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99화 (299/335)

0299 / 0335 ----------------------------------------------

대타자 백강호

홈팀 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와이번스 선수단, 그들은 시작부터 거센 공세로 원정 팀인 자이언츠를 몰아 붙였다.

여전히 남아 있는 5위 가능성과 와일드카드를 얻기 위한 와이번스 선수들의 투지는 무척이나 뜨거웠던 것이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1회 말에 터져 나온 정의준의 타구가 외야를 갈랐다.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나온 정의준의 타구는 그대로 문학구장의 담장을 넘긴다.

중계석에서는 정의준의 홈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넘어갑니다! 4구 빠른 볼을 통타한 정의준의 타구가 좌측 펜스를 넘깁니다! 정의준의 시즌 52호 홈런! 그리고 이 홈런으로 와이번스가 선제 득점을 얻어 냅니다!"

권 캐스터는 현장감 있는 목소리로 정의준의 홈런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런 권 캐스터의 목소리는 조금은 과장된 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야구계의 최대 이슈라 할 수 있는 강호가 라인업에서 빠지다보니 경기 시작부터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경기는 와이번스의 와일드카드 경쟁과 자이언츠의 시즌 우승 경쟁이 걸려 있는 중요한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강호 한 명이 빠진 것으로 그 긴박감이 절반은 줄어든 느낌이 든다.

단지 선수 한 명이 빠진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공허한 감정이었다.

그런 현장의 분위기를 느낀 중계진은 평소보다 쾌활한 목소리를 연출하며 분위기를 뛰어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네에~ 오늘은 경기 결과를 쉽게 예측하기가 힘들겠습니다. 정의준 선수의 투런포로 와이번스가 1회부터 2대 0으로 앞서가게 됐네요. 반면에 자이언츠는 1회 초 공격에서 4번타자 채중석이 병살타를 때리면서 아쉽게 이닝을 마무리짓고 말았거든요. 오늘 경기에서는 양 팀의 4번 타자 대결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의준의 홈런 상황에서 안 위원의 해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언뜻 들어보면 양 팀의 전력이 박빙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파고들어보면 그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볼 수 있었다.

야구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일부 자이언츠 팬들은 안 위원의 말 속에 내제된 의미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주목하긴 뭘 주목해? 52홈런 때린 정의준보다 채중석의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말 아냐? 1회 채중석은 병살타, 정의준은 투런 포 때린 것만 봐도 확실한 거잖아."

"그렇지. 채중석이 정의준보다 앞서는 건 몸무게 밖에 없어. 40kg정도 더 나갈 걸?"

"백강호 선수가 한 경기 빠진 건데 빈자리가 너무 크네. 그런데 손 감독은 백강호를 왜 뺀 거야?"

"백강호가 무리를 하기는 했지. 올스타전에 홈런왕 레이스까지 참가했는데 제대로 쉰 적도 없잖아? 또 요즘 우리 팀 상대하는 팀마다 백강호를 거르기 바빴잖아? 이쯤 되면 백강호가 아무리 외계인 급 대타자라 해도 페이스 떨어질 때가 됐지."

"너는 손 감독이 오늘 경기에서 백강호 뺀 게 휴식 차원이라고 보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휴식 차원이 아니면 지난 경기에서 멀티 홈런 때린 타자를 왜 빼겠어? 손 감독도 멀리 보는 거겠지. 정규 시즌 우승하고, 한국 시리즈도 우승해서 통합 우승 하려면 지금이라도 백강호를 관리해 줘야하는 거 아니겠어?"

"듣고 보니 그러네."

자이언츠 팬들은 중계진이 거론하지 않은 부분까지 유추해내고 있었다.

그런 팬들의 주장은 손 감독의 내심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어느새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팬들 사이에서 정론처럼 형성되어 간다.

그러는 중에도 양 팀 간의 승부는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따악!

정의준의 투런 포에 이어 2회 초에 터져 나온 호쾌한 타격음이 팬들의 가슴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2회 초 자이언츠의 선두 타자로 나선 5번 타자 황제인이 6구 째 승부 끝에 홈런포를 쏘아올린 것이다.

황제인의 솔로포로 자이언츠는 추격의 불씨를 짚이는 모습이었다.

홈런포를 치고 나간 황제인이 홈을 밟은 후 6번 타자인 스팅의 2루타, 이어진 김상훈의 중전 안타에 추가 득점을 올린 것이다.

그 후 특별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정의준의 홈런을 지워버리는 2득점을 따라붙으며 경기는 빠르게 속행된다.

"또 터집니다! 오늘 경기 세 번째 홈런포가 박정건의 배트 끝에서 만들어 집니다! 박정건의 솔로포로 이제 양 팀 점수 차가 다시 한 점차로 벌어집니다!"

권 캐스터의 열띤 목소리 속에 솔로포를 친 와이번스의 7번 타자 박정건이 베이스를 돌고 있었다.

2회 말에 또 다시 가동된 와이번스 타자의 홈런포에 양 팀 팬들은 오늘의 경기가 뜨거운 화력전이 될 것을 직감하게 된다.

특히 와이번스 팬들은 박정건의 홈런포에 환호하면서도 스물스물 피어나는 불안감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는 심상치 않은데? 2회까지 홈런만 해도 벌써 세 개잖아? 이러다 10점짜리 경기가 나오는 거 아냐?"

"오늘 경기 선발 투수가 에머리랑 몬테사라고 해서 투수전이 될 것 같더니만, 상황이 이렇게 풀리네. 이것 참."

"오늘 경기에서 백강호가 빠진 게 신의 한수였네. 자이언츠 4번 자리에 백강호가 있었다고 생각해봐. 백강호 있는 자이언츠랑 화력전이 가당키나 하겠어?"

"그러네. 백강호를 뺀 손 감독 덕분에 오늘 경기는 우리가 잡을 수도 있겠어."

와이번스 팬들은 화력전 양상이 될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경기에서 강호가 빠졌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불안감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그 불안감의 실체에 대해서 입 밖으로 꺼낸다.

"자이언츠한테 만루 기회가 오면 백강호가 대타로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

"..."

누군가의 주장에 모든 와이번스 팬들이 입을 다물게 된다.

염두는 하고 있었지만,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던 말이었다.

불안감의 실체에 대해 직접 전해 듣게 되니 왠지 그런 상황이 만들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더 강하게 피어오른다.

"에이~ 아니겠지. 만루 상황만 안주면 되는 거 아냐? 주자가 두 명 정도 있는 상황에서 백강호가 대타로 나오면 거르면 그만이지! 안 그래?"

"그래! 만루만 안주면 돼. 만루 찬스가 그렇게 쉽게 오는 기회는 아니잖아?"

와이번스 팬들은 자이언츠에게 만루 기회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야만 했다.

주자가 한, 두 명 있는 상황에서 대타로 강호가 출장한다면 고의사구로 거르면 되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도 경기를 이길 수 있다면 백강호를 고의사구로 걸렀다는 오명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만루 찬스에서 강호가 대타로 오르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에 점수 차가 박빙인 승부처의 만루 상황에 강호가 대타로 나온다면 그 타석은 보나마나 뻔한 것이었다.

"백강호 만루 상황 타율이 얼마나 되지?"

"8할인가? 9할이었나? 아마 그쯤 될 거야."

"허헐, 만루 상황에서 8할이 넘는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어디 그것만 말이 안 되나? 백강호 시즌 기록 전체가 말이 안 돼. 타율 4할 4푼에 73홈런이라니? 이게 사람 기록이야?"

와이번스 팬들은 강호의 시즌 기록을 열거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자이언츠의 공격 기회에서 만루 찬스가 부여되지 않도록, 또한 만루 찬스가 부여되더라도 점수차가 박빙인 상황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와이번스 팬들의 입장에서는 점수 차가 1, 2점차만 아니라면 만루 상황에서라도 강호를 고의사구로 걸러야 한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니까 걸러야지. 백강호는 1점차 상황이 아니면 만루에도 걸러야 돼."

강호를 상대하는 팀의 팬들은 대다수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현장의 분위기보다 조금 더 극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 팬들에게서는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그런 와이번스 팬들의 시선 속에 경기는 예측했던 대로 양 팀 타선이 모두 폭발한 화력전으로 진행된다.

5회 말이 되었을 때는 양 팀 점수 차가 9대 6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양 팀의 경기 내용을 지켜보던 중계석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또 투수가 교체됩니다. 결국 성수제 투수도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투수 교체가 단행되는군요. 자이언츠의 세 번째 투수 교체죠?"

"네, 팀이 3점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필승조 카드를 꺼낼 수도 있겠는데요? 자이언츠는 어제 경기를 쉬었거든요. 타선이 폭발한 상황이라 3점차는 극복 가능할 거라 판단하고, 가진성 투수나 표성태 투수를 올릴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중계석에서 권 캐스터와 안 위원의 말이 차례로 이어진다.

안 위원의 말에 그라운드를 주시하던 권 캐스터는 탄성과 함께 다시 말문을 연다.

"아~ 표성태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네요. 안 위원님 말씀대로 자이언츠가 아직 경기를 포기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권 캐스터의 말대로 자이언츠의 손 감독은 경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표성태를 마운드에 올린 뒤에도 자이언츠 덕아웃은 여전히 분주한 모습이었다.

"김 수석."

"네."

"진성이는 어때?"

"말씀하신 대로 몸을 풀게 해뒀습니다. 성태가 무너지면 곧바로 교체할 수 있을 겁니다."

손 감독은 김 수석의 대꾸에도 미진한 부분을 느꼈는지 잠시의 고민 끝에 추가 지시를 내린다.

"홍성빈과 손명학도 준비시키게."

"명학이를요? 명학이는 후반기 들어서 구위가 많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다소 구위가 떨어지더라도 명학이처럼 경험 많은 투수가 도움이 돼. 명학이도 같이 준비시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 수석은 손명학 카드를 준비시키라는 손 감독의 지시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크게 반발하지는 않는다.

오늘같이 예상을 깬 경기에서는 연륜을 갖춘 선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올 시즌 우리 자이언츠가 완벽한 세대교체를 성공시켰다는 말이 많지만, 사실 그런 이면에는 이런 단점도 존재하는 거야.'

김 수석은 여민석 투수 코치에게 손 감독의 지시를 전달하며 생각을 이어간다.

'강호처럼 팀의 주축이 되는 선수를 빼버리면 위기 상황에서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생긴단 말이야. 바로 오늘 경기처럼. 만약 오늘 경기에서 강호를 빼지 않았으면 와이번스가 저렇게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을까?'

김 수석은 스스로의 의문에 고개를 저어 보인다.

강호를 라인업에서 제외한 것이 와이번스의 기세를 올리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손명학 같은 베테랑이 필요한 거겠지. 그게 감독님의 판단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김 수석은 여 코치가 불펜에 인터폰을 거는 모습을 확인한 후 시선을 돌려 덕아웃 한편을 바라본다.

고글에 비친 김 수석의 시야에는 벤치 한편에 말없이 앉아 있는 강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강호는 오늘 라인업에서 함께 제외된 문표가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와중에도 냉철한 시선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강호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 김 수석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낀다.

'베테랑 투수인 명학이가 위기를 매듭지을 수는 있어도 이미 지고 있는 경기를 이기게 만들 수는 없는 거야.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강호의 대타 기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김 수석의 최종 결론이었다.

강호를 라인업에서 제외시킨 것이 지금의 상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면, 반대로 강호를 대타로 세워 이 상황을 한 방에 뒤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김 수석의 믿음은 단순한 억측이 아니라 강호를 한 시즌 동안 곁에서 지켜본 확신과도 같았다.

'강호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강호는 이제 대체할 수 없는 우리 팀의 4번 타자니까!'

김 수석은 강호가 앉아 있는 벤치에서 시선을 떼며 살포시 웃음 짓는다.

비록 팀이 3점차로 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김 수석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아직 '백강호'라는 비장의 카드가 벤치에 남아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김 수석뿐만 아니라 자이언츠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강호를 내라! 백강호 대타 내라고!"

"백강호~ 대타!"

자이언츠 팬들은 팀의 득점권 상황마다 '백강호 대타'를 외치며 손 감독의 결정을 촉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 감독은 묵묵부답이었고, 강호의 타석을 바라는 팬들의 목소리는 경기가 진행 될수록 더욱 커져만 간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경기의 최대 승부처가 될 8회 초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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