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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완성하다
10월 5일 토요일, 자이언츠의 명운을 건 중요한 일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찍부터 경기장을 채워나간 관중들은 각자의 바람을 담은 채 선수들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거나, 기도를 하는 모습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시즌 9위가 확정된 라이온즈 원정석까지 자이언츠 홈 팬들이 장악한 가운데 양 팀의 시즌 마지막 시리즈가 시작되고 있었다.
"경기 시작됩니다!"
중계석의 한명진 캐스터가 힘찬 목소리로 경기 시작을 알린다.
한 캐스터의 라인업 리딩 속에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팀의 1선발인 몬테사 투수.
손 감독은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고려해 에이스인 몬테사를 선발 투수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 결정은 손 감독의 개인 의견 뿐 아니라 김 수석을 포함한 코칭스태프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파핫!
몬테사의 역동적인 와인드업 후 그의 손끝에서 오늘 경기의 초구가 뿌려진다.
초구는 포수 강민수의 싸인대로 몸 쪽 꽉 차는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퍼엉!
포수의 미트를 때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타석에 선 타자가 한 발짝 물러선다.
초구부터 위협적인 코스의 공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코스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에 미간을 찡그린 라이온즈의 1번 타자 박해진.
문득 궁금증이 들어 전광판에 찍힌 구속을 확인한다.
'155km!'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구속이었다.
초구부터 어마어마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몬테사의 위력에 박해진은 오늘 경기의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자이언츠 쪽의 각오가 장난이 아니구나. 하긴 오늘 경기만 잡으면 정규 시즌 우승이 확정되는 거니까.'
해진은 자이언츠의 각오를 몬테사의 초구를 통해 확인하며 왠지 씁쓸함을 느낀다.
한 때 '제국'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라이온즈가 비상했던 시기가 있었다.
5년 전쯤의 라이온즈는 유일무이한 네 시즌 연속 통합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라이온즈를 우승권으로 분류하는 전문가들이 전무할 정도로 팀의 하락세가 뚜렷한 상황이었다.
한 때 라이온즈가 우승 0순위로 불리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박해진 선수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경기 전까지만 해도 없던 의욕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어차피 우리 팀이 시즌 9위가 확정된 건 바꿀 수 없겠지만, 우승권 경쟁을 하고 있는 자이언츠에게 고춧가루를 제대로 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해진은 문득 드는 생각에 싱긋 웃음 지으며 배트를 평소보다 짧게 쥔다.
본인의 단점으로 지적받는 장타율을 고려해서 남은 몇 타석이라도 장타를 때려내고자 하는 욕심을 버린 것이다.
'출루다! 오늘은 내 기록이 우선이 아니라 팀이 이기는데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해진은 경기가 시작되기 전 품고 있던 각오를 되돌리고 있었다.
팀이 항상 승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올 시즌의 라이온즈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성적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의 기록을 만드는데 더욱 애썼던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만큼은 지고 싶지 않아!'
해진은 생각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비록 그런 의지가 팀의 순위를 뒤바꿀 수는 없겠지만, 정상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팀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온즈의 재건을 위해 팀의 1번 타자인 자신부터 의지를 표명할 것을 다진다.
그런 해진의 각오는 몬테사의 4구 체인지업을 통타함으로써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딱!
경쾌한 타격음이었다.
코스는 중견수 정면의 안타였고, 이 타구로 2루 이상을 밟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1루 베이스를 밟은 해진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출루에 초점을 맞춘 그의 계획이 성공한 까닭이었다.
"잘했다. 해진아. 자겸이가 타격감이 좋으니까 1회 초부터 기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어.”
해진의 곁으로 다가온 1루 베이스 코치도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팀의 2번 타자인 구자겸은 시즌 3할 5푼 대의 고타율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타격 능력이 뛰어난 타자였다.
무사 상황에서 리드오프가 1루 베이스를 밟은 상황이 구자겸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이 된다.
'벤치에서 도루 싸인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도루에 성공한다면 손 쉽게 득점을 얻을 수 있어. 도루다!'
해진은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인 몬테사를 더욱 흔들 생각으로 리드 폭을 크게 벌린다.
그의 의도는 단순히 몬테사의 멘탈을 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도루를 성공시켜 쉽게 득점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려는 생각이었다.
그것을 위해 투수인 몬테사와 포수인 강민수의 표정, 몸짓, 사소한 동작까지 모두 체크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리 발빠른 주자라도 상대 배터리의 움직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민수 포수의 움직임을 보니 견제구 두 개 정도를 던지겠구나. 일단 귀루 모션을 취하고, 견제가 끝나면 곧장 2루로 뛰면 돼.'
판단을 내린 해진은 무게 중심을 왼쪽에 두고 몬테사의 견제구를 대비한다.
과연 그런 생각대로 연달아 두 개의 견제구가 날아든다.
해진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웃음 지으며 슬라이딩을 위해 바닥에 닿아 있던 몸을 일으킨다.
'이제 됐어. 몬테사나 강민수 포수의 성향 상 더 이상 견제구를 던지지는 않을 거야.'
해진은 도루할 타이밍이 도래했다는 것을 확신하며 리드 폭을 넓게 벌린다.
몬테사 투수와 강민수 포수의 표정과 행동을 살핀 결과 이번 공으로 견제구를 던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해진을 자세히 살펴보는 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격수 위치에서 주자인 해진을 눈여겨보고 있던 강호였다.
'1루 주자가 도루하겠구나.'
강호는 해진의 동작과 분위기, 표정에서 그가 몬테사의 이번 공에 도루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즌 88개의 도루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강호로서는 주자가 도루할 때 어떤 습관을 보이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1루 주자인 해진이 지금의 공에 도루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강호는 2루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오른 손을 들어 강민수 포수를 향해 남몰래 싸인을 보낸다.
그 싸인을 확인한 포수 강민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몬테사에게 싸인을 낸다.
그 후 세트포지션을 취한 몬테사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고, 이미 1루 주자인 박해진이 2루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파핫!
박해진의 스타트와 함께 수비 자세를 잡고 있던 강호 역시 2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는다.
그 사이 몬테사의 패스트볼이 바깥쪽에 자리 잡은 민수의 미트에 빨려들었고, 포수 강민수는 즉시 몸을 일으켜 2루 베이스를 향해 공을 던진다.
리그 최상위의 주력을 보유한 강호답게 주자인 해진에 앞서 2루 베이스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송구 방향이 좋지 않았다.
'원바운드!'
강호는 민수의 송구가 다소 낮게 깔리는 것을 확인한 후 원바운드 송구가 될 것을 확신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주자를 2루에서 잡는 것은 고사하고 공이 외야로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공을 놓치면 시작부터 분위기가 라이온즈에게 넘어가게 돼. 무조건 잡아야 해!'
마음을 먹은 강호는 순간 이를 악물며 왼쪽 무릎을 굽힌다.
그러면서 원바운드 되어 들어오는 공과 박자를 맞춰 자세를 바짝 낮춘다.
타악!
글러브를 통해 민수가 던진 공이 손바닥을 때리는 감촉이 느껴진다.
강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확인하는 순간, 급히 글러브를 오므리며 2루 베이스를 향해 손을 뻗는다.
포구를 위해 다소 2루 베이스 앞쪽으로 전진해 있던 강호의 위치 상 주자를 잡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이 때 반전이 일어난다.
급하게 몸을 돌린 강호가 마치 슬라이딩을 하듯이 몸을 엎드리며 주자인 해진의 어깨를 태그하고 나선 것이다.
다소 과격해 보이는 태그 동작이었지만, 두 사람의 충돌은 없었고 모두의 시선이 2루심에게로 모아진다.
"아웃!!"
2루심의 판정은 아웃이었다.
강호의 곡예에 가까운 태그 동작으로 발 빠른 주자인 박해진을 도루사 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원바운드 송구를 한 강민수 포수가 고맙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고, 투수인 몬테사는 활짝 웃음 지으며 강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나이스 캐치, 캉호! 수비 쩔어!”
몬테사는 어설픈 한국말로 강호의 수비에 찬사를 보내온다.
홈팬들의 환호도 당연히 뒤따르고 있었다.
"우와~! 뭐야? 지금 백강호가 무슨 수비를 한 거야?"
"거의 덤블링을 한 것 같은데? 저 정도면 진기명기 아냐?"
"진짜 대단하다. 백강호가 저런 수비가 되는 유격수였구나! 타자로 워낙 잘해서 유격수 수비가 묻혀있었던 거네."
"그렇지! 백강호 선수는 타격만이 아니라 유격수 수비 능력 하나만으로도 골든 글러브 감이라고! 괜히 메이저리그에서 탐을 내겠어?"
팬들은 강호의 호수비 장면에 찬사를 보내면서 들뜬 목소리로 입을 모으고 있었다.
1루 주자인 해진이 도루에 성공했더라면 게임 시작부터 라이온즈에게 분위기를 넘겨줬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해진의 도루 시도를 차단해 냄으로써 아웃 카운트 하나가 올라가며 위협적인 주자가 사라지게 되었다.
강호의 호수비 하나로 상대 팀에게 넘어갈 뻔했던 분위기를 오히려 자이언츠 쪽으로 끌고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양 팀 덕아웃 역시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강호의 수비 장면이었다.
"괜히 백강호가 아니네요. 포수의 송구만 봐서는 무조건 세이프 타이밍이었는데, 저걸 순간적인 포구 능력으로 아웃을 만들어 버리네요."
라이온즈 덕아웃에서 수비 코치가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수비 코치가 보기에 강호가 조금 전에 보여준 장면은 가르쳐 준다고 해서 습득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었다.
선수 본인의 감각과 야구 지능이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플레이였던 것이다.
수비 코치의 그런 생각에 라이온즈의 감독 역시 동감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백강호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기는 하네. 대타를 세울 때 백강호의 유격수 수비 능력을 고려해서라도 좌타자 위주의 승부를 보는 게 좋겠어."
강호의 수비 능력을 확인한 라이온즈 감독의 결정이었다.
그는 오늘 경기 전까지만 해도 상대 팀 4번 타자인 강호의 타격 능력에만 초점을 맞춘 채로 경기를 준비했었다.
그런데 강호의 묘기에 가까운 수비 동작을 확인하고 나니 유격수로서의 강호도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혹시라도 대타를 기용할 상황이면 상대 투수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유격수인 강호의 수비 능력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다소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강호의 조금 전 수비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또한 그런 생각은 자이언츠 덕아웃 역시 동감하고 있었다.
"그동안 강호의 타격 능력에만 집중하다 보니까 강호가 얼마나 좋은 유격수였는지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경기에서 강호가 지명타자로 출장한 까닭도 있고요."
김민철 수석이 웃음기 띤 얼굴로 말해오고 있었다.
그의 말에 손 감독이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한다.
"그게 변수가 될 게야. 라이온즈 쪽에서 강호의 타격 능력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면 오늘 경기는 우리가 쉽게 풀어 나갈 수도 있어. 오늘 경기를 위해서 강호 녀석을 지명타자로 돌린 이유도 있었으니까."
손 감독의 대답에서 김 수석은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손 감독이 강호를 지명타자로 돌렸을 때는 강호의 체력 안배를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손 감독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렇게 단순한 이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감독님은 여러 상황을 모두 대비하고 계셨구나. 강호를 지명타자로 돌리면서 얻게 되는 이득은 타선의 집중력과 강호에 대한 체력 안배라고만 생각했었어. 그런데 감독님은 시즌 막바지까지 우승 경쟁을 할 것을 이미 예측하고 계셨던 거야. 오늘과 같은 경기를 예상하고는 상대 코칭스태프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계획이 있으셨던 거야.'
김 수석은 확신하고 있었다.
강호를 지명타자에서 유격수로 돌리는 간단한 수비 포지션 이동에도 손 감독의 많은 전략, 전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라이온즈 덕아웃에서도 미리 대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2번 타자인 구자겸이 볼넷을 얻어 출루에 성공했지만, 3번 타자 바티스타가 병살타를 때려내며 1회 초 라이온즈의 공격이 빠르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바티스타의 총알 같은 타구를 잡아낸 것은 유격수인 강호였고, 이번 역시 강호는 완벽한 수비 실력을 뽐내며 1회 초 세 개의 아웃카운트 모두를 자신의 손으로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김 수석은 빙긋이 웃음 짓는다.
'분명 라이온즈의 기세가 남다른 건 사실이야. 그런데 우리 팀에는 강호같은 유격수가 4번 타자로 있어. 오늘 경기가 과연 우리가 질 수 있는 경기일까?'
김 수석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그 사이 공수가 교체되어 팀의 1번 타자인 유성철이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성철은 상대 선발 투수와의 끈질긴 승부 끝에 풀카운트에서 볼넷을 얻어 내어 1루로 걸어 나간다.
그 후 2번 타자인 박철이 내야 땅볼로 물러나긴 했지만, 1루 주자였던 성철이 2루를 밟으면서 1사 주자 2루의 득점권 상황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3번 타자인 전준오가 기습 번트로 내야 안타에 성공하며 이제 상황은 1사 주자 1, 3루 상황이 완성되어 있었다.
이제 타석은 팀의 4번 타자인 강호에게로 돌아가고 있었고, 타석에 자리 잡은 강호의 모습을 확인하며 김 수석은 확신과도 같은 직감을 느낀다.
'오늘 경기는 우리가 이긴다!'
그것이 김 수석의 확신이었다.
타석에 들어 선 강호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확인한 김 수석은 오늘 경기는 도저히 질 수 없다는 강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런 김 수석의 예감 속에 상대 팀 선발 투수와 강호와의 승부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