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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도약
경기가 없는 날이지만, 자이언츠 선수단 전원이 구장에 나와 팀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바쁜 이들은 훈련을 직접 소화해야하는 선수들이겠지만, 선수들 못지 않게 바쁜 이들이 있었다.
팀의 총사령탑인 손성조 감독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배트가 먼저 돈다. 허리 회전이 배트를 쫓고 있잖아!"
"릴리스가 빨라! 조금 더 공을 누르고 있어야지."
손 감독은 실내 훈련에 몰두하고 있는 선수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선수들을 직접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 손 감독의 열정에 고참 급 선수들도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고, 코칭스태프 역시 각자의 역할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호와 함께 아시아드 보조 경기장을 다녀온 기 코치는 오후가 되서야 손 감독의 곁에 합류 할 수 있었다.
되돌아온 기 코치의 얼굴을 확인한 손 감독이 곧장 물어온다.
"연맹 쪽이나 체육회의 분위기는 어떻든가? 협조할 의향이 있어보이던가?"
손 감독의 물음에 그를 향해 다가서던 기 코치가 작게 웃으며 대답한다.
"나쁘지 않습니다. 연맹 쪽에서 강호를 탐내는 눈치에요."
기 코치의 대답에 손 감독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설마 그 정도까지일까?"
"정말입니다. 육상연맹의 하 코치가 강호에게 전국체전 출전을 권유하면서 명함까지 주더라니까요. 하 코치가 강호에게 관심을 보였으니 연맹과의 업무 협조도 원활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기 코치의 대답에 손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말로는 기 코치의 말에 의문을 가진 것으로 보였지만, 손 감독은 이미 이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프런트에 요청해서 육상연맹과 체육회의 현장 관계자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호는 어떻든가? 혹시 컨디션이 떨어져서 주력에 이상이 있지는 않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묻고 있는 손 감독.
그를 마주하는 기 코치는 느끼고 있었다.
손 감독이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것은 강호에 관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 코치는 그런 손 감독에게 들고 있던 기록지를 펼쳐 보인다.
"직접 확인하시는 게 빠를 겁니다."
묘한 웃음을 지으며 기록지를 건네는 기 코치, 손 감독은 그런 기 코치에게서 건네받은 기록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내린다.
그리고 이내 손 감독의 표정이 변화한다.
"이 기록이 정말인 건가? 강호의 100미터 주력이 10초 26이라고?"
"네, 부산시체육회의 전자계시로 측정한 기록이라 정확한 내용입니다. 강호의 컨디션은 최상이에요."
기 코치의 대답에도 손 감독은 대놓고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데뷔 경기 이후 몇 경기를 빼놓고는 풀타임에 가깝게 출장하고 있는 강호의 컨디션 저하가 다소 염려되기는 했었다.
이번 주력 재측정은 단지 육상연맹과의 협조뿐만 아니라 강호의 컨디션을 확인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호는 손 감독이 예상하던 것보다 더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기록을 확인했는데도 강호의 컨디션 저하를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결과일 뿐이었다.
컨디션이 떨어진 선수가 한국 단거리 기록에 근접한 주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연맹의 하 코치는 뭐라던가? 이 정도 기록을 보고 다른 말은 없던가?"
"하 코치는 진심으로 강호의 전국체전 출전을 바라는 모양입니다. 물론 전국체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에 욕심을 내는 거겠지요. 세계육상선수권대회라던지 올림픽 출전 같은 것말입니다."
손 감독의 물음에 기 코치는 사실을 말하며 더불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인다.
"강호같은 스타 플레이어가 한국 신기록을 세우면서 육상계에 등장하면 아무래도 육상연맹에 대한 지원이나 예산이 지금보다 확대되지 않겠습니까? 육상연맹 쪽에서는 강호를 앞세워서 육상연맹의 사이즈를 키울 욕심이 생기겠지요. 국내 스포츠 정서상 단거리 육상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요."
기 코치의 말에 손 감독은 피식 웃음 짓는다.
강호가 단거리 육상 분야에 진출하여 한국 신기록을 세운다면 개인의 영광은 될 수 있지만, 강호 본인에게 절대로 이득이라 할 수는 없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만 하면 수백억 대의 몸값이 보장되는 강호가 뭐가 아쉬워서 비주류인 국내 단거리 육상에 도전하겠는가.
이미 군대를 현역으로 다녀온 강호로서는 굳이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에 목을 맬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강호는 내줄 수 없어!"
손 감독이 내린 결론이었다.
연맹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강호를 일정 기간 육상계에 보내야 한다면 연맹과의 협조를 처음부터 백지화하겠다는 것이 손 감독의 생각이었다.
'그 부분은 지정만 구단 사장이 연맹과 직접 협의하기로 했으니 백지화 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기 코치는 단호하기까지 한 손 감독의 표정을 살피며 속으로 웃음 짓는다.
육상연맹과의 협조는 굳이 강호를 육상계에 내어주지 않아도 구단 프런트가 알아서 협의를 진행할 거라 여겨진다.
예산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육상연맹에서 자이언츠 구단이 내미는 카드를 거절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부분은 손 감독 역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강호가 걸린 일에는 남달리 예민해하는 손 감독이었다.
'나 같아도 강호 같은 선수는 절대 내주지 않을 거야.'
기 코치는 강호에 대한 손 감독의 단호한 입장에 공감하며 피식 웃음 짓는다.
그 때 손 감독의 뒤편에서 김민철 수석코치가 모습을 드러냈고, 기 코치는 그에게 꾸벅 인사하며 한 걸음 물러선다.
그런 기 코치에게 목례로 답한 김 수석은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손 감독에게 건네며 말을 걸어온다.
"감독님, 내일 경기 라인업 구성 예비 명단을 가져왔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김 수석의 말에 한 걸음 물러선 기 코치가 표정을 바꿀 무렵, 손 감독은 김 수석이 내민 라인업 명단을 받아든다.
그 명단은 손 감독이 아닌 김 수석이 작성한 내일 경기의 라인업 예비명단 표였다.
여태껏 매 경기마다 라인업을 손수 작성하던 손 감독은 내일 경기를 대비해 수석 코치인 김 수석에게 라인업 구성을 맡겼었다.
김 수석이 작성한 예비 라인업을 참고하여 조금 더 폭 넓은 시야로 선수 구성을 하기 위한 손 감독의 시도 중 하나인 것이다.
"다 좋은데 한 자리만 바꾸면 되겠어."
손 감독의 대답에 김 수석은 환한 표정을 짓는다.
고민을 거듭하며 정한 아홉 자리의 타순에서 한 자리만 바꾸면 된다는 손 감독의 말에 흡족해진 것이다.
김 수석은 자신의 구상이 손 감독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웃음 짓는다.
"아무래도 7번 타순에 넣은 상훈이를 빼고, 문표를 넣는 게 낫겠지요? 최근 1루수 자리에서 문표가 잘 해줬으니까 말입니다."
김 수석은 손 감독의 구상을 예측해보며 먼저 묻고 있었다.
김 수석 본인이 가장 고민했던 자리가 바로 1루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수석의 물음에 손 감독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문표 녀석은 문학 구장에서 성적이 좋지 못하니까 상훈이로 가는 게 맞아."
손 감독의 대답에 김 수석은 '역시'라는 말을 작게 되뇌며 다른 타순으로 생각을 옮긴다.
그 역시도 문표의 문학 구장 성적을 고려해서 1루수 자리에 김상훈의 이름을 넣었던 것이다.
"그럼 2루수 최훈을 빼고, 황인태로 갈까요?"
"인태 녀석은 최근에 스윙 폼이 커져버렸어. 폼이 무너진 인태보다 최훈을 넣는 게 옳아."
김 수석은 두 번째로 고민이었던 2루수 자리를 말해 보았지만, 손 감독은 이번에도 김 수석의 생각이 옳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김 수석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1루수나 2루수가 아니면 내가 구상한 라인업에서 바꿀 내용이 없을 텐데? 혹시 좌익수 자리에 넣은 스팅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
잠시 고민해보던 김 수석은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한다.
"그럼 누구를 뺄까요?"
김 수석의 물음에 손 감독은 손을 들어 예비 명단의 한 부분을 검지 끝으로 가리킨다.
"이 자리를 바꿔. 중석이를 넣도록 해."
손 감독이 가리킨 타순을 확인한 김 수석은 깜짝 놀라고 만다.
그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 있던 기성태 코치 역시 놀라는 모습이었다.
"네? 진심이십니까?"
김 수석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손 감독의 결정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 감독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래. 당연할 수 있는 부분을 꼬아서 역으로 라인업을 짜면 와이번스가 오히려 당황하게 될 게야. 어차피 인천 경기는 단판전이니까 처음부터 심리전을 걸어서 흔들 필요가 있어."
손 감독의 대답에 김 수석은 조금이나마 납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납득이 되는 부분보다 납득되지 않은 부분이 더욱 많았기에 잔뜩 좁힌 미간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감독님도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감독님 말씀대로 이번 문학 경기는 와이번스와의 시즌 마지막 남은 경기니까 허를 찌르고 들어갈 필요도 있는 거야.'
김 수석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손 감독이 지적한 부분을 수정하기 위해 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 한쪽에 물러난 채 잠자코 있던 기성태 코치가 손 감독을 향해 한걸음 나선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다른 타순도 아니고, 4번 자리의 강호를 뺀 거 말입니다. 심리전을 걸 생각이시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기 코치의 물음에 손 감독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의 지적대로 손 감독이 김 수석에게 명단 교체를 지시한 선수는 다름 아닌 강호였다.
손 감독은 일요일 와이번스 전에서 강호를 라인업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렇지. 단지 심리전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겠지. 나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강호를 제외시킨 게야."
"네?"
기 코치는 손 감독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호의 시즌 기록과 최근 성적을 떠올려 본다면 손 감독의 말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길 생각이시면 강호를 넣으셔야죠! 시즌 4할 4푼에 73홈런을 치는 선수를 빼고 이기겠다니요? 포와 차를 빼고 장기를 두는 것보다 더 심한 핸디캡 아닙니까?'
기 코치는 속으로 드는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손 감독의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하지만 손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이 없었고, 결국 기 코치는 손 감독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다.
손 감독 본인이 말해 주지 않는다면 다음 날이 되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29일 일요일이 밝아 있었다.
오후 2시에 진행되는 경기를 위해 자이언츠 선수단은 일찍부터 경기가 열리는 문학 구장에 도착해 있었고, 팬들의 함성 속에 와이번스와 자이언츠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1회 초 시작과 함께 확인하게 된 자이언츠의 선발 라인업에 모든 팬들이 놀라고 만다.
와이번스를 당황하게 만들려던 손 감독의 의도는 단지 와이번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뿐만 아니라 원정 응원을 온 자이언츠 팬들마저도 당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백강호 선수가 어디 간 거야? 전광판 표기가 잘못된 거 아냐?"
"뭐가? 오잉? 정말 백강호가 어디 갔어? 4번 자리에 왜 채중석이 들어가 있어?"
"우리 백강호 선수한테 부상이라도 생긴 거 아냐?"
"그럼 큰일이잖아? 백강호 없이 한국 시리즈에서 어떻게 우승을 해?"
자이언츠 팬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단지 강호가 라인업에서 빠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팬들이 불안해 할 정도로 강호의 확고해진 존재감을 확인하게 된다.
다수의 팬들은 강호가 빠진 라인업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품속에 넣어둔 스마트 폰을 꺼내 생중계 내용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런 팬들의 관심과 동요 속에 자이언츠 라인업을 설명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자이언츠의 타순에서 놀라운 변화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타순입니다. 1번 타자 유성철, 2번에는 박철, 3번 타자 오진택, 4번에는 지명타자 채중석, 5번 타자 황제인, 6번 타자 스팅, 7번에는 김상훈, 8번 타자 캡틴 강민수, 9번 최훈의 순입니다."
캐스터의 타순 설명이 끝이 나고, 곁에 있던 해설 위원이 오늘 자이언츠 라인업의 최대 특이점을 곧바로 설명하고 나선다.
"정말 의외의 일입니다. 백강호 선수가 빠졌어요. 경기 전에 확인해 보기로는 부상이나 컨디션 저하는 아닌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손성조 자이언츠 감독의 말로는 단순한 라인업 변경 중 하나라고 합니다."
해설을 하고 있는 안지원 위원은 본인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것인지 속 시원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추측을 내놓으며 해설위원의 본분을 잊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측하기에는 최근 들어 백강호 선수에 대한 상대팀 배터리의 견제가 심해졌거든요. 백강호 선수가 최근 열 경기에서 얻어 낸 볼넷 개수가 스무 개입니다. 그 중 대부분이 고의사구나 다를 바 없는 회피성 볼넷으로 보면 되고요. 실제로 24일 다이노스 전에서는 고의사구 네 개를 기록하기도 했죠. 손성조 감독 생각으로는 백강호 선수에 대한 이런 견제가 나쁜 흐름으로 갈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아요. 아마도 만루 상황과 같은 승부처에서 백강호 선수를 대타로 내세우지 않을까하는 예상이 됩니다."
그것이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한 안지원 위원의 생각이었다.
안 위원이 내린 결론을 바로 곁에서 듣게 된 권성호 캐스터는 괴상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꾸의 말을 꺼낸다.
"요악해보면 백강호 선수를 대타로 기용하겠다는 말이 되네요."
"네, 그런 의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 말씀이 정말이라면 국내 리그에서 이보다 좋은 대타 카드가 또 있을까요? 시즌 4할 4푼 5리에 73홈런을 치는 대타 카드이지 않습니까? 백강호 선수 정도면 대타가 아니라 대 타자인 것 같은데요?
권 캐스터는 안 위원의 대답에 농담으로 응수하며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스마트 폰을 통해 듣게 된 자이언츠 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후 강호의 라인업 제외가 어떤 변수를 불러일으킬지 활발한 갑론을박에 들어가고, 그런 팬들의 대화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백강호 선수가 대타면 캐스터 말대로 대타가 아니라 '대 타자'가 맞지! 4할에 70홈런 치는 대타가 세상에 어디 있어?"
"어디 있기는 우리 자이언츠에 있잖아. 대타자 백강호!"
"대타자 백강호? 어감 좋은데?"
자이언츠 팬들은 유쾌한 결론에 도달하며 새로 지어진 강호의 별명에 만족해한다.
그런 팬들의 시선 속에 강호가 빠진 경기는 묘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