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316화 (316/335)

0316 / 0335 ----------------------------------------------

배수진을 치다

"후우~"

양 팀 팬들로 가득 찬 잠실구장의 마운드에서 누군가 긴 날숨을 내쉰다.

1회 말, 자이언츠의 수비 상황에서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팀의 롱릴리프로 활약하던 성수제였다.

시즌 초반만 하더라도 4선발과 5선발을 오고갔던 수제였지만, 한동현 감독이 물러나고 손성조 감독 체제에서는 롱릴리프로 보직을 이동한 상태였다.

그런 손 감독의 선택은 적중하여 수제는 후반기 동안 2.45라는 준수한 방어율로 4승을 추가할 수 있었다.

전반기 동안 까먹은 방어율이 워낙 좋지 않았지만, 불펜으로 활약한 후반기 성적이 더해져 3.96이라는 나쁘지 않은 시즌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수제는 이제 올 시즌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3선발이긴 하지만 감독님은 내게 한국시리즈 선발 투수로 오를 기회를 주셨어. 어쩌면 인생에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라.'

수제는 그런 생각을 가지며 원정 팀 덕아웃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굳건한 표정으로 서있는 손 감독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손 감독은 한국시리즈 시작과 동시에 2패를 허용하고 말았지만,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선수단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손 감독의 그런 모습은 수제가 2군 시절부터 보아왔던 모습이었고, 수제 본인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수제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손 감독의 모습을 눈으로 담은 후, 원정 팀 관중석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누군가의 모습을 눈으로 찾아본다.

하지만 워낙 많은 팬을 수용할 수 있는 잠실구장의 관중석이었기에 찾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구나. 어딘가에는 와 계시겠지.'

수제는 어딘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항상 힘들고 지친 삶에서도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이던 엄마의 모습, 갈라지고 주름 진 손길로 수제 본인에게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곤 했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따라 왜 이렇게 보고싶은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엄마를 위해서, 그리고 내 인생의 도약을 위해서. 오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만 해!'

수제는 자신을 향해 웃어보이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꽉 깨문다.

이제 오늘 경기에서 베어스를 향한 자신의 초구를 던질 시간이 되어 있었다.

감상과 각오는 이쯤하고 모든 이들에게 실력으로 증명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지켜보세요, 엄마!'

수제는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엄마를 위해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을 던진다.

퍼엉!

포수 강민수의 미트를 때리는 묵직한 소리에 타석에 선 타자가 움찔하고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심은 수제의 초구를 이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수제의 초구에 대한 주심의 판정은 스트라이크였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자이언츠 원정석이 함성으로 가득 차오르고, 양 팀 덕아웃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성수제가 저런 공을 던지는 투수가 아니었는데? 지금 공은 150km가 넘었습니다."

베어스의 투수 코치가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곁에 있던 유지혁 수석이 투수 코치와는 반대 방향인 감독석을 향해 한걸음 다가선다.

"감독님, 전략을 수정해야겠습니다."

유 수석의 제안에 팔짱을 낀 채로 그라운드를 주시하고 있던 구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팀 타자들에게 컨택에 초점을 맞추라고 전달하세요."

"네."

구 감독의 지시에 유 수석을 포함한 덕아웃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제의 당찬 투구는 계속되었고, 베어스의 1번 타자 민정현과 2번 타자인 오재현, 3번 타자인 바인스마저 차례로 범타로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구 감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제의 투구 내용을 분석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역시 오버페이스야. 4회 정도만 돼도 성수제의 구위가 떨어지게 될 거야.'

구 감독은 확신과도 같은 결론을 내리면서 오늘 경기 역시 승리의 깃발을 쉽게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이언츠 덕아웃에서도 분주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다.

"수제가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김 수석의 나직한 말에 곁에 있던 손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손 감독이 보기에도 수제의 1회 말 호투는 오버페이스로 보였다.

"그래도 구위가 나쁘지 않으니까 4회 정도까지는 막아낼 수 있을 게야. 4회 이후부터는 불펜을 준비시키면서 상황을 살펴보자고."

"네, 여 코치에게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김 수석이 걸음을 옮기는 사이 공수 교대에 돌입한 야수들이 덕아웃으로 모두 들어오고, 2회 초 공격을 위해 한 명의 타자가 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 감독은 남몰래 한숨을 내쉰다.

'강호를 리드오프로 두는 전략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 구형태 감독은 강호가 몇 번 자리에 서든 간에 상대해줄 생각이 없는 거야!'

손 감독은 두 번의 경기를 통해 베어스의 의지를 확실하게 전달받았다.

첫 번째 경기에서 한 번의 타석을 제외한 모든 타석을 고의사구로 거른 것을 보고, 두 번째 경기에 손 감독은 특단의 대책을 꺼내들었었다.

강호를 4번 타자가 아닌, 1번 타자로 내세웠던 것이다.

전문가들과 팬들에게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타순 변화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손 감독의 그런 선택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베어스는 강호가 1번 타자로 나섰음에도 모든 타석을 고의사구로 거르며, 자이언츠의 선택을 역으로 치고 들어오는 과감한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런 베어스의 선택은 루상에 나간 강호가 계속해서 득점을 만들어내며 독이 되어 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두 경기를 승리한 것은 결국 베어스였다.

'불펜이 붕괴된 것이 뼈아팠다. 박상현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았더라면 앞선 두 경기의 패배는 더 큰 점수 차로 기록되었을 거야.'

손 감독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자이언츠의 올 시즌은 완벽한 세대교체라고까지 평가받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신인 급 선수들이 큰 경기에 대한 경험이 전무 하다는 약점이 양날의 칼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손 감독은 그 점을 상쇄시키기 위해 다소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박상현 투수를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시킨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 무리수가 결국 신의 한수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상현이가 합류하지 않았으면 이번 한국시리즈는 우리의 완패가 되었을 게야.'

그것이 손 감독의 솔직한 판단이었다.

사준식, 가진성, 표성태, 홍성빈에 이어 팀의 마무리인 권대우마저 연달아 무너진 상황에서 불펜 진에 기댈 곳은 박상현 투수밖에 남아있질 않았다.

지금이 정규 시즌이었다면, 다른 불펜들을 시험기용하며 불펜을 재건하려 했겠지만 지금은 한국시리즈다.

애초부터 단기전 성격을 지닌 한국시리즈에서 그런 시험기용을 해볼 시간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이래서 포스트시즌은 정규 시즌과는 다르다고 하는 게야. 이제는 선수들을 믿는 것 외에 다른 수가 필요한 시점이야.'

손 감독은 구 감독의 전술을 깨뜨릴만한 전략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강구하고 있었다.

그 사이 타석에 선 강호는 또 다시 고의사구를 얻어 1루로 걸어 나가고, 손 감독은 시리즈 2차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호에게 도루를 지시하고 나선다.

파핫!

역동적인 주루 동작과 함께 상대 투수의 투구 동작에 맞춰 강호의 발걸음이 2루를 향해 옮겨진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강호의 도루는 완벽에 가까웠고, 곧 손 감독이 기대했던 목소리를 2루심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세이프!"

2루심은 강호의 도루가 세이프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함성은 크지 않았다.

앞선 두 경기의 연패로 자이언츠 코칭스태프에 대한 불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해 손 감독은 오늘 경기의 5번 타순에 황제인이 아닌 다른 선수의 이름을 올려둔 상황이었다.

손 감독은 대기 타석에 있던 오늘 경기의 5번 타자를 향해 타격 전략을 주문하고 나선다.

"문표, 짧게 끊어 쳐라. 컨택에 초점을 맞춰."

손 감독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선수는 문표였다.

그는 시리즈 1, 2차전에서 1안타에 그친 황제인을 대신해 오늘 경기의 5번 타순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뜻밖에도 문표는 한국시리즈 두 경기 동안 모두 멀티 히트를 때려내며 모두가 기대한 이상의 성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손 감독은 그런 문표의 모습에서 큰 경기에 강한 타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고, 결국 그를 5번 타순에 기용한 것이다.

'모험일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우리 자이언츠에는 모험이 필요해!'

문표를 5번 타순으로 세우는 손 감독의 심정이었다.

그런 손 감독의 절실함을 느낀 문표는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대꾸한다.

"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문표는 어디에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를 말로 답하고는 보무도 당당하게 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자신의 확언대로 상대 선발 투수의 4구째를 받아쳐 깔끔한 좌전 안타를 뽑아내는데 성공한다.

짧은 안타였지만, 리그 최고의 주력을 가진 2루 주자 강호가 홈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세이프!"

강호가 홈을 밟는 것과 동시에 주심이 양팔을 들어 올렸고, 오늘 경기의 선취점은 자이언츠가 먼저 챙길 수 있었다.

앞선 두 경기에서 베어스에게 선취점을 허용한 것이 패배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오늘 경기의 분위기는 자이언츠에게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베어스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오늘 경기의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베어스의 니퍼드는 문표에게 적시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6번부터의 타선을 차례로 범타 처리하며 오늘 경기를 손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한다.

반면에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인 성수제는 양 팀 덕아웃의 판단대로 4회부터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하며, 경기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딱.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베어스의 4번 타자 김재성의 타구가 안타가 되고 있었다.

3번 타자 바인스에 이어 4번 타자인 김재성에게 마저 안타를 허용하며 연속 안타를 내주고 있는 것이다.

덕아웃에서는 여민석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오르고, 그 모습을 확인한 성수제 투수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수제야, 오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 경기인 줄 알고 있겠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물어오는 여 코치의 말에 수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래. 1실점이면 교체 지시가 내려질 거야. 네가 못한 게 아니라 팀 사정이 피치못한 곳까지 몰려서 그런 거니까, 수제 너는 투구에만 집중해줬으면 좋겠다."

수제는 여 코치의 당부에 다시 '네'라고 대답하며, 스스로 각오를 다져본다.

하지만 그런 수제의 각오에도 또 한 번의 정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베어스의 5번 타자 오재섭이 깔끔하게 밀어 친 타구가 내야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제는 급한 마음에 걸음을 떼려다가 이내 벌어진 상황에 자리에 멈춰서고 만다.

내야를 훌쩍 넘길듯 했던 타구는 갑자기 튀어 오른 유격수 강호의 글러브 끝에 걸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는 어마어마한 점프력을 선보이며 타구를 막아내고 있었고, 착지와 동시에 2루수 최훈을 향해 공을 뿌린다.

파핫.

불안한 동작에서 송구까지 연결한 강호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지만, 그 덕분에 강호가 던진 공은 2루수 최훈의 글러브에 안착할 수 있었다.

3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던 2루 주자 바인스가 미처 귀루하지 못한 시점의 장면이었다.

"아웃!"

2루심의 아웃 선언으로 순식간에 두 개의 아웃카운터가 올라간다.

내야를 넘어가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낚아챈 강호의 호수비로 2루 주자가 사라지며, 무사 주자 1, 2루의 상황이 2아웃 주자 1루 상황으로 뒤바뀐 것이다.

그 모습에 마운드 위의 수제를 비롯해서 차갑게 식어있던 자이언츠 원정 팬들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와아아!!"

"역시 백강호! 타석에서 침묵하더니, 수비에서 한 건 해주네!"

"타석에서 못 때리는 게 왜 우리 백강호 선수 탓이야? 고의사구로 거르는데 어떻게 안타를 치나?"

"그래! 백강호는 못한 게 없어! 베어스에서 상대를 안 해주는데 4할 타자라고 별 도리가 있겠어?"

자이언츠 팬들은 이제야 각자가 가진 내심을 밝히며 강호의 호수비를 칭찬하고 나선다.

그런 팬들의 모습을 마운드 위에서 지켜보던 성수제 투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 강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들어올린다.

'최고다, 강호!'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수제의 진심이 강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강호는 그런 성수제 투수에게 보란 듯이 글러브를 들어 본인의 가슴을 두어 차례 쳐보인다.

툭툭.

시즌 내내 강호에게 볼 수 있었던 특유의 제스쳐였다.

자신과 다른 야수들을 믿고 투구에만 집중하라는 강호의 수신호는 페이스가 떨어지며 극도로 흔들리던 수제의 가슴에 또 한 번 강한 기운을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그 기세를 몰아 수제는 7이닝 동안 베어스의 강타선을 단 1실점도 내어주지 않은 채 완벽한 모습으로 마운드에서 내려갈 수 있었다.

수제는 다음 투수에게 바통을 넘기며 원정 팀 관중석의 누군가를 향해 진하게 미소 짓는다.

그런 수제의 시선 끝에는 눈물 맺힌 눈동자로 수제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했다, 내 아들!'

수제는 마치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7이닝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선다.

그 때가 8회 말 무사 주자 1루 상황이었고, 다음으로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자이언츠의 독보적인 마무리 투수인 권대우였다.

정규시즌 동안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대우는 올 시즌 자이언츠에서 강호와 더불어 최고의 히트 상품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선 한국시리즈 두 경기 동안 무려 4실점을 허용하며, 아직은 신인 투수로서의 약점을 내보이고 만다.

손 감독은 그런 대우에게 또 한 번의 중책을 맡기고 있었고, 대우는 아쉽게도 손 감독이 준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딱!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자이언츠 팬들의 탄식이 잠실구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반면에 베어스 팬들의 함성이 귀를 따갑게 만든다.

대우의 초구를 받아친 베어스의 6번 타자 양희지의 타구가 잠실구장의 좌측 담장을 직격하는 안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타구에 1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서고, 타자 주자 양희지는 2루에 손쉽게 안착하는 모습이었다.

"양희지! 양희지!"

잠실구장이 양희지의 이름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자이언츠 선발인 성수제에 가로막혀 1득점도 올리지 못한 오늘 경기 베어스의 첫 타점이었기 때문이다.

자이언츠가 2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양희지의 적시타가 2대 1로 추격하는 점수를 만들고 있었고, 이 추격점은 결국 자이언츠 덕아웃을 또 한 번 움직이게 만든다.

"수고했다."

마운드에 오른 여민석 투수 코치는 대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우는 고개를 푹 숙인 모습으로 마운드를 내려가고, 다음으로 마운드를 밟은 투수는 다름 아닌 박상현 투수였다.

상현은 이미 앞선 두 경기에서 1이닝씩을 책임진 상태여서 오늘경기까지 나서면 3연투가 된다.

하지만 자이언츠의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고, 마흔 살 노장인 상현에게 팀의 승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상현아, 부탁한다."

여 코치는 상현에게 공을 건네주며, 부탁의 말을 전달한다.

상현은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투구에 나선다.

연습 피칭은 없었다.

여전히 허리 통증이 심한 상현이었기에 불펜에서의 연습 피칭 후에 마운드 위의 연습 투구 없이 곧바로 승부에 돌입한다.

'올 시즌을 끝으로 마운드에서 물러선다. 그러니까 더 이상 마운드에서 허리가 아플 기회도 없는 거야. 이 마지막 고통을 즐기도록 하자!'

상현은 당찬 각오와 함께 투구에 나선다.

그런 상현의 투지는 남은 2이닝 동안 베어스의 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하는데 성공한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낸 박상현 투수의 투혼이 한국시리즈 자이언츠의 첫 승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2대 1.

자이언츠는 이날의 경기를 한 점 차로 승리한 이후 다음 경기마저 진땀나는 역전승으로 일궈내며 한국시리즈 일정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4차전을 끝낸 가운데 양 팀 스코어는 정확히 2승 2패로 동률이 된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세를 몰아 시리즈 5차전 까지 승리로 일궈낸 자이언츠는 이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단 1승만을 남겨두게 된다.

강호는 팀이 잠실에서 3연승을 챙길 동안 5득점을 올리며 팀 승리에 기여했지만, 타점은 단 1타점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타점은 강호가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쏘아올린 유일한 홈런포였고, 강호를 상대하는 베어스 배터리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드는 홈런이었다.

그런 강호의 기여 속에 자이언츠는 시리즈를 3승 2패로 역전해 내며 다시 무대를 사직으로 옮기게 된다.

그제서야 자이언츠 팬들은 억눌린 함성을 토해낼 수 있었다.

"빌어먹을! 바지 벗고 소리 질러! 우승까지 가자, 자이언츠야!"

"이렇게 이기려고 일부러 두 경기 내준 거야? 그 마음 알겠으니까 남은 경기는 그냥 이기자!!"

"다시 가자! 사직으로!"

자이언츠 팬들은 다시금 사직에서 치러질 일정을 위해 부산행 KTX에 몸을 싣는다.

힘겨운 3승을 챙긴 자이언츠 선수단 역시 한 시름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친 몸을 원정 버스에 실을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 양 팀 선수단은 6차전을 앞둔 짧은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자이언츠 선수단은 남은 1승을 위해 그 하루의 휴식조차 반납하고, 훈련에 전념한다.

한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사직으로 옮겨지고 있을 때 강호의 친형인 강수는 공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드니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할 시간만을 기다리던 강수는 출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의 모습에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왔구나."

오랜만에 대면하게 된 강수의 목소리에 그를 향해 다가서던 인물이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녀는 바로 진주였다.

강수와 강호의 막내 동생인 진주는 호주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강호의 한국시리즈가 마지막을 앞둔 시점에야 한국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한국을 떠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

큰 오빠인 강수를 앞에 두고 진주는 말이 없었다.

한 때는 가장 많이 원망했었고, 미워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으로 호주로 향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오만가지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침을 느낀다.

할 말은 많았지만, 무엇부터 말해야할 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그런 진주를 향해 강수의 말이 이어진다.

"잘 왔다, 내 동생."

3년 만에 듣는 큰 오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따뜻했다.

그 짧은 환영 인사에 진주는 모든 원망과 미움이 빠르게 사라짐을 느낀다.

오랫동안 쌓아온 원망의 감정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망의 감정 위로 지독한 그리움을 해소시키는 감정이 덧 씌워지고, '보고 싶었어'라는 말을 꺼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아니, 나는 말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쉽게 항복하려고 한국을 떠난 게 아니었으니까!'

진주는 얼른 감정을 추스른다.

아니, 추스르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큰 오빠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독한 마음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웃지 마! 내 얼굴 보고 그렇게 웃지 말라고!'

오빠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것이 오빠의 저 미소 때문이라 여긴 진주는 오빠를 향해 힘껏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소리 칠 수 없었다.

가슴 깊이 억누르고 있던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여파가 그녀의 말문을 막고, 온몸을 들썩거릴 정도로 흐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진주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오빠들을 너무도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오빠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결국 진주가 택한 방법은 과거 작은 오빠인 강호가 했던 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어?!"

강수는 자신을 향해 안겨오는 진주의 모습에 당황하고 만다.

여전히 강수 본인을 원망할 거라 여겼던 진주가 이렇게 빠르게 마음의 장벽을 허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것이다.

강수는 양 손을 들어 진주의 가녀린 등을 감싸 안았다.

가슴에 안긴 진주에게서 느껴지는 촉감을 통해 그녀가 지금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강수는 자신의 품에 돌아온 동생을 향해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보고 싶었어, 진주야."

그 따뜻한 목소리에 온힘을 다해 참고 있던 진주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강수는 그런 진주를 더욱 끌어안는다.

어쩌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6차전 경기를 앞둔 시점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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