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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
2019년 자이언츠의 통합 우승 이후 시계바늘은 빠르게 움직인다.
어느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2022년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자이언츠는 19, 20, 21 시즌 모두 통합 우승으로 일궈내며 11, 12, 13, 14시즌 동안 4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했던 라이온즈의 위업에 한 시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막전 후 석 달 동안 독보적인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니 라이온즈의 통합우승 4연패와 동률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해 나가는 자이언츠는 아무런 걱정, 고민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구단 본부는 지금 뜨거운 감자 하나를 놓고 격렬한 설전에 돌입해 있었다.
"안 됩니다! 우리 구단에 실효가 없어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내보이는 사람은 구단 단장으로 승진한 허동준 단장이었다.
그는 원래 지 사장의 수행비서나 다름없던 기획실 실장을 역임하고 있었지만, 전임 단장이었던 이상현 단장이 물러나면서 지 사장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단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 실장에 대한 그런 승진 인사가 뜨거운 감자를 놓고 고민하는 지 사장에게 독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허 단장, 저 놈! 또 태클을 거네! 기획 실장으로 있을 때는 고분고분 하더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단장 완장 차더니 변해 버렸어. 저놈을 단장으로 승진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지 사장은 자신이 꺼낸 의제에 처음부터 반대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는 허 실장, 아니 허 단장의 얼굴을 노려본다.
그런데 반대 의사는 허 단장의 것만은 아니었다.
연이어 다른 임원들 역시 반대 의사를 밝혀 온 것이다.
"저도 무조건 적으로 반대입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요청은 우리 백강호 선수를 타겟으로 걸어오는 수작입니다! 절대 찬성하시면 안 됩니다!"
"본부장의 말이 맞습니다. 선수계약협정을 개정했을 때 구단은 일방적인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운영 본부장과 스카우트 팀 총괄 역시 허 단장의 의견에 동조해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스카우트 총괄의 말에 특이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수계약협정, 더 정확히는 한ㆍ미 선수계약협정(Korea-United States player contract agreement)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직 FA자격이 없는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경우 이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제도였다.
자이언츠 구단 수뇌부들이 격론을 펼치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 선수계약협정의 개정에 관한 내용인 것이다.
"흐음."
지 사장은 임원들의 연이은 반대에 허 단장을 노려보던 행위를 멈추고 짐짓 헛기침을 해 보인다.
지금은 무턱대고 화를 내기보다는 이성적인 설득이 필요해 보였다.
"나도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다는 말은 아니야. 2001년에 개정된 포스팅 제도가 선수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그 점을 논의해 보자는 거지. 그리고 미리 말해두겠지만, KBO사무국에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어. 구단들에게 결정을 맡긴 거라고."
지 사장이 변명처럼 내뱉은 말에 다시 허동준 단장이 입을 연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애초부터 논의가 필요 없는 사항이에요.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닦달하는 미 구단들의 속셈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 팀 간판타자인 백강호 선수를 1년이라도 빨리, 1달러라도 싸게 데려가겠다는 속셈인 겁니다!"
허 단장의 반박에 지 사장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지금 속으로 드는 생각을 허 단장에게 곧이곧대로 말해버리면 반응이 어떨까하는 궁금증이 생겨난다.
'많이 컸네, 허 실장.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게 불과 2년 전의 일인데.'
지 사장은 불편한 속내를 감추면서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지 사장의 설득이 시작됐지만, 허 단장은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본사에서 다음 구단 사장 인사는 내부 승진으로 방향을 잡은 사실을 내가 모를까봐? 그러니까 현상 유지만 해도 내가 구단 사장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인 거야!'
그것이 허 단장의 솔직한 속내였다.
허 단장 개인의 소식통에 의하면 올해 있을 사장 임명 인사는 구단 내에서 승진 경쟁을 통해 결정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구단 역사상 경험하지 못했던 자이언츠의 3연속 통합 우승에 힘입어 본사가 유례가 드문 파격적인 인사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장님이 물러나면 결국 그 다음 권한자인 내가 사장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야! 내가 사장이 되자마자 백강호 선수를 메이저리그에 보내버린다면 자이언츠 팬들의 비난 여론을 어떻게 수습하란 말이야? 또 백강호 선수 없이 어떻게 성적을 만들어내라고? 그러니까 절대 안 돼!'
허동준 단장의 생각은 그러했다.
지금 지 사장이 추진하고 있는 포스팅 제도 개정을 통해 팀의 간판타자인 강호를 예상보다 일찍 메이저리그로 보내버린다면 자이언츠 구단으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 사장이 포스팅 제도 개정에 찬성하는 이유는 단순할 것이다.
'본인은 올해 임기 끝나고 퇴직한다 이건가? 절대 찬성 못해!'
허 단장은 속내를 담아 지정만 사장의 얼굴을 쏘아본다.
"어허~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포스팅 제도 개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허 단장은 그야말로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거칠게 내젓고 있었다.
지 사장은 좋은 말로 그를 설득하려 한다.
"나 좋자고 개정을 한다는 게 아니잖아? 현행 제도가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불리하다는 여론도 있고, 제도 개정에 다른 구단들은 이미 찬성했다잖아. 우리만 방향을 정하면 되는 거라고."
"그거야 다른 구단들은 우리 백강호 선수를 한 시라도 빨리 메이저에 보냈으면 하는 검은 속내가 있으니까 찬성하는 거지요! 우리 구단에 백강호 선수가 있으면 다른 구단에는 득 될 것이 없는 거니까요!"
"왜 이렇게 상황을 꼬아서 보나, 허 단장? 설마 다른 구단들이 백강호 선수 하나 때문에 본인들이 손해 보는 결정을 내리겠어? 대세가 그런 거야. 요즘 야구팬들이 한ㆍ미 선수계약협정을 보고 뭐라 그라는 줄 알아? 현대판 노예제도라잖아. 이런 악습이나 구태는 우리 대에서 끊어야 하지 않겠어?"
"개정을 하더라도 지금은 안 됩니다! 개정은 백강호 선수가 정상적으로 포스팅을 끝내고나서 해야 합니다! 우리 구단만 손해를 볼 수는 없는 겁니다!"
허 단장은 좋은 말로 설득하려는 지 사장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운다.
"양도금 상한 천만 달러에 FA자격 일수 세 시즌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럼 올 시즌이 끝나면 백강호 선수를 바로 데려가겠다는 뜻 아닙니까?!"
허 단장의 들끓는 외침에 지 사장은 오히려 싱긋 웃어 보인다.
"아니야, 그건 오래된 개정안이고. 양도금 상한선 2천만 달러에 FA자격 일수 다섯 시즌이라고 수정을 끝냈어. 그러니까 우리 백강호 선수는 올 시즌이 아니라 내년 시즌이 끝난 후에 메이저리그에 가게 될 거야."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백강호 선수 가치가 고작 2천만....아니, 잠시만!"
지 사장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발하던 허 단장은 순간 말을 멈춘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수정을 끝냈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허 단장에게 지 사장은 미안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이렇게 대꾸한다.
"말 그대로야. 벌써 KBO사무국과 MLB사무국이 개정 작업에 들어갔어. 열 개 구단 모두가 새로운 개정안에 동의했거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구단은 동의하지 않았는데요."
"아냐, 했어. 내가 동의했거든. 직인도 찍어 보냈어."
"...."
지 사장의 선언에 허 단장은 할 말을 잃고 만다.
혼자 결정해 버렸으면서 수뇌부 회의는 대체 왜 열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아무리 구단 사장이라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멋대로 결정해 버리다니.
허 단장은 3년이 넘는 세월동안 상관으로 모신 지정만 사장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런 허 단장을 향해 지 사장의 말이 이어진다.
"허 단장, 우리가 언제까지 구태에 얽매어 선수들의 날개를 꺾어야겠나? 백강호 선수는 벌써 우리 구단에 충분하고도 남을 기여를 해주었어. 백강호 선수 없이 우리가 3연속 통합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겠나?"
"그러니까 더 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백강호 선수를 데리고 있으면 3연속 우승이 아니라 5시즌, 6시즌 통합 우승도 불가능은 아니라고요."
지 사장의 말에 반박의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허 단장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었다.
이미 사무국 측에서 포스팅 제도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면, 자신이 반발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 단장의 말도 틀린 부분은 없었기 때문에 지 사장은 담담한 말로 그를 위로한다.
"알고 있어. 하지만 애초부터 백강호 선수 없이는 불가능한 위업이었어. 우리, 더는 욕심을 내지 말자고."
계속해서 반박의 말을 보태던 허 단장은 이번 지 사장의 말에는 대꾸가 없었다.
지 사장은 그런 허 단장을 향해 자신의 말을 이어간다.
아니, 어쩌면 지금 지 사장의 말은 허 단장을 향한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하는 혼잣말과도 같았다.
"내가 은퇴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야."
지 사장은 우선 허 실장의 오해를 정정해주며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선수 개인이 스스로 날개를 펼쳤을 때 그 혜택을 입은 구단에서 선수가 날지 못하게 막는 것은 도리가 아닐 거야. 우리의 삶은 짧지 않지만, 영원하지는 않으니까 매 순간 옳은 결정을 하기위해서 애써야 하지 않겠나?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옳은 결정 말이야."
지 사장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빙긋이 웃어 보인다.
이제 올 시즌을 끝내고 퇴임을 앞두고 있는 지 사장은 자신의 은퇴 순간을 빛나게 해준 강호에게 마지막 선물을 선사해주려 한다.
그것은 날개를 펼친 강호를 위해 그의 비상을 막고 있는 새장의 문을 활짝 여는 일이었다.
"나는 우리 구단을 위해 애써준 선수에게 그 보답을 해주고 싶을 뿐이야.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우리 대에서 좋은 선례를 남겼으면 한다네. 백강호 선수 한 명이 없어 우승할 수 없는 구단이라면 우리는 원래부터 우승할 자격이 없었던 거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은 백강호 선수인 거고."
지 사장의 마지막 말을 통해 허 단장은 더 이상 반박할 수단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그의 말이 옳았다.
애초부터 강호 없이는 불가능했던 통합우승이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강호에게 구단은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게 도리였다.
'백강호 선수에게 더 이상 국내에서 해줄 보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사장님의 말대로 더 늦기 전에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구단에서 줄 수 있는 마지막 보상일 거야.'
허 단장은 눈을 감는다.
언젠가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날도 오겠지만, 더욱 많은 시간이 지난다면 지금의 결정이 더 큰 찬사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허 단장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로 한 후, 감고 있던 눈을 뜬다.
그런 허 단장의 앞으로 지정만 사장이 다가와 있었다.
지 사장은 허 단장이 눈을 감은 사이 그에게 다가와 자신의 오른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허 단장이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내년 시즌부터 구단을 잘 부탁한다. 허 단장."
그것은 지정만 사장의 마지막 당부였다.
올 시즌을 끝으로 사장 자리에서 퇴임하게 될 지 사장은 아직 퇴임까지 몇 달을 앞둔 시점에서 차기 사장이 될 허 단장에게 미리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허 단장은 지 사장의 깊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손을 맞잡게 된다.
"네."
허 단장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 마디에 담긴 각오는 지 사장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었고, 지 사장은 몇 달 후 웃는 얼굴로 구단 사장직에서 퇴임할 수 있었다.
지 사장의 마지막이 더욱 빛난 이유는 자이언츠의 2022년 시즌 역시 통합 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를 일궈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 사장은 결국 과거 라이온즈 왕조가 이룩했던 통합우승 4연패와 동률을 이루는 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물러선다.
'새 시대는 새로운 인물을 필요로 하는 거니까. 나같이 늙은이의 역할은 이것으로 충분한 거야.'
이것이 퇴임의 순간 지 사장을 웃을 수 있게 만든 진심이었다.
그런 지 사장을 대신해 새롭게 구단 사장 자리에 오른 사람은 모두가 예측했던 대로 허동준 단장이었다.
새롭게 구단 사장이 된 허동준 사장 체제 아래 다시 재편을 시작한 자이언츠 구단이 분주하게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동안 온라인상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모든 야구인들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그것의 출발점이 된 것은 KBO사무국에서 발표한 하나의 보도 자료를 통해서였다.
[KBO사무국, 포스팅 제도 개정안 전격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