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318화 (318/335)

0318 / 0335 ----------------------------------------------

배수진을 치다

자이언츠 선수단은 이번 한국시리즈를 맞아 남다른 각오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하루 전부터 모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합숙에 들어가며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잠실 원정 경기뿐만 아니라 사직 홈경기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이언츠 선수단은 20년 만에 경험하게 된 한국시리즈를 그야말로 경건한 자세로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경기만 이기면 우승이야. 다들 알고 있지?"

원정 숙소에서 나서기 전, 캡틴 강민수의 목소리가 모든 선수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늘 경기만 이기면 우승이라는 캡틴의 말이 많은 선수들의 가슴을 울리게 하고 있었다.

올 시즌만 놓고 보자면 1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겠지만, 선수 각자의 야구 인생을 전부 헤아린다면 세월의 무게는 더욱 커지게 된다.

야구선수 나이 서른이면 아마추어 시절부터 시작해 거의 20년 동안을 야구에만 전념한 셈이다.

어설픈 재능이나 노력으로는 1군 무대를 밟지도 못하고 사라진 선수들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한국 시리즈는 그 많은 선수들의 세월과 한이 담겨 있는 꿈의 무대인 것이다.

자이언츠 선수단은 모든 선수들이 바라는 꿈의 무대에서 우승하기까지 단 1승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캡틴 강민수의 말에 선수들의 가슴이 뛰는 이유였다.

'우승! 진짜로 우승을 하는 거라고? 다른 때도 아닌 내 데뷔 시즌에서?'

택근은 민수의 말을 들은 후 뛰기 시작한 가슴에 손을 올려본다.

99년생, 올해로 21살의 백업 좌익수 택근은 자신의 데뷔 시즌인 올해에 팀이 통합 우승을 앞두게 된 현실이 아직까지 믿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어지는 캡틴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오늘 경기에서 끝내자. 나도 나이가 드니까 체력에 한계가 생기네. 내일 경기까지 이어지면 민경이가 나대신 출장하는 것도 건의해 봐야겠어."

민수의 말에 몇몇 선수들이 미소 지어 보인다.

85년생, 올해로 35살이 되는 민수는 손 감독의 관리를 받고 있음에도 포수라는 포지션에 대한 지속적인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체력에 한계가 생겼다는 그의 말이 농담이라고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강호 역시 민수의 너스레에 미소 짓고 있었지만, 이어진 캡틴의 말에서 그 미소를 지우게 된다.

"자, 그럼."

마지막 당부를 위해 입을 연 민수의 표정이 결의로 차오른다.

그런 표정 변화를 확인한 선수들 역시 표정을 굳힌다.

지금 선수들의 얼굴에 가득 차오른 감정은 배수진을 등 뒤에 둔 전사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민수는 그런 선수들을 향해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한다.

"이기러 가자."

민수의 당부에 선수들은 한 목소리로 '네!'라고 힘차게 답한 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통합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 비장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 선수들의 발걸음은 잠시 후 사직구장에 도착해 있었다.

경기 시작에 앞서 중계석은 오늘 경기의 최대 특이점을 지적하고 나선다.

"오늘 경기에서 자이언츠의 라인업에 상당한 특이점이 발생했습니다. 1번 유성철 선수와 4번 타자 백강호 선수를 제외한 모든 야수들을 30대 이상의 베테랑 선수로 구성했다는 점인데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바통을 넘기는 염용수 캐스터의 물음에 이효범 해설위원이 곧바로 입을 연다.

"네, 시즌 내내 활약했던 자이언츠의 신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들어 긴장을 많이 한 모습이었어요. 단지 타자들뿐만 아니라 투수진 쪽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고려한 손성조 자이언츠 감독이 안정성을 위해서 베테랑 타자들을 중심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보여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드오프인 유성철 선수와 4번 타자인 백강호 선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그런데 백강호 선수는 지명타자로 이름이 올라간 상태입니다."

이 위원의 설명 후 간격없이 이어진 염 캐스터의 말에 이 위원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백강호 선수는 라인업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베어스 쪽의 부담으로 작용될 수 있거든요? 정규 시즌 때처럼 백강호 선수를 일단 라인업에서 제외했다가 승부처에서 대타로 기용하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자이언츠의 손성조 감독이 백강호 선수를 지명타자로 4번에 기용했다는 것은 베어스의 구형태 감독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이네요."

이 위원의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한국시리즈에서 강호에게 다섯 경기나 고의사구로 회피한 구 감독에 대한 여론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경기에 들어가기 전 좋지 못한 여론에 대해 거론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베어스 구단의 부탁을 받은 이유였다.

하지만 이효범 위원이 거론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론이 손쉽게 잠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직구장의 관중석을 가득 채운 팬들의 목소리만 들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거르지 말고 붙어라!"

"그래! 오늘은 좀 붙어라!!"

"베어스, 이놈들아! 백강호 거르지 마라!! 정정당당하게 승부해라!!"

자이언츠 팬들은 이미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강호와의 승부를 촉구하는 목소리로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몇몇 격앙된 홈팬들은 베어스 덕아웃을 향해 야유를 퍼붓고 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경기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가 마운드에 오른다.

자이언츠 홈팬들은 기립 박수로 한국시리즈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경기의 선발 투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선발이라니.'

마운드를 밟고 올라선 성수제 투수는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 투수 코치인 여민석을 통해 오늘 경기의 선발 투수로 오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사실은 긴가민가했었다.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수제 본인이 선발 투수로 오를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제는 4일 전에 있었던 한국시리즈 3차전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7이닝을 소화하기도 했다.

겨우 3일 휴식 후의 선발이라니.

평소 선수를 아끼는 손성조 감독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실현 가능성이 낮아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경기를 앞두고 손 감독이 직접 당부한 내용을 통해 오늘 경기에 대한 전략을 읽어낼 수 있었다.

'3이닝이다. 수제 네가 선발로 3이닝만 막아주면 되는 거야. 할 수 있겠지?'

몇 시간 전, 손 감독은 수제를 향해 그렇게 당부했었다.

손 감독의 당부에서 수제는 오늘 경기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총력전이 될 거라 확신한다.

'투수들을 죄다 투입하려는 생각이시구나! 몬테사나 라일리의 구위가 좋지 않고, 세준이와 진웅이는 로케이션이 잡히지 않고 있어. 선발들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감독님이 생각하실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총력전일 거야!'

수제의 추측으로는 오늘 경기에서 투입 가능한 모든 투수들이 마운드를 오를 것이라 생각되고 있었다.

그런 추측은 수제뿐만 아니라 자이언츠의 모든 선수들이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지명타자로 등록된 강호 역시 벤치에 앉아 오늘 경기의 전망을 가늠하고 있었다.

'수제 선배는 4일 전 경기에서 115개의 공을 던졌어. 그러니까 오늘 경기에서 던질 수 있는 공의 개수는 50개 전후가 될 거야.'

강호는 벤치에 정자세로 앉아 깊이 고심해 본다.

위장 선발이나 다름없는 수제의 선발 등판으로 오늘 경기에서 자이언츠가 안고 가야할 부담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어스 타선에게 분위기를 내줘버린다면 우리 팀 마운드는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말 거야. 중요한 것은 결국 선취점을 누가 내느냐에 달렸어!'

강호는 판단을 끝낸 상태였다.

오늘 경기에서 유격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출장이 확정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역할은 정해진 것이었다.

'4번 타자. 오늘 경기에서 팀이 내게 필요로 하는 역할은 오직 그것뿐이야!'

강호는 이미 배트를 꺼내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시즌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경기를 앞두고, 강호는 조용히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그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강호 스스로의 의지를 완성하기 위한 심리적인 공간이었다.

배트를 쥔 강호의 시간은 찰나같이 짧았지만, 어느새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은 이렇게 말해오고 있었다.

"강호야, 이제 준비해야지. 훈이가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어!"

자신의 어깨를 잡아 흔드는 캡틴의 목소리에 강호의 정신이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제야 덕아웃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홈팬들의 뜨거운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때려온다.

강호가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던지 1회 초가 지날 때까지 주변의 모든 움직임과 소음, 귀를 때리는 팬들의 함성까지도 그의 집중력을 방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

강호는 짧은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오직 경기에만 집중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차단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석으로 걸음을 옮길 때라는 것을 느낀다.

딱.

3번 타자인 문표가 휘두른 배트가 상대 투수의 공을 정확히 타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아아!"

"3루까지 뛰어라!"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그라운드를 뒤흔드는 팬들의 목소리에 강호의 시선도 빠르게 내달리는 주자들을 향해 이동한다.

팬들의 바람대로 1루 주자 최훈이 3루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타자 주자인 문표와 1루 주자 최훈 모두가 세이프 되며 이제 누상의 주자는 두 명으로 늘어난 모습이었다.

1사 주자 1, 2루 상황.

강호는 곧 자신을 향할 팬들의 목소리를 기대하며 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사직구장은 강호가 기대했던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차오른다.

"백강호! 날려라!!"

"거르지 말고 붙어라!"

팬들 역시 기대하고 있었다.

시리즈 5차전까지는 한 번 밖에 볼 수 없었던 강호의 호쾌한 타격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 팬들과 강호의 바람 속에 베어스의 선발 투수, 장원종의 초구가 뿌려진다.

퍼엉!

포수의 미트를 때리는 소음에 모두의 표정이 급변한다.

타석에 선 강호는 장원종 투수의 초구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거르지 않았어. 볼이 되긴 했어도 승부할 생각인 거야!'

강호는 낮은 쪽 코스에 형성된 장원종의 초구를 확인하며 배트를 더욱 힘껏 쥔다.

그동안 고의사구로 일관했던 베어스 배터리의 전략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강호 본인이 이미 예측하고 있던 정면 승부가 현실화된 모습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다!'

강호의 눈빛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장원종의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판정한 주심의 목소리에도 강호는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중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다.

"아~~ 승부합니다! 오늘 경기에서는 백강호 선수에 대한 고의사구가 없다는 뜻일까요?"

염 캐스터의 놀란 목소리에 곁에 있던 이효범 위원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인다.

"사실 비난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거든요. 베어스 덕아웃도 오늘 경기만큼은 제대로 승부할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타석에 선 백강호 타자가 웃는 모습이 흥미롭게 느껴지네요. 자, 이제 장원종 투수와 백강호 타자의 제대로 된 승부가 어떻게 진행될 지를 관심 있게 지켜봐야겠어요."

이 위원의 목소리는 다소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가 하는 해설의 내용은 침착했다.

오히려 그 해설을 전해들은 팬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통해 이 위원의 해설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던 관중석의 팬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 붙어라!!"

"베어스야, 다 용서할게! 그러니까 제대로 좀 보여줘!"

팬들은 장원종 투수가 내보인 승부 의사에 진심으로 기쁜 함성을 내지른다.

그들의 목소리는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과 양 팀 덕아웃 모두에 전달되고 있었다.

"진짜 승부를 걸어오네요."

자이언츠의 수석 코치인 김 수석의 목소리였다.

그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곁에 선 손 감독에게 말을 건넨다.

"베어스도 더는 피할 곳이 없을 테니까."

손 감독의 대답이었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기에 경기가 시작되기 전, 강호에게 남다른 조언을 해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강호가 지금의 상황에서 본인이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준비해 두었던 진가를 발휘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강호야, 선취점이다! 오늘 경기는 선취점을 먼저 따내는 팀이 승리하게 될 게야.'

손 감독은 강호가 오늘 경기의 흐름을 느끼고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또래의 선수들에 비해 유독 총명한 강호라면 오늘 경기에서의 선취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신뢰가 있음에도 강호의 타석을 걱정하는 까닭은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그가 단 한 번의 타석 외에는 제대로 된 타격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강호야, 부탁한다!'

손 감독은 간절한 바람을 담아 강호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런 손 감독의 바람 속에 장원종과 강호의 승부는 계속되고 있었고, 어느새 두 선수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은 6구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볼."

주심의 볼 판정으로 어느새 풀카운트가 완성되어 있었다.

강호는 섣불리 배트를 내지는 않고 있었다.

풀카운트를 만들며 두 번의 스윙을 하긴 했지만, 그건 애매한 코스의 공을 커트하려는 의도였을 뿐이다.

강호가 기다리고 있는 구종은 단 하나.

자이언츠의 모든 이들과 모든 팬들, 그리고 스스로의 바람을 위해 강호는 장원종이 던지고 있지 않은 단 하나의 공을 기다린다.

이윽고 장원종의 7구째 공이 그의 손을 떠났을 때 강호는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확신한다.

'이거다!'

강호의 확신은 곧 타석을 울리는 타격음으로 뒤바뀐다.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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