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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의 순간에 서다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빠르게 이동한다.
강호가 때려낸 타구가 내야를 훌쩍 넘어가는 것을 확인한 주자들은 이미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타자 주자인 강호 역시 1루를 향한 속도를 높이며 사직구장을 팬들의 함성 소리로 가득 채우는 모습이었다.
"우와아아!!"
"주자들, 홈까지 뛰어라!!"
"우익수가 못 잡겠는데? 그래! 그거야!"
강호의 타구가 우익수 뒤로 빠지는 안타가 되는 것을 확인한 팬들은 모든 주자들이 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팬들의 그런 확신은 중계석의 두 사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밀어서 때립니다! 우익수 잡지 못하고 타구는 우중간을 완전히 가릅니다! 그 사이 2루 주자 최훈이 홈으로 향합니다. 1루 주자 최문표는 2루를 돌아 3루로! 다시 3루 베이스를 돌아 홈까지 달립니다! 타자 주자 백강호는 2루에!"
"지금은 백강호 타자가 3루까지 달릴 수도 있어요. 아~ 3루로 달립니다. 이거 승부 되겠는데요?"
"우익수 박건오의 송구가 2루수에게! 다시 공은 3루로 향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세이프가 됩니다! 1회 말 백강호의 싹쓸이 2타점 3루타가 터져 나옵니다!"
염용수 캐스터와 이효범 위원이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강호의 타구가 2타점 3루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손 감독과 자이언츠 팬들이 바라던 최상의 결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수의 팬들은 조금 전 상황에서 강호의 홈런이 작렬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싹쓸이 3루타가 만들어진 상황에 더욱 기뻐하고 있었다.
홈으로 대쉬한 주자들의 역동적인 주루 플레이와 특히나 3루로 슬라이딩해 들어갔던 타자 주자 강호의 멋들어진 전력질주가 팬들의 가슴을 속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한국 시리즈 내내 강호를 고의사구로 내보냈던 베어스의 무시 전략으로 강호의 타석 때마다 답답했던 울화가 조금 전의 3루타로 말끔히 씻어 내리는 것 같은 쾌감마저 든다.
"바로 이 거지! 이게 제대로 된 야구 아니겠어?!"
"구 감독도 이제 정신 차린 모양이네!"
"지금은 구 감독이 아니라 우리 백강호 선수를 칭찬해야지! 한국시리즈 내내 그렇게 견제를 당했는데도 1회부터 타점을 뽑아내 주잖아! 백강호 최고다!"
강호를 향한 뜨거운 함성은 사직구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강호의 타점으로 기선 제압에 성공한 자이언츠 덕아웃은 팬들 못지 않은 뜨거운 함성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우리 강호 최고다!!"
"그래! 나는 강호 네가 슬라이더 노리고 있을 줄 알았어! 잘 노려 쳤다!"
"이렇게 된 거 1회에 점수 더 뽑아내자!"
덕아웃에 가득 찬 자이언츠 선수들의 목소리는 선, 후배를 가리지 않는 모든 이들의 함성이었다.
일부 코치들까지 강호를 향한 함성에 동조할 정도로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침착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총사령탑인 손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본인이 모르는 사이 박수까지 치며 기쁜 감정을 내보이는 중이었다.
'됐어! 강호의 타점으로 초반부터 분위기를 가져오게 됐어!'
손 감독은 연신 박수를 치며 3루 베이스를 밟은 강호를 향해 대견하다는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는 곧바로 김 수석에게 손짓을 보내 지금 상황을 점수로 연결하기 위한 작전 지시를 내린다.
"스퀴즈(squeeze) 싸인을 내게."
"수어사이드로 갑니까?"
"아니, 강호 정도의 주력이면 세이프티로 가는 게 옳아."
짧게 작전을 지시하는 손 감독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김 수석은 그라운드를 향해 분주한 싸인을 낸다.
손 감독이 지시한 스퀴즈란 스퀴즈 번트(squeeze bunt)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득점을 하기 위한 번트를 대는 작전을 말한다.
그 중 김 수석이 질문한 수어사이드 스퀴즈(suicide squeeze)는 투수가 투구를 하는 것과 동시에 3루 주자가 홈플레이트를 향해 뛰고, 타자는 무조건 번트를 대는 작전을 의미한다.
반면에 세이프티 스퀴즈(safety squeeze)는 타자가 무조건 번트를 대지 않고, 스트라이크에만 번트를 대어 3루 주자는 번트 성공 여부에 따라 홈플레이트에 들어갈지를 결정하는 작전이다.
손 감독은 3루 주자인 강호의 주력이 남다른 점을 고려해 위험 요소가 큰 수어사이드가 아닌 세이프티 스퀴즈 번트를 지시한 것이었다.
타석에 선 타자가 다름 아닌 스팅 선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베어스 배터리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예측대로 손 감독이 지시한 스퀴즈 번트는 상대 투수의 2구째를 공략한 스팅의 번트가 1루 쪽으로 향하면서 성공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세이프."
"아웃!"
차례로 두 번의 심판 판정이 들려오고 있었다.
앞에 것은 강호의 홈 쇄도를 판정한 주심의 세이프 선언이었고, 뒤에 것은 스팅이 1루에서 아웃되었다는 1루심의 선언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자들이 사라지며 2아웃 상황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자이언츠는 1회 말부터 3득점을 올리며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임무를 완벽하게 마치고 덕아웃에 돌아온 강호에게 동료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찬사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백강호 아직 안 죽었네!"
"시작부터 2타점에 1득점이야? 나도 분발해야 되겠어."
"슬라이더 밀어 친 거 맞지? 어떻게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받아쳐서 3루타를 만드냐? 이 괴물 같은 놈!"
선배 선수들은 강호의 활약에 고무되어 얼굴이 상기된 모습이었다.
강호가 때려낸 3루타는 단지 2타점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동료 선수들의 얼굴을 확인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이언츠 선수단의 분위기는 크게 고조되어 있었다.
1회 부터 3실점으로 침울해진 베어스 선수단과는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인 것이다.
이어서 타석에 선 6번 타자 강민수가 범타로 물러났음에도 한 번 고조된 분위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이언츠는 그런 기세를 몰아 2회 말에도 1득점을 추가하며 오늘 경기를 손쉽게 가져가는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이언츠 홈팬들의 목소리가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사직동을 가득 채워간다.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사직구장의 홈팬들은 자이언츠의 대표 응원가라 할 수 있는 부산 갈매기를 연호하며 축제의 현장을 즐기고 있었다.
경기는 아직 2회 말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지만, 우승을 직감한 팬들의 응원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그런 팬들의 목소리가 잦아 든 것은 4회 초가 시작되면서 부터였다.
틱.
배트에 먹힌 듯한 둔탁한 소리가 자이언츠 내야수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무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난데없이 나온 베어스의 4번 타자, 김재성의 기습 번트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베어스는 1회 말, 스팅의 스퀴즈 번트를 되갚아 주려는 속셈인 것인지 팀의 간판타자인 김재성의 타석에서 기습 번트 싸인을 낸 것이다.
그런 베어스의 선택은 번트 타구가 투수 정면으로 향하면서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을 통해 그 예측은 섣부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루!"
포수 강민수의 외침에 번트 타구를 맨손으로 잡으려던 권대우 투수의 마음이 급해진다.
대우는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마운드를 내려간 성수제를 대신해서 4회부터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선두 타자인 바인스에게 볼넷을 내주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더니 자신의 정면으로 굴러온 김재성의 번트 타구를 잡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해버리고 만다.
"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우의 귀에 잔상처럼 들려온다.
김재성 타자의 번트 타구를 잡으려던 대우가 그라운드에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공을 잡는 과정에서 마음이 급하다보니 시선이 1루로 향해 있던 것이 실책으로 작용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라운드에 엉덩방아를 찍은 몸을 바로 했을 때는 이미 타자 주자인 김재성이 1루 베이스를 밟은 후였다.
"아~~"
홈팬들이 내뱉는 탄식으로 사직구장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대우의 실책은 단지 하나의 실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어스에게 무사 1, 2루 상황을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실책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상황에서 베어스의 후속 타선이 안타 하나만 기록할 수 있다면 3회까지 완벽하게 봉쇄하고 있던 베어스 타선이 깨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당연히 자이언츠 덕아웃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투수를 교체 해."
손 감독의 단호한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여민석 투수 코치가 다가선다.
"진성이하고, 성태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직 명학이와 길준이는 준비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 코치는 불펜에서 준비가 끝난 가진성과 표성태 투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다른 두 투수의 준비는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보고한다.
손명학과 윤길준은 박상현과 더불어 투수 조의 최고참에 속한 투수들이었다.
시즌 초 각각 팀의 마무리와 셋업 투수로 내정되었지만, 작년 시즌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 구위로 인해 후배 투수들에게 자리를 내준 상황이었다.
그런 두 베테랑 투수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은 다름 아닌 손성조 감독이었다.
'가진성과 표성태는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어. 지금 상황에서는 명학이나 길준이 같은 베테랑 투수가 오히려 옳은 선택지가 될 게야.'
손 감독은 그렇게 확신을 가지며 여 코치를 향해 입을 연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손명학을 내고 싶었지만, 아직 그는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멘탈이 무너진 권대우 투수에게 계속해서 마운드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손 감독은 결국 잠시의 고민 끝에 교체할 투수를 입 밖에 낸다.
"표성태를 올리게."
"네."
손 감독의 결정에 여 코치가 즉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손 감독의 지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태한테 일러서 시간을 최대한 끌라고 지시하도록 해. 성태가 다음 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명학이와 길준이 중에 먼저 준비되는 투수를 올리는 게 좋겠어."
손 감독의 말에서 그의 의중을 파악한 여 코치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되묻는다.
"표성태를 마운드에 올리고, 상대 팀 다음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라고 할까요?"
여 코치의 물음은 지금의 상황에서 충분히 납득 가능한 질문이었다.
다른 투수가 준비될 때까지 표성태를 마운드에 올리기는 해도 상대 팀 타자와의 정면 승부는 피하는 것이다.
주자들을 향해 적당히 견제구를 던지며 시간을 끌다가 다음 투수가 준비되는 타이밍에 맞춰 타석에 선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는 결정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작전에는 한 가지 단점이 존재한다.
"아니, 그렇게 하면 베어스에게 쓸데없이 만루를 헌납하는 꼴이야."
"그럼, 성태에게 승부를 보게 할까요?"
여 코치의 되물음에 손 감독은 결국 미간을 좁힌다.
지금의 상황에서 표성태 투수에게 정면 승부를 맡기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책을 범한 대우에게 상황을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대우는 앞선 실책으로 인해 어깨가 잔뜩 굳어 제대로 된 투구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성태에게 초구 변화구 지시를 내리게. 성태가 제대로 된 투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승부를 보도록 하지."
결국 내려진 손 감독의 결정은 투수를 표성태로 교체하되 상황을 봐서 승부를 보자는 뜻이었다.
여 코치 역시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손 감독의 지시를 따르게 된다.
중계석에서는 마운드로 오르는 여민석 코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투수 교체를 직감한다.
"여기서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지금은 투수 교체에요. 권대우 투수가 앞선 실책으로 표정이 지나칠 정도로 굳어 있거든요. 다른 투수로 교체해 주는 게 맞아요."
투수 교체를 확신한 염 캐스터와 이 위원의 이어진 코멘터리 속에 권대우 투수가 마운드를 내려가고, 다음 투수인 표성태가 마운드에 오른다.
그리고 손 감독의 지시대로 던져진 표성태의 초구 슬라이더에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이 타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직구장의 관중석은 상반된 반응을 내보인다.
"아..."
"넘어갔네."
자이언츠 팬들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반면에 원정석을 가득 채운 베어스 팬들은 뜨거운 함성으로 오재섭의 쓰리런 홈런을 축하한다.
표성태의 초구 슬라이더는 바깥쪽으로 빠지다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백 도어 슬라이더였다.
좌타자인 오재섭이 타격하기에 쉽지 않은 코스였고, 공을 던진 표성태가 실투를 던졌다고는 볼 수 없는 공이었다.
그럼에도 오재섭의 밀어 친 타구는 홈런이라는 결과로 나와 버린 상황이다.
중계석에서는 오재섭의 홈런을 놓고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오재섭의 쓰리런 홈런으로 3회까지 4대 0으로 끌려가던 분위기를 턱밑까지 추격해 들어갑니다! 양 팀 점수 차는 이제 한 점 차! 분위기는 베어스 쪽으로 다시 기울어집니다."
염 캐스터의 말이 현장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오재섭의 홈런으로 베어스는 3점을 추가하기는 했지만, 아직 동점 상황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어스 쪽으로 분위기가 기운 이유는 자이언츠의 불펜 운용이 다소 막힌 느낌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벤치에 앉아 상황을 냉철하게 주시하고 있던 강호는 그런 분위기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흐름이 베어스 쪽으로 넘어가 버렸어. 이런 분위기로 경기가 진행된다면 결국 오늘 경기는 우리의 패배가 되고 말 거야!'
강호는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자신과의 정면 승부를 택한 베어스 배터리와의 맞대결에서 강호는 3루타 하나와 1루타 하나를 때려내며 타석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지명타자로 출장하다보니 수비 상황에서는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몇 번 남아 있지 않은 타석 기회를 살려내는 것뿐이야.'
강호는 베어스에게 넘어간 분위기를 다시 자이언츠 쪽으로 끌고 올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며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눈에 더욱 힘을 준다.
이미 팀의 불펜이 무너진 상황에서 자신이 수비수로 기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결국 강호 본인이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였다.
'2루타 이상의 장타나 홈런을 날려서 넘어간 분위기를 다시금 우리 쪽으로 가져오는 거야.'
강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프리마켓이 종료되어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더는 아이템에 기대기보다는 달라진 자신의 능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때라는 것을 느낀다.
'홈런을 노린다!'
각오를 다지는 강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