하게 된 강호의 모습은 마치 거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응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과 압도적인 체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다른 타자들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태호는 결코 기죽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굳은살이 터져, 손바닥이 피로 젖을 때까지 공을 던졌습니다. 당신을 이겨서 내 노력의 대가를 증명해 보이겠어요!
태호는 강호의 눈빛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도전적인 눈빛을 받게 된 강호는 태호의 각오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태호, 너와는 승부할 일이 없다고 여겼는데. 운명은 얄궂게도 우리 두 사람을 그라운드 위에서 만나게 해버렸구나.'
강호는 지금 상황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들고 있던 배트에 힘을 준다.
태호의 시선이 어느새 유광남 포수의 싸인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태호를 향한 강호의 생각이 이어진다.
'그래도 봐주지는 않겠어. 우리는 실력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프로 선수이니까.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최고의 승부로 결과를 만드는 거야! 그게 우리 프로 선수들이 해야할 일이니까.'
강호는 태호와의 승부를 앞두고 스스로의 각오를 다진다.
상대 투수의 각오를 읽었으니 팀의 4번 타자로서 제대로 된 승부를 벌어야만 하는 것이 강호의 입장이었다.
강호는 다섯 시즌 동안 갈고 닦았던 완성된 타격폼을 취한 채 태호의 초구가 던져지기를 기다린다.
유광남 포수의 초구 싸인을 확인하면서도 그런 강호의 행동을 모두 살피고 있던 태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글러브에 든 공을 손에 쥔다.
이제 강호와의 첫 승부를 시작해야하는 순간이었다.
'무조건 이긴다!'
태호는 강호와의 첫 승부에서 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를 이겨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모든 이들에게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인정받고 말겠어요!'
태호는 그렇게 마지막 각오를 다지며 역동적인 와인드업 동작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태호의 투구 동작에 맞춰서 스윙을 준비하고 있던 강호의 배트가 벼락같이 휘둘러진다.
태호가 던진 강속구와 강호의 스윙이 맞부딪히기 직전의 순간, 강호의 눈빛은 더없이 빛나고 있었다.
'잘 봐라, 태호야. 아직 프로 무대의 무게감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승부가 너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줄 거다.'
따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