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314화 (314/335)

0314 / 0335 ----------------------------------------------

막이 오르고

강수와 강호, 두 형제의 납골당 방문 시점으로부터 하루가 지나있었다.

강호가 각종 일정을 소화하며 여전히 바쁜 일과를 이어가는 동안, 형인 강수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업무 특성상 겨울에 일이 많지 않은 까닭에 강호의 이름으로 후원하는 소년소녀 가장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몇몇 아이들을 만나본 후 점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강수가 찾은 곳은 동생의 모교인 경남중이었다.

강수는 경남중 야구부가 훈련 중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추운 날씨에도 경남중 야구부는 여전히 야구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태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실내 훈련장에서 가장 구석 자리를 찾으면 태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태호, 구석 자리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나."

강수는 몇 주 만에 보게 된 태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태호는 그런 강수에게 꾸벅 인사한 후 강수를 따라 실내 훈련장을 나선다.

강수와 함께 걸음을 옮기던 태호는 강수의 얼굴이 평소에 비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넌지시 물어본다.

"아저씨,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요. 여자 친구랑 싸웠어요?"

태호의 갑작스런 질문에 강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어제 강호와 함께 모친을 모신 납골당을 찾은 일로 인해 얼굴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강수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마른 웃음을 지어 보인다.

"태호, 네가 신경 쓸 정도의 일은 아니야. 그리고 나 여친 없어."

어제의 일은 아직 어린 태호에게는 설명해주기 힘든 일이었기에 적당한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런데 태호는 강수의 그런 대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긴, 아저씨 얼굴 보면 여친 없다는 게 이해가 되네요."

허를 찌르는 태호의 말에 강수의 마른 웃음이 썩소로 바뀌고 만다.

"너, 이 녀석.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대놓고 얘기하기 있어?"

강수는 지나치게 솔직한 태호의 발언을 장난스럽게 나무란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발걸음은 대화를 나누기 적당한 실내로 이동해 있었고, 강수는 태호의 근황에 대해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요즘은 어때? 야구하기 힘들지 않아?"

"전혀요. 야구가 천성이라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럴 리가, 아무리 적성에 맞아도 운동하는 건 누구나 힘든 법이야."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야구 해본 적도 없잖아요."

"아저씨도 너 같은 동생 있어서 잘 알아."

강수는 태호와의 대화를 이어가다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움찔 놀라고 만다.

태호 역시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저 같은 동생이요? 아저씨 동생도 야구해요?"

태호의 질문에 강수의 생각이 분주해진다.

후원 중인 아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해달라는 동생의 부탁이 탄로 나게 생긴 것이다.

'태호 같이 눈치 빠른 녀석한테는 어설픈 말로 변명해 봐도 소용이 없을 텐데.'

강수는 마땅한 핑계 거리를 고심해보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연다.

그런데 급하게 꺼낸 변명이 잘 먹혀들고 있었다.

"....아니, 너처럼 성격이 별로야."

강수의 이 말에 태호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모습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태호의 대꾸에 강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 때 태호가 갑작스레 뜬금없는 말을 꺼내고 있었다.

"아저씨 오래 사세요."

태호의 갑작스런 말에 강수는 곧바로 되묻게 된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저씨가 오래 살아야 제가 어른 될 때까지 후원받을 수 있잖아요."

"그건 너무 이기적인 소리 아냐? 내가 너 후원해 주려고 오래 살아야 되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무슨 뜻인데?"

강수는 태호의 말에 관심이 생겼는지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추궁해 본다.

태호는 그런 강수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긴 한숨을 내쉰 후에야 대답하고 있었다.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만 도와주세요. 제가 계약금 받고 프로에 입단하면 그때부터는 혼자서도 할머니랑 동생들 책임질 수 있을 테니까, 그 때까지는 살아 계세요."

태호는 마치 어려운 고백을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해오고 있었다.

강수는 그런 태호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고는 대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런데 태호의 말 속에서는 묘한 구석이 있어서 그 부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대체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자신의 나이를 물어보는 강수의 물음에 태호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렇게 대꾸한다.

"한 사십...다섯 살?"

"뭐? 이 자식아?! 나 아직 서른 살밖에 안됐거든!"

자신의 나이를 밝히는 강수의 말에 태호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저씨 세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혼자서 세월을 정통으로 맞으신 거예요?"

"뭐 인마? 너 후원 안 해 준다."

"아저씨 돈도 아니면서."

강수는 태호의 말에서 자신이 유치하게 굴었다는 점을 인식하며 헛기침을 해 보인다.

그런 후 다시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말을 꺼낸다.

"태호, 너는 걱정할 필요 없어. 너 후원하는 일은 염려 안 해도 될 테니까."

"...."

호언장담을 하는 강수의 말에도 태호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부탁의 말을 건네오고 있었다.

"딱 스무 살까지만 도와주시면 돼요. 그 다음부터는 제가 이자까지 쳐서 갚아드릴게요."

태호의 각오 어린 부탁에 강수는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짓게 된다.

하지만 이어진 태호의 말에 표정을 다시 굳힌다.

"그러니까 후원자 알려줘요."

"너 프로 데뷔해서 한국 시리즈 우승하면."

"그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그 때까지는 살아 계세요."

"나 아직 서른 살이라고!"

다시 두 사람의 대화는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그후에도 유치한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강수는 태호가 간간히 말하는 진심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잘 준비해가고 있구나.'

태호와의 대화를 통해 강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힘겨워 보이는 태호의 가정환경에 그가 엇나갈 것을 우려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대화를 통해 태호가 자신의 미래를 차근차근 계획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고 보세요. 딱 스무 살만 되면 고졸 루키로 프로무대를 휩쓸어 버릴 테니까."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각오를 밝히는 태호의 당찬 목소리에 강수는 미소 짓게 된다.

태호가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동생인 강호를 지켜보며 잘 알게 된 강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호의 바람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태호는 강호와 닮은 구석이 많은 녀석이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강수는 태호가 프로 무대의 마운드에 오르는 날을 그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언젠가 강호와 태호가 프로 무대에서 만나는 날도 오겠지.'

강수는 서로 닮아 있는 두 사람이 프로 무대에서 만나게 될 장면을 그려보며 벌써부터 기대에 벅차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강수와 태호의 하루가 지나가는 동안에도 포스트시즌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2대 2로 박빙을 이루었던 플레이오프 경기는 베어스가 마지막 경기를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진출 팀이 정해진 상황이었다.

타이거즈는 포스트시즌 돌풍을 선보였지만, 결국 베어스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한 채 한국시리즈 진출 기회를 다음 시즌으로 미루어야만 했다.

그 후 포스트시즌 일정은 잠시 소강사태를 맞이한다.

한국시리즈 첫 경기가 예정된 토요일까지는 며칠의 여유가 남아 있었던 까닭이었다.

시간과 장소는 한국시리즈 개막을 며칠 앞둔 시점의 잠실로 이동한다.

"첫 경기 선발은 장원종으로 갑니다."

베어스의 총사령탑인 구형태 감독의 단호한 말이었다.

그의 선언에 코칭스태프들의 행동이 바빠진다.

베어스 코칭스태프는 치열하게 진행된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일정 후에도 여전히 바쁜 상태였다.

직접 경기를 치룬 선수들에게는 잠시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한국시리즈 라인업 구상을 해야 하는 코칭스태프는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니퍼드를 2선발로 갑니까?"

투수코치의 질문에 구 감독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요. 2선발은 유희건으로 가고, 3선발을 니퍼드로 갑니다."

구 감독의 결정에 투수 코치를 포함한 몇몇 코치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에서 팀 에이스인 니퍼드를 선발로 올리긴 했지만, 포스트시즌이라는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3일 휴식 후 선발 등판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구 감독이 등판 간격을 고려해 한국시리즈 첫 경기에서 니퍼드를 배제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두 번째 경기마저 제외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독님, 기선 제압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니퍼드를 첫 경기에서 제외하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두 번째 경기는 니퍼드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4일 휴식 후 등판이니까 간격도 크게 무리는 아니고요."

수석 코치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구 감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구 감독이 예상하는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는 벼랑 끝 승부가 될 거라는 예측에서였다.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는 최악의 가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퍼드를 당겨 썼다가 경기를 내줘버리면 흐름을 단 번에 내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니퍼드는 3선발로 가겠습니다."

구 감독의 부연 설명에 수석 코치도 결국 물러서고 만다.

선발 라인업 구성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었기에 권유나 제안을 할 수는 있어도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구 감독이 보여준 결과들도 유지혁 수석을 물러서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였다.

'감독님에게 다른 계획이 있으신 거겠지.'

그것이 유 수석을 포함한 모든 코치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구 감독은 작년과 재작년 시즌을 베어스의 통합 우승으로 일궈낸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현재 열 개 팀의 사령탑 중에서 구형태 감독과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은 자이언츠의 손성조 감독 정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럼 선발 투수 로테이션에는 동의하신 걸로 알고, 불펜 구성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구 감독의 신속한 의사 진행 속에 한국시리즈를 대비한 베어스의 라인업 구상이 빠르게 완성되어간다.

안건은 다음으로 넘어가 있었다.

"전술과 전략 구상은 안정형으로 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는 것도 오랜만이고, 팀 구성도 신인 선수들이 대부분이니 공격적인 전술보다는 자이언츠의 실수를 기다리는 방향이 낫지 않을까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선수단 평균 연령이 어린 자이언츠에게는 허를 찌르는 전략보다 보수적인 전략운용이 유효할 겁니다."

경기 전략과 전술은 대다수의 코칭스태프들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급진적인 성향의 코치들이 첫 경기부터 공격적인 전략으로 가는 방안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구 감독은 이번에는 다수결의 논리를 따르기로 한다.

전략, 전술에 대한 구상을 마친 후 구 감독은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음 안건을 입 밖으로 꺼낸다.

"그럼 다음으로... 백강호에 대한 대처 방법을 논의해볼까 합니다."

"..."

구 감독이 밝힌 안건에 분주하게 의견을 말하던 코치들의 입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닫혀버린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모든 코치들을 대표해 유지혁 수석이 입을 연다.

"포스트시즌 이전에 계획한 대로 가시죠."

유 수석의 제안에 모든 코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구 감독이 다시 한 번 확인 차 묻게 된다.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네."

구 감독의 물음에 유 수석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강호에 대한 베어스의 대처가 결정되고 있었다.

구 감독 또한 유 수석의 대답에 별다른 의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구 감독이 그렇게 강호에 대한 대응 방법을 결정하는 가운데 사직구장에서도 비슷한 주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장소는 사직구장으로 이동한다.

"강호를 1번으로 기용하는 게 어떨까요?"

오랜 고민 끝에 내놓은 김 수석의 제안에 손 감독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손 감독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4번 타자로서 강호의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크게 와 닿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사이 김 수석의 말이 이어진다.

"구 감독의 성향을 고려하면 한국시리즈에서 베어스가 강호를 상대해 줄 가능성은 낮습니다. 하지만 그건 강호가 4번 타자에 있을 때 국한되는 일이겠지요. 강호를 리드오프로 두게 되면 무턱대고 고의사구를 줄 수는 없을 겁니다."

김 수석의 말은 충분한 타당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코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손 감독은 손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으음..."

긴 침음과 함께 강호에 대한 손 감독의 고민은 계속된다.

다시 시간은 지나 구 감독과 손 감독을 깊은 고민에 잠기게 만든 당사자는 오늘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딱! 따악!

호쾌한 타격음이 실내 훈련장을 가득채우고 있었다.

강호가 때려내는 타구는 시속 170km를 상회할 정도로 강한 타구였고, 실내 훈련장에 자리잡은 동료 선수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강호의 각오가 보통이 아닌데요?"

"그러게. 저 정도 타구면 실제 경기 때는 무조건 넘어간다고 봐야지."

"우리도 수비 훈련은 그만하고 이제라도 타격 훈련에 집중해야하는 거 아닌가?"

귓가에 들려오는 선배 선수들의 대화에도 강호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스윙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선배 선수들이 보기에는 오직 스윙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 강호의 모습이었지만, 강호의 머릿속은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 감독님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한국시리즈에도 고의사구로 걸러질 확률이 높아. 한 경기에 주어질 타석 기회는 많아봐야 두, 세 번 정도일까?'

강호는 타격 연습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한국시리즈를 구상해나가고 있었다.

고의사구가 예상되는 한국시리즈 타석에서 한정된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선배 선수들이 참관하고 있는 와중에도 타격 훈련에 전념하고 있는 이유였다.

'프리마켓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을 때, 타격 아이템 없이 기록한 타율은 3할 2푼 4리다. 물론 시즌이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스탯이 비약적으로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데이터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야.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현재의 스탯으로 기록할 수 있는 적정 타율은 3할 대 후반 정도가 될 거야.'

강호는 올 시즌 스스로 기록한 데이터를 돌이켜보며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더 이상 기량을 상승시킬 시간은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냉철한 자기 성찰만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이제 하루 남았다!'

강호는 한국시리즈까지 남은 기간을 상기하며 시즌동안 완성시킨 스윙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본다.

따악!

강호의 스윙으로 만들어진 호쾌한 타격음이 또 다시 실내 훈련장을 가득 채운다.

이제 모두가 기다리는 한국시리즈 경기를 하루 앞둔 시점의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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