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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의 결과
이제 예정된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까지 얼마남지 않은 상태였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다이노스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타이거즈와 정규 시즌 2위 팀 베어스 간의 플레이오프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 시즌 4위 팀 타이거즈는 와일드카드와 준 플레이오프로 이어진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명장면들을 연이어 만들어내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에 반해 2위 팀 베어스는 후반기 들어 자이언츠가 대두되기 전까지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전통적인 강팀이었다.
타이거즈의 돌풍과 강팀 베어스의 저력이 맞붙게 된 플레이오프 경기는 모두의 관심 속에 10월 17일 목요일, 잠실구장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린다.
따악!
경기 시작부터 타석에서 울려 퍼진 호쾌한 타격음이 잠실구장을 타이거즈 팬들의 붉은 물결로 가득 채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거즈의 1번 타자 노수강의 벼락같은 홈런이 플레이오프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한국 시리즈 준비로 바쁜 자이언츠 선수단도 삼삼오오 모여 TV중계를 통해 플레이오프 첫 경기를 관전하는 중이었다.
"우와~ 노수강이 홈런을 치네. 그것도 초구에! 타이거즈 돌풍이 심상치 않다더니 이러다가 한국시리즈에 타이거즈가 올라오는 거 아냐?"
벼락같이 터져 나온 노수강의 선제 홈런에 지명타자 채중석이 놀란 탄성을 내뱉는다.
실내 훈련장에서 타격 훈련에 집중하고 있던 중석은 플레이오프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는 말에 TV가 놓여 있는 휴게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다.
그런 중석의 곁에는 후배 선수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저는 타이거즈보다 베어스가 더 편한데 말입니다. 타이거즈 타자들은 언더핸드 투수한테 강한 편이어서 한국시리즈에 안 올라왔으면 합니다. 타이거즈보다 베어스랑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우의 목소리에 주변에 자리 잡은 선배들이 웃어 보인다.
올 시즌을 1점대 방어율로 마무리한 클로저 권대우는 유독 타이거즈 전에 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베어스 전에서는 0점대의 방어율로 극강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타이거즈 전에는 시즌 4점대 방어율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대우의 말이 이해되긴 해도 그의 말에 동감하는 선수들은 많지 않았다.
"우리 대우 후배가 속편한 소리하고 있네. 누가 봐도 베어스보다는 타이거즈가 낫지!"
대우의 말을 반박하고 나선 것은 문표였다.
그의 확언에 근처에 앉은 2루수 황인태가 질문을 던진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기세가 오른 타이거즈보다 베어스하고 상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 팀이 베어스하고 시즌 전적도 좋지 않습니까?"
"정규 시즌 전적이야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시즌까지 같은 흐름일 거라는 기대는 안하는 게 좋아. 정규 시즌하고, 포스트시즌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니까."
문표의 발언에 대다수의 선배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런 선배들의 모습에 후배 선수들은 궁금증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시즌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겁니까?"
이번에는 중견수 유성철이 묻고 있었다.
그는 올 시즌에 자리를 잡은 루키들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은 26살이지만, 포스트시즌을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시즌 분위기가 어떤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때마침 휴게실로 들어온 캡틴 강민수가 대신한다.
"그런 건 문표한테 물어봐도 잘 몰라. 우리 팀이 가을 야구 진출했을 때마다 문표는 2군에 있었거든."
장난스럽게 말하는 캡틴의 말에 문표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연다.
그러나 이내 입을 닫아야만 했다.
민수의 말에서 반박할 만한 핑계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쳇, 그렇게 팩트로 폭행을 해야 하는 겁니까?"
문표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민수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런 문표에게 '땡큐'라고 감사인사를 건넨 캡틴 강민수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간다.
"이번 한국시리즈에는 특히나 신인선수들이 많이 출전하게 될 테니까 대략적인 분위기를 설명해주도록 할게."
민수는 부드러운 어조로 후배 선수들에게 포스트시즌과 정규 시즌의 차이점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팀 내에서 베테랑 투수 손명학과 윤길준, 지명타자 채중석과 더불어 가을 야구 경험이 가장 많은 캡틴이었기에 이 기회를 빌어서 후배 선수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려는 것이다.
"야구가 다 그렇지만, 특히나 포스트시즌 경기는 멘탈 싸움이라고 봐야 돼. 간혹 베테랑들도 흥분하게 만드는 것이 가을 야구의 힘이거든. 그러니까 지금부터 경기장 위에서 마인드 컨트롤하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두는 게 도움이 될 거야."
민수는 서두를 시작으로 기나긴 설명을 이어나간다.
포스트시즌 같은 단기전에서 사소한 실책 하나가 시리즈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정규 시즌과는 다른 흥분 상태가 쉽게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나선다.
포스트시즌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과도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연이은 실책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긴 설명 후에 민수는 이런 식으로 말을 맺고 있었다.
"포스트시즌 경기는 누가 더 잘하느냐의 싸움이 아니야. 누가 더 실수를 덜 하느냐의 싸움이지. 그러니까 괜한 영웅심으로 격앙된 플레이는 피해야 하겠지. 가장 기본에 충실해야하는 시리즈가 포스트시즌 시리즈니까."
민수의 친절한 설명에 신인 선수들은 '아~'하는 깨달음의 탄성을 내뱉는다.
그런데 그 중에는 고참 선수라 할 수 있는 문표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표는 민수의 설명을 모두 들은 후에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타격 훈련보다는 포구 훈련 같은 수비 훈련에 집중해야겠네. 남은 개인 훈련 일정을 조금 수정해야겠는데?"
문표의 혼잣말에 근처에 앉아 있던 후배 선수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인다.
기본에 충실해야한다는 민수의 말과 그러기 위해서는 타격 훈련보다는 수비 훈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문표의 말이 크게 와 닿았던 것이다.
후배 선수들을 대표해서 중견수 유성철이 묵직한 태도로 입을 연다.
"솔직히 한국시리즈 타석에서 강한 한방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팀에 해가 될 수도 있겠네요."
성철의 말에 다른 신인 선수들도 동조하는 모습이었다.
올 시즌 세대교체를 통해 1군에 올라온 선수들 중 최 연장자인 문표와 둘째 격인 성철 모두가 같은 견해를 내보이자 나머지 신인 선수들도 그 흐름에 따라오는 분위기였다.
그런 후배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캡틴 강민수와 지명타자 채중석, 베테랑 투수 손명학과 윤길준은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특히나 캡틴은 곁에 앉은 문표에게 씨익 하고 웃어보였는데 문표 역시 작은 미소로 화답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 교환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른 선수들은 발견할 수 없었고, 오직 두 선수만의 비밀로 간직될 것으로 보였다.
'지나치게 잘 먹히는데요?'
민수를 향한 문표의 눈빛은 마치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바라보는 민수의 눈빛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문표 네 연기력이 좋았어. 덕분에 감독님의 지시 사항을 완수할 수 있었네.'
문표를 향해 웃어 보이는 캡틴의 진심이었다.
민수는 사실 포스트시즌 경험이 없는 후배들에게 분위기를 미리 알려주라는 손 감독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문표를 포함한 선배 선수들과 분위기를 조장하고 나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팩트 폭행을 하고 그러십니까? 후배들한테 창피하게.'
'미안해. 내가 한국시리즈 끝나고 제대로 밥 살게.'
'오케이, 콜!'
민수와 문표는 순식간에 눈빛을 교환하며 다시 TV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어느새 경기는 중반부를 지나고 있었고, 노수강의 선제 홈런으로 리드를 잡은 타이거즈는 베어스의 막강한 공세에 밀려 2대 6으로 경기를 역전당한 상태였다.
"이야~ 역시 베어스는 가을 야구에 강하다니까. 투수들이 언터쳐블이네."
중석은 탄성을 내지르며 후배 선수들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주변을 둘러보며 이렇게 입을 연다.
"그런데 강호는 어디 갔어? 아직 훈련 중인 거야?"
중석은 강호의 행방을 궁금해 하며 묻고 있었고, 그의 질문에 답하는 사람은 문표였다.
"요즘 우리 백 스타가 얼마나 바쁜지 모르십니까? 오전 내내 팀 훈련 끝내고 오후에는 광고 촬영 간다고 나갔습니다."
문표가 그렇게 대답하자 중석이 다른 질문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사이 문표가 빠르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저녁 전에는 구단 프로모션에 갔다가, 지역 유지들하고 저녁 일정이 잡혀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단 측에서 일주일 전부터 요청한 거라 빠질 수 없다나 뭐라나. 저녁 후에는 개인 훈련 하러 다시 경기장으로 온다니까 그 때 강호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 겁니다."
문표는 그렇게 강호의 오늘 스케줄을 세부적으로 설명해준 후 입을 다문다.
잠시 문표의 말을 입을 벌린 채 듣고 있던 중석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본다.
"문펴, 너 뭐하는 사람이야? 강호 매니저야? 네가 강호 일정을 어떻게 다 알고 있어?"
중석의 말에 문표의 표정이 바뀐다.
사뭇 담담한 표정으로 답하고는 있었지만, 문표의 얼굴 가득 자리한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그냥 확인해 봤습니다. 부러워서는 아니고요."
문표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질문을 던진 중석도, 주변에 가득 자리한 선수들도 문표의 진심은 말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느끼는 중이었다.
'부러운가 보네.'
중석은 문표의 진심을 짐작하며 혀를 차 보인다.
그러면서 강호의 시즌 기록과 활약상을 떠올리며 문표의 심정을 조금은 동감하게 된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부럽지 않아!'
중석은 문표에게서 전염된 강호에 대한 부러움을 떨쳐내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한국 야구사의 역사를 다시 쓰는 강호의 시즌 기록과 그로 인해 빗발치는 CF요청들, 억대로 뛰어오른 몸값에 엄청난 수의 팬클럽까지.
거기에 며칠 전 가졌던 팀 회식 자리에서 강호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더 이상 자기 최면도 소용이 없어짐을 느낀다.
'저는 취하고 싶지 않습니다. 현실이 더 즐겁거든요.'
그 때 강호는 손명학 투수가 건넨 술잔을 마다하며 그렇게 대답했었다.
강호의 말은 중석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이어서 여태까지 생생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석은 그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가로젓다가 실패하고는 갈증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입을 열고 있었다.
"술이 땡기네. 부러워서는 아니고, 갑자기 목이 말라서."
중석은 그렇게 변명처럼 말을 꺼낸 후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런 중석을 향해 문표가 입을 연다.
"어디가세요? 낮술 하러 가십니까?"
"낮술은, 훈련하러 간다. 한국시리즈 준비해야지."
중석은 문표의 질문에 그렇게 답하며 자신의 배트를 찾아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후 문표도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나도 훈련하러 가야지. 혹시 누가 알겠어? 한국시리즈에서 괜찮은 모습 보이면 나도 강호처럼 광고 계약이라도 따낼 수 있을지? 뭐, 그렇다고 해서 부러운 건 아니고."
문표는 그렇게 변명처럼 말을 꺼낸 후 중석의 뒤를 따라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우리도 가자."
"훈련하러 가야지. 내년 시즌은 강호 정도는 아니더라도 연봉이라도 올려 받으려면 놀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선수들은 그렇게 하나, 둘 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훈련장으로 향한다.
다른 일정으로 바쁜 강호는 알지 못했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던져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팀 동료들의 부러움 속에 강호는 여전히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강호가 팀 훈련과 개인 훈련, 광고 촬영과 구단 프로모션, 각종 행사에 초청되는 일정 속에서도 포스트 시즌 일정은 계속되어 베어스와 타이거즈 간의 플레이오프 시리즈는 2대 2 박빙으로 이어지며 양 팀 팬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중이었다.
강호는 너무 바쁜 나머지 양 팀 간의 경기를 밤늦은 시간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확인할 정도였다.
그렇게 바쁜 일정 속에 10월 22일이 되었을 때 강호는 한 통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형: 강호야, 오늘은 일찍 퇴근한다고 했지? 오랜만에 형이랑 저녁 먹으러 나가자.
형에게서 온 카톡 메시지를 확인한 강호는 남은 일정을 서두른다.
정규 시즌 우승 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최근 들어 형과 대화할 시간도 없었던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강수는 동생의 일정을 기억하고 있다가 일정이 비는 오늘에서야 저녁을 함께 먹자고 제안한 것이다.
강호는 형의 제안에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후 주어진 일정을 부지런히 소화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끝낼 수 있었고, 사직구장 앞에서 기다리는 형과 마주할 수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형을 향해 달려가던 강호는 형의 복장을 확인하고 나서는 의아한 마음이 생겨난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일정이 늦어져서. 근데 웬 정장이야? 어디 다녀왔어?"
강호는 사과의 말을 먼저 건넨 후 평소와는 다른 형의 복장에 대해 물어본다.
평소 강수는 작업복 차림으로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깔끔한 정장을 입은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강수는 동생의 질문에 대답대신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차에 탈것을 제안했다.
"우선 차에 타서 얘기하자. 이러다가 늦겠다."
강수의 말에 강호는 얼떨결에 형의 차에 오른다.
혹시라도 강수가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면 자신이 많이 늦은 까닭에 예약이 취소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타악.
강호가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메는 것을 확인한 강수는 서둘러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건다.
그 후 강수의 차는 빠르게 사직동을 벗어나고, 오랜만에 형과 대화를 나누게 된 강호는 이런저런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러다 차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묘하게 익숙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형, 여긴 김해 쪽으로 가는 방향이잖아?"
동생의 물음에 강수는 '맞아'라고 짧게 답한 후 다시 말없이 차를 내달린다.
강호는 그런 강수에게서 수상함을 느낀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입은 것도 그렇고, 그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도 수상했다.
결국 강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게 된다.
"무슨 일인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강호의 질문에 강수는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렇게 대꾸의 말을 꺼낸다.
"내기 결과 확인하러 가야지. 2만원 말이야. 네가 준 2만원 어디에 썼는지 확인시켜 준다고 했었잖아."
강수의 대답을 통해 강호는 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해 낸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김해를 향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말로 하면 되잖아? 뭐 하러 굳이 확인하러 간다는 거야? 중요한 일 아니면 식사부터 하자."
강호는 형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끼고는 그렇게 제안하고 있었다.
형이 자신을 데리고 김해에 갈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이어진 형의 대답에서 무언가를 직감하게 된다.
"중요한 일이야."
웃음기 없는 형의 대답에 강호는 한 가지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여긴 엄마를 모신 납골당이 있는 방향이잖아?'
강호는 익숙해 보이는 주변 정경에 확신을 갖게 된다.
2군 시절 생활했던 독신자 숙소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까닭에 주변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강호는 형의 의도를 짐작해내고는 서둘러 입을 연다.
"형, 내가 말했었잖아. 내가 1군 무대에 오르고 나서야..."
말을 하다말고 강호는 입을 닫고 만다.
과거 강호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모친의 사망을 기점으로 엇나갔던 기간이 있었다.
그 때 형인 강수는 본인의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동생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고, 강호는 그런 형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었다.
'좋아. 해볼게! 끝까지 한번 해볼게! 대신 내가 프로야구 1군 무대에 올라서기 전까지는 엄마가 계신 납골당을 절대 찾지 않을 거야. 엄마 사진을 보는 일도 없을 거야!!'
그 때의 강호는 독한 마음을 품으며 그렇게 다짐했었다.
본인의 인생을 포기하면서 까지 동생들을 지키려는 형이 가엽기도 했고, 그런 형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이 증오스러웠다.
그래서 그런 다짐을 했었다.
현실에 대한 증오가 돌아가신 엄마를 향해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약속했던 1군 무대는 진즉에 밟은 상태잖아? 돌아가신 엄마를 다시 찾지 않겠다는 명분이 사라져 버렸구나.'
강호는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독하게 다짐했던 1군 무대를 시즌 초에 밟게 되면서 엄마를 외면했던 명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형은 그런 부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말하지 않았을까?'
강호는 문득 궁금해진다.
형이 자신에게 왜 엄마에 대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를.
아마도 강호 본인이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린 것인지도 몰랐다.
'형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강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해 입을 열려 한다.
아직은 한국시리즈라는 중요한 고비가 남아 있으니 한국시리즈가 끝난 이후에나 다시 엄마의 묘소를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형, 일단은."
형을 설득하려던 강호는 자신의 말을 끓고 이어진 형의 대답에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오늘 엄마 기일이다."
"뭐?"
"오늘이 엄마 기일이라고.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형이랑 다녀오자."
형의 담담한 목소리에 결국 강호는 생각을 바꾸게 된다.
아무리 바빴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기일조차 잊고 있던 자신이 죄스럽기만 하다.
강수는 그런 동생을 이끌고 납골당 앞 매점에서 조화 하나를 집어 든다.
"2만원 입니다."
매점 직원의 말에서 강호는 모든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조화들에 비해 풍성해 보이는 고급 조화는 강호가 궁금해 하던 2만원의 사용처였던 것이다.
강호는 복잡한 기분 속에 형의 발걸음을 쫓아 엄마를 모신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엄마의 유골함을 마주하게 된 강호는 말을 삼켜야만 했다.
유골함 옆에 놓아둔 사진 한 장이 그의 말문을 막게 한 것이다.
낡은 사진 속에는 처연하게 웃는 엄마의 곁에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강호 본인의 어린 시절 모습과 형인 강수, 동생 진주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 때의 삶은 지독할 정도로 힘겨웠지만, 이렇게 그 시절 사진을 마주하게 되니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그리워진다.
자신의 곁에 선 강호가 아무런 말이 없자 강수는 사진 속 엄마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엄마, 오늘은 강호도 왔어요."
강수의 목소리는 아무런 고저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형의 목소리에서 강호는 지독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강호를 힘들게 하는 슬픔은 형에게서 전달된 것이 아니라 강호 본인이 가진 그리움이었다.
강호도 무언가 말을 꺼내보려 했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먹먹한 감정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이어진 형의 목소리에 결국 강호는 파르르 떨리던 눈을 감고 만다.
"엄마, 거기서도 우리 강호 잘 보살펴 주세요."
나직한 형의 목소리가 거대한 파도가 되어 강호의 감정을 뒤흔든다.
강호는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대로 눈을 떠버리면 눈꺼풀 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눈을 감은 채로 말없이 서있어야만 했다.
그런 강호의 주변으로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한국 시리즈를 며칠 앞둔 시점의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